시작은 충동적이었다. 생일을 이틀 앞둔 밤, 갑자기 나는 이번 생일을 특별하게 보내고 싶어졌다. 평소 지인들의 생일은 물론 내 생일조차 잘 챙기지 않았는데, 무려 '혼자만의 여행'이라는 조금은 오글거리는 이벤트를 감행하려 하다니... 아마도 그때 내 안에 쌓인 이런저런 감정들을 돌아보고 싶었던 마음과, 가장 좋아하는 계절인 겨울을 오롯이 즐기고 싶었던 바람이 합심하여 나를 떠민 듯하다.
자정이 넘어 시작한 검색을 통해 내가 원하는 조건(서울에서 너무 멀지 않은, 나 같은 도보 여행자가 이곳저곳 둘러보기 좋은 도시에 있는, 1인 숙박이 가능한, 화장실이 딸려 있어야 하고 밤에 파티가 없는 조용한)에 맞는 숙소를 찾아냈다.
그곳은 바로 춘천의 '썸원스 페이지(Someone's Page)'라는 '북스테이' 게스트하우스였다. 처음 접해보는 북스테이라 다소 생소했지만, 책을 좋아하는 나에게 좋은 시간이 될 거라는 확신을 갖고 아침이 밝아오자마자 숙박을 예약했다.
청춘, 춘천 그리고 책용산역에서 춘천역까지 ITX-청춘열차로 걸리는 시간은 약 1시간 15분. 비록 삶은 계란은 없었지만, 기차 여행의 기분도 살짝 맛볼 수 있고 몸도 고되지 않은 적당한 시간이다. 이유는 모르지만 열차 이름에 '청춘'이라는 단어가 들어가 있다는 점이 나홀로 여행에 대한 기대감을 높여주었다. 춘천역에 도착해 20분 정도 걸어가면 썸원스 페이지를 만날 수 있다.
번화가도 관광지도 아닌 조용한 동네에 자리한 숙소는 기대 이상으로 만족스러웠다. 1층은 게스트만을 위한 로비로 사용되는데, 북스테이답게 많은 책들이 비치되어 있고 좋은 음악도 흐르고 따듯한 커피를 마실 수 있다.
로비를 포함해 방으로 올라가는 복도, 휴게실, 객실 내부까지 아기자기한 감성의 소품들과 방문객들이 남긴 여러 흔적들이 가득해 이들을 구경하는 것만으로도 즐거운 눈요기가 된다.
늦은 시간 숙소에 도착한 나는 지기님과 간단한 대화만을 나누고서 읽을 책들을 고르기 시작했다. 숙소 곳곳에 비치된 사진집, 동화책, 만화책, 소설책, 시집, 잡지 등 다양한 종류의 책들 중 몇 권만을 고르기는 무척 어려웠다. 그저 종류만 많은 것이 아니라, 디자인을 전공하신 지기님의 감각과 안목으로 엄선되어 평소 읽고 싶다 생각했던 책이 너무 많았기 때문이다.
'춘천의 내 방'에서 마음껏 하는 독서
하룻밤에 읽을 수 있는 책의 양을 알면서도 욕심을 부려 네 권의 책을 고른 뒤, 방으로 들어왔다. 숙소 이름에 걸맞게 각 방의 문 앞에는 페이지 수와 책에서 발췌한 글귀가 적혀 있다. 이런 사소하지만 세심한 감성에 감탄하며 방문을 열면, 마치 내 방에 온 듯 아늑하고 정갈한 공간이 나타난다.
'책을 사는 것은 책을 읽을 시간까지 함께 사는 것'이라는 말을 어딘가에서 들은 적이 있다. 나는 책을 사지는 않았지만 2인실을 '1인 여행 할인 비용'으로 예약해 책 읽을 시간까지 샀으니, 이제 마음껏 그 시간을 누릴 차례다.
휴대폰을 끄고 푹신하면서도 탄탄한 침구에 몸을 누인 뒤, 챙겨온 책들을 읽어 내려갔다.
참, 방마다 놓인 방명록에 기록된 누군가의 페이지(숙소에 대한 인상부터 자신에게 보내는 편지 등 다양한 글과 그림들로 채워져 있었다)를 훔쳐보고 내 흔적 또한 남겨보는 재미도 놓치지 않았다.
오래 머물고 싶은, 또 다시 찾게 되는 곳다음날 아침, 못 다 읽은 책들을 챙겨 로비로 내려갔다. 보통의 숙소라면 서둘러 체크아웃을 하고 밖을 나서지만 이곳에서는 책을 마저 읽기도, 사진을 찍고 다른 손님들을 구경하기도 하며 오래 머무르고 싶었다.
아는 이 하나 없는 타지에서 이처럼 아무 계획 없이 무방비로 시간을 보내는 건 처음이었는데 어쩐지 불안하지도, 다급하지도 않았다. 바깥은 차고 건조한데, 큰 창으로 스며드는 겨울 볕과 주문한 차의 훈김 덕인지 로비는 참으로 안온했다.
나는 첫 숙박 이후 지금까지 이곳에서 두 번을 더 묵었다. 세 번 모두 추운 계절이었다. 그동안 춘천 곳곳에 점점이 흩어져있는 작은 명소들을 섭렵했고, 늘 찾는 식당도 생겼고, 내가 그린 그림으로 만든 엽서를 숙소에 남기기도 했다. 춘천이, 썸원스 페이지가 곧 나의 별장과도 같아진 것이다.
은행나무 열매가 발길에 차이는 이맘때쯤이면 나는 벌써 달력을 보며 다음 춘천행을 계획하기 시작한다. 의암호의 잔잔한 수면을 닮은 숙소에서 올 한해도 독서와 함께 차분히 마무리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