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한양공원' 비석 앞에서 서해성 감독의 해설을 듣고 있다.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한양공원' 비석 앞에서 서해성 감독의 해설을 듣고 있다.
ⓒ 김경년

관련사진보기


"저기 보이는 공터가 바로 107년 전 오늘 바로 이 시각 이완용이 테라우치 통감과 함께 한일병탄 문서를 작성한 곳입니다."

22일 오후 3시 일본군 위안부 피해자들의 희생을 기리는 서울 남산 예장자락 '기억의 터' 현장. 가만히 앉아만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르는 무더위 속에서 30여 명의 독립유공자 후손이 서해성 3.1운동 100주년 기념사업 감독(성공회대 교수)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시간이 흘러 아무것도 남아 있지 않은 이 자리가 친일파 이완용이 나라의 국권을 넘겨주는 문서를 작성했던 일본 통감의 관저터라는 말에 어디선가 "아~" 하는 아픈 탄성이 흘러나왔다.

남산 조선총독 관저 사진.
 남산 조선총독 관저 사진.
ⓒ 부산박물관소장

관련사진보기


서울 심장부 남산에 산재한 7곳의 국권상실 현장

이날은 서울시가 남산에 새로 조성하기로 한 '국치길' 조성계획을 발표하는 날. 한국통감관저터, 조선신궁터 등 남산 여기저기 산재한 7곳의 치욕스런 국권 상실 현장을 이어 만들 계획이다.

서울시는 1.7km에 달하는 이 길을 내년 8월까지 완성하고 시민들을 위한 역사 교육의 장으로 활용할 예정이다. 국치길을 따라 '기억하겠다'는 뜻으로 'ㄱ'자를 형상화한 로고를 넣은 보도블록을 설치한다.

분위기를 숙연하게 하는 성재창 충남대 교수의 애국가 프럼펫 연주와 김남중 비올리스트의 '파가니니를 위한 오마주' 연주가 끝나자, 백발이 성성한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서 감독을 따라 '국치길' 답사에 나섰다.

이들이 과거 중앙정보부 건물을 거쳐 다음에 도착한 곳은 서울애니메이션센터 앞에 있는 한국통감부·조선총독부 터. 을사조약 이후 한국통감부였다가 한일합병 이후엔 광화문에 새 건물이 지어질 때까지 조선총독부 역할을 했던 건물이 있던 곳이다.

서 감독은 이곳에 지난 2015년 철거한 옛 조선총독부 산하 체신사업회관 건물지의 폐콘크리트 기둥을 이용해 국치길을 알리는 표지석을 세워, 국치길을 학생들의 수학여행 1번지로 만드는 게 꿈이라고 말했다.

여기서 조금 걸어 올라가니 노랗게 색칠한 리라초등학교가 보였다. 이곳은 러일전쟁의 영웅으로 일컬어지는 노기 마레스케의 신사가 있던 곳. 신사의 흔적은 찾아볼 수 없으나 당시 이 신사에 공납과 기부를 한 조선인을 기리는 기념비가 남아있어 탐방객들이 쓴 입맛을 다시게 했다.

버스를 타고 청일전쟁의 승전을 기념하기 위해 일본인들이 세운 '갑오역기념터'와 일본거류민단이 창건한 '경성신사터'를 지나 '한양공원' 비석에 당도했다.

이 비석은 임진왜란 때 일본인 거주지역이 있었다는 허위사실을 근거로 1910년 일본인들이 공원을 만든 것을 기념하기 위해 세웠다. 고종황제가 쓴 글씨로 새겨져 있어 더욱 가슴이 시리다.

계단을 조금 올라 도착한 마지막 목적지는 '조선신궁터'. 일제가 한국에 세운 1천여 개의 신사 가운데 가장 지위가 높고 위치가 좋아 서울 시내 어디에서도 올려다보였다고 한다. 해방후 철거된 뒤 남산식물원이 있었으나 지금은 한양도성 복원사업이 진행 중이다.

남산 국치길 탐방에 나선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조선신궁터를 둘러보고 있다.
 남산 국치길 탐방에 나선 독립유공자 후손들이 조선신궁터를 둘러보고 있다.
ⓒ 김경년

관련사진보기


"수십 년 살아온 서울에 이런 곳이 남아있을 줄이야"

탐방이 끝난 뒤 독립유공자 후손들은 대부분 "서울에 수십 년 간 살아왔지만 남산이 이런 곳이 남아있는 줄 몰랐다"며 특히 남산타워가 바로 올려다보이는 조선신궁터에 3.1절 백주년 기념조형물을 세웠으면 좋겠다고 말했다.

주중 일본공사를 처단하려다 붙잡혀 옥사한 백정기 의사의 후손 백재승씨(44)는 "이완용이라는 사람이 이 더운 날 남산 통감관저까지 와서 나라를 팔아먹었다는 사실에 분개한다"며 "이 길을 도는 내내 역사를 운운하는 것조차 부끄럽고 마음이 좋지 않았다"고 말했다.

우당 이회영 선생의 손자 이종걸 국회의원은 독립유공자 후손들에게 "독립운동을 하면 3대가 망한다는 말에도 굴하지 않고 구국과 애국에 앞장섰던 생명의 동지들인데 너무 잊고 지냈다"며 울먹인 뒤 "오늘을 후손들이 다시 일어날 수 있는 계기로 삼자"고 말했다.

국치길 조성을 담당하는 진희선 서울시 도시재생본부장은 "해방 70년이 지났지만 우리 주변에는 아직도 고통스럽고 아픈 흔적들이 많이 남아있더라"며 "그런 것들을 모두 찾아내 다시는 치욕의 역사가 반복되지 않도록 하는 게 후손들의 몫일 것"이라고 말했다.


태그:#국치길, #조선신궁, #서해성, #통감부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