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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풍경 1] ㅈ씨…. 그분은 지리산에만 700번 넘게 올랐습니다. 그것도 평범하게 오른 게 아닙니다. 아무도 없는 깜깜한 밤에, 길 없는 곳으로, 더욱이 혼자서만 오릅니다. 한 번 산행할 때 주파하는 거리는 50~75㎞, 젊었을 때는 75~100㎞까지 치고 나갔습니다. 그러다가 곰과 맞닥뜨린 적도 일곱 번, 죽을 고비는 숱하게 넘겼습니다. 사람을 만나도 눈길 한 번 주지 않는답니다. 산 보러 갔는데 왜 사람을 보고 아는 체하느냐는 겁니다(이 대목에서는 인간미가 좀 떨어집니다).

[풍경 2] 산에 푹 빠진 이들이 종종 5산 종주(일명 불수사도북, 불암산→수락산→사패산→도봉산→ 북한산을 한 번에 종주하는 산행)에 도전합니다. ㅇ씨는 다섯 개 산을 8시간 58분 만에 한 바퀴 쭉 돌았습니다(참고로 저는 22시간 13분 걸려서 성공한 적이 한 번 있습니다. 5산 종주를 마치고 났을 때의 소감은 산이 아주 지긋지긋하다는 것이었습니다). 한 바퀴 종주하는 데 성이 차지 않은 ㅇ씨는 반대 방향으로 한 바퀴를 더 돌았습니다. 걸린 시간은 20시간 54분…. 이게 끝이 아닙니다. ㅇ씨는 서울을 빙 둘러싸고 있는 산 26개를 2박 3일 동안 한숨도 자지 않고 돌기도 했습니다.

[풍경 3] 일본사람 ㅎ씨…. 여든이 다 된 노인인 그분은 7천 일(거의 20년)에 걸쳐 단 하루도 빠지지 않고 산에 오르고 있습니다. 태풍이 불어와도 산행을 멈추지 않고, 교통사고를 당해 다리를 절룩거리면서도 산에 오릅니다. 후지산에만 362번 올랐습니다. 집에서 멀리 있는 산에 오른 날은 야간열차를 타고 집에 온 뒤 바로 또 산에 오르기도 합니다. ㅎ씨의 목표는 1만 일 연속으로 산에 오르는 것입니다.

산에 푹 빠진 이런 분들의 모습을 보면서 제 머리에 떠오른 낱말은 '집요', '집착', 뭐 이런 것들이었습니다. 인간이 가진 체력의 한계를 극복했다, 강철 같은 굳은 의지를 지녔다, 이런 긍정적인 생각이 아니라 그분들의 산을 향한 집요한 마음, 기록에 대한 무모한 집착 같은 게 느껴져 좀 무섭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습니다. 영화 <미저리>에서 소설가에 대해 광기 어린 집착을 보이는 여자의 모습이 흘깃 비쳐졌다면 좀 지나친 표현일지도 모르겠지만, 어쨌든 섬뜩한 생각이 드는 것은 사실입니다.

한데 '섬뜩'까지는 아니어도 좀 '뜨악'한 표정을 제 주위 사람들에게서 접하곤 합니다. 백두대간 종주를 끝내고 나서, 한북정맥에 이어 낙동정맥을 종주하고 있으며, 한 주도 빠지지 않고 주말에는 산에 간다는 얘기를 하면, 사람들은 "참 대단하네!" 하는 반응을 보이곤 합니다. 백두대간이나 낙동정맥 종주 같은 산행은 웬만큼 산행 경력이 있는 분들은 한두 번쯤 섭렵하는 대단치 않은 일인데, 산에 별로 취미가 없는 분들에게는 쉽지 않은 일일 수도 있습니다.

그런데 그 '대단하다'는 말에서는 잘한다, 훌륭하다, 꾸준함이 부럽다… 뭐 이런 뜻이 잘 느껴지지 않습니다. 말하는 이들의 표정으로 유추해 볼 때 그런 긍정적인 뜻보다는 집요하다, 독하다 등의 느낌이 말에서 살짝 묻어납니다. 산을 좋아하지 않고, 산행을 잘 하지 않는 분들이 보기에 매주 꼬박꼬박 산으로 향하고, 한 번에 20㎞쯤은 그리 힘들지 않게 산을 오르는 제가 조금은 집요하고 집착하는 것처럼 느껴지나 봅니다. 앞의 세 가지 풍경에 나오는 분들한테서 제가 느끼는 그런 집요, 집착 말입니다.

그런 의미에서 앞의 세 분은 세상이 놀랄 만한 '강한 집착'을 보이는 분들이고, 저는 작긴 하지만 역시 집착의 모습을 지닌 욕심을 가졌다고 볼 수 있을 것 같기도 합니다.

땀, 콧물, 침, 눈물로 범벅된 복날 산행

삼의리에서 다리를 건너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큰 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해서 원래 마을 이름은 '산밑골'이었습니다.
 삼의리에서 다리를 건너며 산행을 시작합니다. 큰 산 아래 있는 마을이라 해서 원래 마을 이름은 '산밑골'이었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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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경북 영양군 석보면 삼의리에서 산행을 시작합니다. 삼의리는 첩첩산중 두메산골입니다. 사방팔방 어디를 둘러봐도 온통 산입니다. 마을이 산 밑에 있다고 해서 원래 이름은 산밑골이었습니다. 산밑골… 읽어 보시면 아시겠지만 발음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산'에서 '밑'으로, '밑'에서 '골'로 넘어가는 게 부드럽지 않습니다.

세 글자를 연속으로 발음하면 더욱 어렵습니다. 산밑골, 산밑골… 자꾸 부르다 보니 발음하기 쉬운 '삼의골'로 바뀌었고, 그러다가 한자어 '삼의리(三宜里)'로 바뀌었습니다. 마을 모습까지도 알 수 있을 듯한 이름이 근본을 알 수 없는 이상한 이름으로 바뀌고 만 것이지요. 재미있고 아름답기도 하고 또 유래를 알 수도 있는 마을 이름들이 일제 강점기 동안 한자어로 바뀌면서 사라져 갔습니다.

가파른 비탈길을 한 시간 가까이 힘들게 오르니 포도산 가는 길과 낙동정맥 산줄기로 가는 길이 갈라지는 지점에 이릅니다. 포도산도 한자어로 바뀌기 전에는 머루산이었습니다. 골짜기에 머루가 많이 나서 머루산이라는 이름을 지니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머루산이 한자 이름으로 바뀌면서 포도산이 돼 버렸습니다. 머루와 포도는 종자가 전혀 다른데 말입니다(요즘엔 둘의 중간쯤 되는 머루포도가 나오긴 합니다만). 예쁜 이름을 잃어버린 아쉬움이 큽니다. 본래 이름을 빼앗긴 마을과 산에 옛 이름을 하나씩 찾아 주면 좋겠습니다.

오늘이 중복입니다. 이름값을 하려는지 날씨가 미친 듯이 덥습니다. 이곳 경북 내륙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더운 곳이기도 합니다. 가장 더운 날, 가장 더운 곳에서, 땀을 비 오듯 흘리는 산행을 시작합니다. 친구들이 '집요'하다고 할 만합니다.

산악회 버스에서 내리는 순간 숨이 턱, 하고 1초쯤 막혔습니다. 습식사우나의 문을 열고 막 들어갔을 때 숨이 컥, 막히면서 정신이 혼미해지는 상황 그대로입니다. 그러니 가만히 있어도 땀이 줄줄 흐를 판인데 우리는 무거운 배낭을 메고 무거운 카메라를 들고 산길을 오릅니다.

이마에서, 목 뒷덜미에서 주르륵 흘러내리는 땀줄기가 느껴집니다. 가슴에서 배로, 등에서 엉덩이로 흐르는 땀은 작은 내를 이룬 듯합니다. 코는 왜 이리 또 자꾸만 나오는지 모르겠습니다. 산행하다 보면, 특히 여름에는 땀 닦기 바쁜 것만큼이나 코를 푸느라 정신이 없습니다.

숨을 몰아쉬며 힘겹게 산을 오르다 보면 자연히 입이 벌어지고 벌어진 입술 사이로 침도 나옵니다. 너무 힘들 때는 침을 삼킬 여력도 없어 그냥 주르륵 흐르기도 합니다. 여기에다 눈으로 들어가는 땀방울, 눈을 공격하는 날파리의 극성스러움을 이기지 못해 눈에서도 드디어 눈물을 발산하게 됩니다. 땀, 콧물, 침, 눈물… 이게 복날 산등성이를 오르내리며 감내해야 하는 고통의 상징 4종 세트입니다. 농도가 다르고 맛이 제각각 다른 이 네 가지 액체가 섞여 뒤죽박죽 엉망이 되어 버린 얼굴로 한 발짝씩 발걸음을 옮기다가 갑자기 이런 생각이 슬며시 머리를 스치기도 합니다.

'지금 내가 뭘 하고 있는 거지……'

나만의 경조사 원칙

여정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석도, 표지판도 없고, 땅바닥에 있는 네모난 삼각점만이 이곳이 봉우리임을 알려 줍니다.
 여정봉 정상에 올랐습니다. 정상석도, 표지판도 없고, 땅바닥에 있는 네모난 삼각점만이 이곳이 봉우리임을 알려 줍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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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행을 시작한 지 두 시간 만에 여정봉에 오릅니다. 산 정상 같은 느낌도 들지 않고 정상석이나 표지판도 없습니다. 다만 삼각점이 있는 걸로 봐서 봉우리라는 건 알 수 있고 지도를 보니 여정봉이라고 나와 있어 그런가 보다 할 뿐입니다.

삼각점은 국토정보지리원에서 주요 봉우리마다 박아 놓은 네모난 화감암 표식인데, 토지 측량의 기준 자료로 활용합니다. 산꾼 중에는 정상 인증 사진을 찍어야 하는데 정상석이 따로 없을 경우에는 아쉬운 대로 삼각점을 찍기도 합니다. 요즘은 GPS로 토지 측량을 한다고 하니 삼각점도 이젠 역사의 유물로 남을 것 같습니다.

오후 1시가 넘었습니다. 여정봉에 먼저 오른 분들이 한쪽에 자리를 잡고 점심을 먹고 있습니다. 술도 한 잔씩 곁들이는 모양입니다. 저는 조금 더 가서 먹을 생각으로 이분들을 지나쳐 갑니다.

과수원 옆을 지나다 보니 사과가 살짝 빨간색으로 변해갑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큰 영양 산간지대에서 껍질은 얇고 과즙은 많은 명품사과가 나옵니다.
 과수원 옆을 지나다 보니 사과가 살짝 빨간색으로 변해갑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큰 영양 산간지대에서 껍질은 얇고 과즙은 많은 명품사과가 나옵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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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갯길을 지나다 보면 이런 당집을 만나곤 합니다. 저 안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한 저는 꼭 문을 열어 들여다보곤 합니다.
 고갯길을 지나다 보면 이런 당집을 만나곤 합니다. 저 안이 어떻게 생겼을까 궁금한 저는 꼭 문을 열어 들여다보곤 합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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과수원 옆을 지나갑니다. 사과 과수원입니다. 아이들 주먹만 한 사과가 붉을 빛을 살짝 띠어 가며 주렁주렁 달려 있습니다. 영양의 특산물 하면 얼른 떠오르는 게 고추 그리고 사과입니다. 낮과 밤의 기온차가 크게 나는 산간지대여서 영양 사과가 맛있다고 합니다. 과즙이 많아서 한 번 콱 깨물면 즙이 입 밖으로 팍 튀고, 씹어 먹으면 아삭아삭 소리가 나는 명품 사과라고 합니다.

과수원을 지나 좀 가다 보니 당집이 하나 나타납니다. 제대로 모양을 내어 지었으면 '성황당'이라는 이름이 어울릴 텐데, 나무 골격에 함석 철판을 대충 얹고 붙여서 지은 집이라 그냥 '당집'이라 하는 게 어울립니다. 생긴 건 좀 허술해도 하는 역할은 같습니다. 마을의 안녕을 빌기 위해 제를 지내는 곳입니다.

저는 이런 당집을 만나면 문을 열고 들여다보고 싶은 충동을 느낍니다. 문이 잠겨 있으면 할 수 없지만, 열려 있으면 꼭 문을 열고 들여다봅니다. 이 당집도 그냥 지나치지 않고 잘 열리지 않는 문을 열어 보았습니다. 안에 무엇이 있을까요? 단 위에 무슨 상을 모셨다거나 벽에 무슨 그림을 붙여 놓았다거나 하는 건 없습니다. 촛대 같은 제를 지낼 때 쓰는 도구가 한쪽에 있고 빈 술병도 보입니다. 축축하고 음산한 기운이 도는 건 어쩔 수 없습니다.

성황당은 사람들이 넘어 다니던 고갯길에 짓곤 했기 때문에 옛날에는 사람들에게 친근한 장소였습니다. 고갯길을 넘다가 비를 만나면 들어가서 잠시 비를 긋기도 하고, 날이 저물면 성황당 안에서 잠을 자고 날이 밝은 뒤 길을 떠나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이젠 걸어서 고갯길을 넘는 사람이 없어졌으니 성황당도 자연히 사람들과 멀어져 마을에서 떨어진 고개 아래 을씨년스럽게 남게 됐습니다. 사람들과 멀어진 성황당은 그래서 쓸쓸하고 음침하고, 좀 무섭기도 한 곳으로 이미지가 바뀌어 버렸습니다.

요즘 유난히 경조사 소식이 많이 들려옵니다. 지인 부모님이 돌아가셨다는 소식은 일상적인 것이고, 친구들의 아들딸이 결혼한다는 소식도 점차 빈도가 잦아지고 있습니다. 게다가 요즘은 본인상 소식도 가끔 전해져 충격을 받고 황망해 하기도 합니다.

쉴 새 없이 날아드는 경조사 소식을 접하면서 저뿐만 아니라 많은 분이 경조사에 참석할 것인가, 말 것인가, 부조는 얼마를 해야 할까, 이런 고민에 휩싸일 것입니다. 참석 여부가 분명하거나 경조금 액수가 정해져 있는 경우도 있지만, 참석과 불참 사이에서 단번에 결정하지 못하고 망설이거나, 5만 원과 10만 원 사이에 왜 7만 원이란 경조금은 없는지 아쉬워하기도 합니다.

그래서 저는 제 나름대로 원칙을 정했습니다. 경조사 소식을 접했을 때 가야 하나 말아야 하나 하고 망설여지면 그땐 무조건 가자, 부조를 5만 원 내야 하나 아니면 올려서 10만 원을 내야 하나 하고 고민하게 되면 그땐 올려서 하자, 이렇게 말입니다. 특히 조사에 대해서는 무조건 지키려고 합니다. 고인에 대한 마지막 인사이기도 하고, 고인이 저 세상으로 가면서 쓸 마지막 여비이기도 하기 때문입니다.

결심 18 / 경조사는 어지간하면 참석하자. 조사는 특히 그렇게 하자.

낙동정맥은 영양군 석보면과 영덕군 지품면을 잇는 화매재를 가로질러 오르락내리락하다가 삼군봉에 이릅니다. 백두대간에 있는 삼도봉이 3개 도(경북, 충북, 전북)에 걸쳐 있듯이, 삼군봉은 3개 군(영양, 영덕, 청송)에 걸쳐 있는 해발 532m 봉우리입니다. 아까 올랐던 여정봉처럼 정상석도 없고 봉우리라는 느낌도 그다지 들지 않습니다. 다만 '준+희'라는 산꾼 부부가 정성스럽게 달아 놓은 팻말이 여기가 삼군봉임을 친절하게 알려 줍니다.

3개 도에 걸쳐 있으면 삼도봉... 이 봉우리처럼 3개 군에 걸쳐 있으면 삼군봉입니다.
 3개 도에 걸쳐 있으면 삼도봉... 이 봉우리처럼 3개 군에 걸쳐 있으면 삼군봉입니다.
ⓒ 배석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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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군봉에서 30분 못 미쳐 종착지 황장재에 도착합니다. 오늘도 역시 뒤에서 두 번째입니다. 얼른 등목을 한 뒤 식당에 들어가 시원하게 맥주 한 병을 들이켭니다. 한껏 달아올랐던 몸이 차분하게 가라앉습니다.

식당 한쪽에서는 영덕 특산물 복숭아가 까만 비닐봉지에 담겨 만 원씩에 팔립니다. 맛이 괜찮아서인지 다들 한 봉지씩 들고 나갑니다. 저도 마지막에 남은 한 봉지를 손에 듭니다. '완판'으로 기분이 좋아진 주인아주머니가 제 봉지에 복숭아 한 개를 더 넣어 줍니다. 그 한 개에 저도 기분이 한껏 좋아집니다.

(* 이 글을 쓰는 도중에 대학 동기 부친상 소식이 날아옵니다. 그 친구 고향이 제주도, 당연히 빈소도 제주도입니다. 그래도 가야 합니다. 제가 동기회장이니까요. 주말이고 휴가철이라 비행기표 구하기는 만만치 않을 듯합니다.)

♤ 낙동정맥 18구간 종주

날짜 / 2017년 7월 22일 (토)
위치 / 경상북도 영양군, 영덕군, 청송군
날씨 / 밀가루가 흩날리는 듯 뿌연 하늘에 기온은 32도까지 올라감
산행 거리 / 16.3㎞
소요 시간 / 6시간 15분
산행 코스(남진) / 삼의리 → 포도산 갈림길 → 여정봉 → 과수원 → 당집 → 화매재 → 삼군봉 → 황장재
함께한 산악회 / 기분 좋은 산행


태그:#낙동정맥, #등산, #산행, #산악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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