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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변대학교 캠퍼스를 둘러 본 후 40분 가량 이동해 룡정에 있는 윤동주 생가로 향했다. 기계와 화학, 제지 산업이 발달한 룡정은 연변조선족자치주 중부에 있는 상업도시다. 도시 이름은 우물에서 룡(龍)이 승천했다는 이야기에서 유래했다고 한다.

섭씨 30도를 웃도는 불볕더위였지만 민족의 시인 윤동주를 만난다는 생각에 마음은 설레기만 했다. 윤동주는 백석과 임화, 황순원과 함께 대한민국 4대 미남 시인으로 꼽힌다. 작품에 민족의식이 강하게 내포돼 있지만 음악적 운율은 여성들의 마음을 훔치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일본에는 윤동주 팬클럽까지 있다고 한다. 28세로 짧은 생을 살았지만 그는 누구보다 사랑받는 시인이었다. 

윤동주 시인 생가 입구에 있는 표지석
 윤동주 시인 생가 입구에 있는 표지석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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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0여 년의 시간차를 두고 윤동주를 만난다는 들뜬 기분도 잠시. 입구부터 찝찝한 느낌을 지울 수 없었다. 날씨탓 이라고 생각했지만 예상은 빗나갔다.

생가 입구에는 '룡정시인민정부 2014년 10월 25일 세움'이라는 글귀가 박힌 표지석이 일행을 반겼다. 대문을 장식하고 있는 표지석은 윤동주를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소개했다. 중국이 생가를 복원하면서 지난 2012년 세운 것이다. 지금은 연변조선족자치주가 문화재로 지정해 관리되고 있다고 한다. 민족의 애환을 달래준 시인 윤동주를 이국 땅 중국이 기리고 있다는 건 영 달갑지 않았다. 중국어로 작품을 남기지 않았던 그도 황당하게 느낄만 하다.

신학문 배우며 '민족 시인'으로 성장

대문 앞 표지석은 윤동주 시인을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대문 앞 표지석은 윤동주 시인을 ‘중국조선족애국시인’으로 소개하고 있다.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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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의 연변인 북간도는 일제강점기 독립 운동의 거점이었고, 근대 민족교육을 활발하게 펼친 지역이었다. 정서적으로 우리 땅이지만 법적으로는 중국 영토라는 이중성을 갖는다. 어릴 적 윤동주가 나고 자란 길림성 화룡현 명동촌은 북간도 최초의 한인마을이다. 사방이 산으로 둘러싸여 고요하고 한적한 분위기가 인상 깊다. 당시 주도적으로 마을을 일군 김하규, 김약연 등은 이주 전 고향에서 학업을 닦은 전통 유학자들이었다. 이들은 일제에 저항하기 위해 적극적으로 신학문을 받아들였다.

1908년 4월에는 한학을 가르치기 위해 명동학교를 세웠다. 학교는 민족의식을 일깨우는 교육거점기관으로 거듭났고, 수학한 학생들은 봉오동, 청산리 등에서 일제에 맞서 치열한 독립투쟁을 벌임으로써 민족사에 큰 영광을 안겼다. 마을 사람들도 모두 기독교로 개종할 만큼 명동학교의 명성은 대단했다고 한다.

자연이 살아 숨쉬고 신학문이 넘실거리는 명동촌은 학생 윤동주가 시인으로 성장하는 데 큰 자양분이 됐다.

윤동주 시인 생가 전경.
 윤동주 시인 생가 전경.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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룡정시 자치정부와 문학예술단체 등의 지원으로 지난 1994년 복원된 생가는 윤동주 시인의 삶을 고스란히 그리고 있다. 전통 한옥 모양의 가옥에는 곳간이 달렸고, 쓰다 남은 것으로 보이는 옷장과 가방, 가재 도구 등이 세월의 흔적을 말해줬다. 윤동주 시인이 1917년 이 집에서 태어났으니 100년 이상이 흘렀다.

윤동주 시인은 1938년 22세에 서울 연희전문학교에 입학하기 전까지 성장기 대부분을 북간도에서 보냈다. 암울한 시대에 희망을 그렸던 작품 '별헤는 밤'에는 "어머님, 그리고 당신은 멀리 북간도에 계십니다"라는 구절이 나온다. 윤동주에게 북간도는 고향이면서 어머니와의 추억, 사랑, 시적 가치관을 형성하는 데 영향을 줬다.

생가에 보존되고 있는 가재도구들.
 생가에 보존되고 있는 가재도구들.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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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간도가 희망을 내포한 정신적 지주였다면 그의 단짝 송몽규는 삶과 죽음을 함께한 동지였다. 고종 사촌인 몽규는 동주보다 석 먼저 태어났지만 허물없는 사이였다. 영화 <동주>에서도 그리고 있듯 시인 윤동주는 감성적이면서 내성적이었던 반면 몽규는 밝고 활발한 성격이었다. 다소 어울리지 않은 조합이었지만 둘은 모든 면에서 찰떡 궁합이었다. 연희전문학교를 다닐 때는 문학작품 품평회 등을 열며 함께 민족의식을 다졌다.

학교를 졸업한 1944년에는 같이 일본 유학길에 올랐다. 몽규는 교토제국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고, 동주는 릿쿄대학 문학부 영문과에서 학문을 이어갔다. 그러나 이들의 일본행은 삶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았다.

윤동주 시인을 그린 비석
 윤동주 시인을 그린 비석
ⓒ 최종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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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는 1943년 7월 방학을 맞아 송몽규와 고향 갈 준비를 하던 중 일본 경찰에 체포됐다. 조선의 독립을 꾀하고 선동을 벌인다는 이유였다. 당시 송몽규는 중국 군관학교 입교 전력으로 당국에 '요주의 인물'로 낙인 찍힌 상태였다.   

윤동주와 송몽규는 1944년 교토지방재판소에서 이른바 '재쿄토 조선인 학생 민족주의 그룹사건'으로 각각 징역 2년 형을 선고받았다. 피고인의 조국은 주권이 없었기에 모든 법과 행정은 일본 마음대로였다. 광복을 맞기 불과 몇 개월 전 윤동주는 2월 16일 후쿠오카형무소에서 차가운 바람을 맞으며 생을 마감했다.  

윤동주의 아버지 윤영석이 아들 시신을 수습하기 위해 형무소를 찾았다. 이 때 면회한 송몽규는 감옥에서 정체를 알 수 없는 주사를 맞아 동주가 저렇게 됐다고 증언했다. 송몽규 역시 20여 일 뒤 옥중 타계하고 말았다. 나라와 아들을 잃은 윤영석의 원통한 마음은 누가 헤아릴 수 있을까. 석 달 뒤 맞은 조국의 광복이 조금이나마 위로가 되었으리라.

시인이 남겨 놓은 작품들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다.
 시인이 남겨 놓은 작품들이 바위 곳곳에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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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동주의 유해는 룡정의 한 공동묘지에 묻혔다. 묘비를 향해 몸을 튼 후 잠시 넋을 기렸다. 그는 주 활동 무대였던 동북아 세 나라에서 서로 다른 인물로 묘사된다. 한국에서는 독립정신을 일깨운 민족의 저항시인으로, 중국에서는 연변 출신의 '조선족 시인', 일본에서는 자국으로 유학온 이가 죽음을 맞이한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탄생 100주년을 맞았지만 윤동주는 살아서도, 죽어서도 이방인의 신세를 벗어나지 못한 셈이다. 조국이 이제부터라도 그를 온전히 살펴야 할 것이다.


태그:#윤동주 시인, #윤동주 시인 생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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