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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마을 유적에 주목해야 하는가?

우리나라 국토의 특색을 말하자면 대체로 야트막한 산줄기와 함께 어우러지며 굽이굽이 흘러가는 하천 그리고 그 주변에 자리 잡고 있는 마을을 쉽게 떠올릴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마을을 중심으로 하천을 따라 펼쳐져 있는 주변 평야에는 어김없이 논이나 밭이 존재하고 있다. 이런 자연조건 아래에서 우리나라 사람들은 정착 농업을 시작한 시기부터 현대에 이르기까지 일테면 정착농경사회를 이루어왔다. 그리고 이런 토대 위에서 우리네 나름의 독특한 정주문화와 농경문화가 싹텄다.

이렇듯 마을은 이 땅에 첫 사람이 터전을 잡은 이래 우리나라 사람들이 삶을 살아가는 터전이자 생활공간이었으며, 이에 따라 자연스레 마을을 중심으로 인문정신과 사상·신앙, 예술문화가 꽃을 피우게 되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대개의 우리나라 마을 유적 주변에는 오늘날 우리가 소중하게 가꾸고, 보호해야 할 문화유산들이 널려 있다.

예컨대 저 까마득한 원시인들의 유적에서부터 시작해 고인돌, 고분, 산성, 마을 유적, 정자·누각, 사찰, 서원·향교 등 우리 선인들의 지혜와 미적 감각, 인문정신을 엿볼 수 있는 문화유산들이 마을을 중심으로 지금까지 그 맥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을 유적은 특별한 의미를 지니고 있는 것이다.

옻골마을의 상징, 돌담

팔공산 자락 아래에는 옻골마을이 있다. 행정구역상 대구시에 속하는 옻골마을은, 시내버스로도 방문할 수 있다. 옻골마을행 시내버스에 탑승한 뒤 30분 쯤 지나 좁은 길목으로 들어서면, 갑자기 시골 풍경이 나타나기 시작한다. 오른편에는 들판이, 앞쪽으로는 팔공산이 보인다. 이러한 갑작스러운 풍경 전환은 흥미롭기만 하다. 이어 버스가 구불한 길을 따라 좀 더 들어가면 마침내 종점인 옻골마을에 도착할 수 있다.

버스에서 내리자 팻말이 보였는데 '옻골마을 경주최씨종가'라고 적혀 있었다. 팻말 옆에는 거대한 둘레의 회화나무가 모습을 드러낸다. 어찌나 큰지 나무 기둥을 두 사람이 안아도 손이 닿지 않을 정도였다. 수령이 350년이 되었다고 하니, 이 마을의 역사와 함께 한 산증인인 셈이다. 둘레, 높이, 크기 여러모로 보아 웅장하기 그지없고, 보는 이로 하여금 외경심을 불러 일으키기도 했다. 이런 나무가 저 한 쪽에 또 있었는데, 회화나무와 나이가 동갑인 느티나무 두 그루였다. 높이 솟은 느티나무 위에는 새 둥지가 여러 개 있었다. 넓은 나무는 새들의 터전이었다. 늙은 나무일수록 더 많은 것을 품고 포용하는 모양이다.

동네 입구에 들어서자 정려각(旌閭閣)이 나타났다. 1789년 이 마을의 대학자였던 최흥원의 효행과 학행을 기리기 위해 세웠는데, 내부에 정조대왕이 하사했다고 하는 홍패가 보였다. 정려각을 보니, 이 마을의 유구한 역사와 분위기가 가까이 다가왔다. 해설사 분의 말씀에 따르면 사실 이 마을은 임진왜란 시기 의병대장이었던 최동집이 자녀교육을 위해 이곳에 정착하면서 역사가 시작됐다고 한다. 그 이후 경주최씨 종가를 중심으로 일가를 이루어 이 마을을 형성했던 것이다. 마을은 풍수사상의 영향으로 산과 자연의 정기와 음양의 기운을 따져 마을 입구에 비보림과 인공연못이 조성되어 있었다.

유형원의 반계수록을 교정한 백불고택 보본당

마을 안으로 좀 더 걸어 들어가자 고즈넉한 분위기의 돌담길이 양쪽으로 뻗어있다. 이 돌담은 이 마을의 특색을 이루고 있었다. 그야말로 전통의 운치를 한껏 느낄 수 있었는데, 흙과 돌로 세운 누런 빛깔의 돌담은 담장 위에 얹어놓은 기와의 색과 잘 어울렸다. 돌담 위에는 누렇게 마른 소나무 잎을 얹어두었다.

의도한 바는 아니었지만, 주변의 푸른 소나무들은 누렇게 마른 소나무 잎의 빛깔과 조화를 이루었다. 또 어디선가 울려오는 산새소리는 돌담길과 어우러지며 아늑하고도 차분한 분위기를 자아냈다. 주변 자연에서 나는 흙과 돌, 나무로 이렇게 멋있는 담장을 만든 옛 사람들의 지혜에 그저 고개를 숙이게 될 따름이었다.

돌담길 주변에는 전통 가옥이 자리를 잡고 있다. 많은 가옥들 중 돌담길의 끝에 위치하고 있는, 이곳 종가인 백불고택(百弗古宅)에 들렀다. 이 고택 앞의 돌담길은 약간 굽어 있었는데, 나쁜 기운을 막기 위한 의미라고 했다. 숙종 대 건립했다고 하는 백불고택 내부에는 사랑채, 안채, 재실, 가묘, 별묘 등이 있으며, 조선시대 양반 가옥의 전형적인 모습이었다. 집 중앙에 들어서 종가를 바라보니 안동의 도산서원이 떠올랐다. 전통가옥을 방문해 도산서원이 떠오른 까닭은 무엇이었을까? 아마 이곳 역시 비록 가옥이기는 하나 그만큼 학문적인 공간이었음을 말해주는 것은 아닐까라고 생각했다.

사랑채는 일자(一字)형의 건물이었고, 집 중앙에선 산이 정면으로 보인다. 고택 오른 편은 가묘, 별묘가 있는데, 출입을 금하고 있었다. 가장 오래된 건물이라 하는 안채는 'ㅁ'자형으로 가장 폐쇄적인 공간이다. 한편, 조금 안으로 들어가자 보본당(報本堂)이라는 건물이 나왔다. 이곳에서 저 유명한 실학자 유형원의 <반계수록(磻溪隧錄)>을 교정했다 하니, 그 역사적 의미가 사뭇 깊었다. 또 이 가문의 높은 학덕도 짐작케 하였다.

어느덧 시간이 흘러 버스가 출발할 시간이 되어있었다. 이곳은 보기 드물게 도심 속에서 여전히 전통을 간직하고 있을 뿐만 아니라, 대부분 불교 유적이 자리 잡고 있는 팔공산 자락에서 조선의 유교적 전통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에서 상징적이다.


태그:#팔공산, #옻골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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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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