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이 글은 책을 장식용으로 사는 행태를 꼬집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 기자말

최근에 중요한 사실을 하나 깨달았다. 그건 책을 읽지 않는 사람일수록 책을 더 많이 살 수밖에 없다는 것. 그러니 그간 책을 팔기 위해 '책을 좀 읽으라'고 부추겼던 판매전략을 바꾸기로 했다. 앞으로는 이렇게 외치기로. 책을 읽지 마세요!

왜냐고? 사람들은 너무 바쁘다. 할 일이 너무 많다. 출근해서 9시간은 기본으로 회사에 일해야 한다. 거기에 야근에 특근도 있다. 밥도 먹어야 하고 <무한도전>도 봐야 하고 <쇼미더머니>도 봐야 하고 주말엔 영화도 보고 야구도 봐야 한다. 이렇게 바쁘고 할 일이 많은데 책을 언제 읽냐?

세상에 책은 또 얼마나 많은가? 읽을 시간은 없는데 책은 계속 만들어진다. 뭐가 좋은지 모르겠지만 책이 좋다고 어렸을 때부터 세뇌당했다. 책 읽는 사람이 지적으로 보이는 것도 같다. 최근에 나오는 책들은 표지도 심상치 않다. 시선을 잡을 만큼 예쁘다. 책 읽을 시간은 없지만 책을 사긴 해야 할 것 같다. 그럼 우선 한 권 산다.

책을 샀으니 인증샷을 찍어야 한다. 힙한 카페에 가서 책 가격에 상응하는 플랫화이트 시켜 놓고 사진을 찍는다. 드라이 플라워라도 있으면 금상첨화. 책을 찍으려는 의도가 아닌, 책을 읽다가 무심코 생각에 잠긴 순간이라는 걸 강조하기 위해 배경을 많이 보이게 한다. 이때 자랑하고 싶은 팔찌, 지갑, 시계 등 액세서리가 있으면 보일 듯 말듯 같이 찍자. 1석 3조다.

보이는 이미지만큼 내용도 좋아야 하니까 책의 아무 페이지나 펼쳐보자. 펼친 페이지에서 앞뒤 맥락은 잘 모르겠지만 마음에 드는 문장을 발견할 것이다. 없다고? 그럼 두세 페이지 앞뒤로 더 넘겨보자. 이젠 있을 것이다. 그래도 없다고? 그럼 그냥 책을 덮어라.

3분을 투자했는데도 펀치라인이 없다면 차리리 힙합을 들어라. 힙합에는 확실한 펀치라인이라도 있지. 쓰긴 써야 하는데 어떻게 하지? 걱정 마시라. 책 머리말이나 발문 추천사에서 좋은 구절을 발췌하여 책의 구절인 듯 내 생각인 듯 애매모호하게 적으면 된다.

사진도 다 찍었겠다. 이제 책은 덮어두고 남은 플랫화이트나 마저 마시면서 '좋아요'를 기다린다. 책은 바쁘니까 읽을 수 없다. 책은 집에 있는 책장에 잘 꽂아둔다. 읽지 않은 책들이 책장에 가지런히 꽂혀있는 것만으로도 꽤 보기 좋다. 인테리어까지 완성했으니 이 얼마나 훌륭한 책의 쓸모인가. 이제 부담 없이 또 아낌없이 다른 책을 살 수 있다. 

중요한 점은 책을 절대로 읽어서는 안 된다는 것이다. 책을 읽지 않아야 책을 바꿔가며 인증샷을 더 많이 찍어서 올릴 수 있다. 매일 쏟아지는 신간에 발맞추어 문화를 즉각적으로 흡수하는 문화인인 척할 수 있고 책방 주인들에게는 최고의 고객이 될 수 있다. 책은 읽지 않아야 계속 좋은 책으로 남을 수 있다. 어떤 평가도 내릴 수 없으니까. 책이 싫어지는 일도 영원히 없다.

작은 크기의 작들
▲ 이후북스 책 작은 크기의 작들
ⓒ 황남희

관련사진보기


그런데 바쁘고 바쁜 와중에 한 번쯤은, 공중에 떠서 갈피를 찾지 못하는 시간이 주어질지도 모른다. 데이트 약속이 펑크나서 기분은 더러운데 잘 차려입고 나왔으니 집에는 들어가기 싫고 뭐라도 하며 시간을 보내야 할 때, 거짓말처럼 마음에 드는 문장이나 단어가 눈에 들어와 책을 읽어버리는 날. 어쩌다 펼친 책이 재밌어서 끝까지 다 읽고 책을 덮었더니 아뿔싸! <쇼미도머니>도 끝나버렸다.

안타깝지만 만약 그런 날이 온다면 당신은 그 시간만큼 늙어버렸다. 웬만한 책 한 권 읽는데 드는 시간은 2시간 분량의 영화를 보는 것보다 긴 시간이 소요된다. 하루에 다 못 읽고 몇 날 며칠을 읽어야 하는 책도 있다. 그러니 얼마나 많은 것을 못한 채 책만 읽은 것인가?

책이란 건 그냥 표지만 감상하고 페이지는 들춰만 보고 장식용으로 소모해버려야 한다. 더군다나 오랜만에 책방에 갔더니 책방지기는 당신이 늙었다며 타박이나 한다.

그런데 늙어버리는 건 무슨 의미냐? 삶을 이해할 수 있다는 것. 삶을 이해한다는 건 무슨 의미가 있냐? 용서할 수 있다는 것. 용서할 수 있다는 건 무슨 의미냐? 남이 되어 보는 것. 남이 되는 건 무슨 의미냐? 나를 반성할 수 있다는 것. 나를 반성하는 건 무슨 의미냐? 다른 내가 될 수 있다는 것. 다른 내가 되는 건 무슨 의미냐? 다양해지는 것. 다양해지는 건 무슨 의미냐? 더 많이 살 수 있다는 것. 더 많이 산다는 건 무슨 의미냐? 결국, 늙어버리는 것. 그렇다, 이 목록은 다시 시작된다. 그러나 다르게 채울 수도 있다.

이제 당신은 책을 사면 좋고, 안 사면 싫은 손님 이상이다. 당신은 너무 까다로워졌다. 책방지기는 당신 마음에 들 책을 고르고 골라야 한다. 당신이 발견하지 못한 책을 자꾸만 보여주려 노력하게 된다(그러니 이 글 최초의 목적대로 '책을 읽지 마세요'라고 다시 외치는 바이다).

둘은 이제껏 하지 않은 대화를 하게 되고 서로에게서 무언가를 배우고 채워나갈지도. 나 역시 오로지 독자로만 남게 된다면 책 읽는 늙은이가 되고 싶다. 자 이제 선택하면 된다. 희망을 품고 책을 그 자리에 놓아만 두던가, 늙음을 직시하며 책을 읽던가. 아니, 근데 선택은 결국 하나네. 일단은 책을 사는 것!

덧붙이는 글 | - 글쓴이는 이후북스 책방지기입니다.



태그:#이후북스, #책방일기, #책, #책읽다늙지, #독립책방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