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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립기념관에서는 지난 6월 27일부터 7월 1일까지 4박 5일 간 '2017 대학생 나라사랑 역사탐방'을 실시했습니다. 전국의 역사학과 및 교육대학교 재학생 30명으로 구성된 탐방단은 일본 가나자와·도쿄 지역 일대의 독립운동사적지 등을 둘러보고 한·일 양국의 역사청산과 화해를 위해 무엇을 해야할지 고민해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탐방 간 보고 들으며 느꼈던 경험을 독자 여러분과 공유하기 위해 탐방 수기를 <오마이뉴스>에 연재합니다. – 기자 말

(* 2부에서 이어집니다)

가나자와에서의 마지막 일정은 누카다니(額谷) 조선인 강제노역 현장 답사였다. 겐로쿠엔(兼六園)에서 점심식사를 마치기 무섭게 버스에 오른 우리는 한참을 달린 끝에 목적지에 도착했다.

버스에서 내리자마자 우리가 마주한 것은 인적이라곤 전혀 찾아볼 수 없는 산길이었다. 초입에는 '가나자와 남부구릉 역사몽가도(南部丘陵 歷史夢街道)'라는 표지판이 세워져 있었다.

"이곳엔 곰이 살고 있으니 조심해야 한다"며 다무라 교수는 학생들에게 방울을 나눠주기 시작했다. 살짝만 흔들어도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지는 이 방울은 곰을 쫓는 효과가 있다고 했다.

이윽고 우리는 방울을 흔들며 끝없이 이어진 산길을 걷기 시작했다. 무덥고 습한 날씨 탓에 옷은 이미 땀으로 젖은 지 오래였다. 우리는 한 손으로는 부채질을, 한 손으로는 손수건으로 이마에 흐르는 땀을 닦아가며 목적지만을 바라보고 걸었다. 다무라 교수 역시 거친 숨을 몰아쉬면서도 우리가 가고자 하는 누카다니 동굴에 대해 현장 강의를 이어갔다.

누카다니 동굴로 향하는 산길
 누카다니 동굴로 향하는 산길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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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인 강제동원 현장, 누카다니 동굴

우리가 지금 오르는 산길의 끝에 위치한 누카다니 동굴은 일제강점기 당시 강제동원된 조선인들이 노역하던 장소였다고 한다.

동굴이 만들어진 것은 1945년 4월. 전쟁이 막바지에 이르렀을 무렵이었다. 당시 일제는 연합군의 눈에 띄지 않는 울창한 삼림 속에 군수공장을 만들어 물자 생산에 박차를 가하고자 했다.

누카다니는 그러한 조건에 부합되는 최적의 공간이었다. 게다가 이곳엔 내연성이 뛰어난 석재가 곳곳에 널려있어 설사 공습을 받는다고 해도 큰 화재가 일어나지 않는다는 장점도 있었다.

군대로부터 군수물자 생산을 위탁받은 미쓰비시 중공업은 이곳에 50개의 동굴을 뚫어 비행기 엔진을 만드는 공장을 세우고자 했다. 그 작업은 당연히 강제동원된 조선인들과 일본인들의 몫이었다. 다무라 교수의 설명에 따르면 이곳에는 약 600명의 조선인이 일하고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다만 공장은 일제의 패망으로 가동되지는 않았다고 한다.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인 누카다니 동굴의 모습
 조선인 강제동원 현장인 누카다니 동굴의 모습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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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군함도

걷기 시작한 지 20분쯤 지났을까. 마침내 절벽 아래 군데군데 자리 잡은 동굴들이 하나둘 눈에 띄기 시작했다. 크기는 제각각이었지만 수십 명이 들어갈 수 있을 만큼 튼튼하고 넓은 동굴들이었다.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믿기 힘들 정도였다. 낯선 이국땅까지 끌려와 동굴 공사에 동원됐을 조선인 피해자들을 생각하니 덥다고 이 길을 불평하며 오른 나 자신이 부끄러워졌다.

우리는 다무라 교수의 안내로 손전등을 켜고 동굴 안을 직접 둘러볼 수 있었다. 동굴 안의 분위기는 을씨년스러웠다. 오래 있기가 질릴 정도로 스산하고 음울한 기운이 가득했다. 동굴의 서늘한 기운도 원인이었겠지만 이곳에서 혹사당한 조선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신음이 귓전에 울리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누카다니 동굴들을 만드는 데 조선인들을 강제동원했던 미쓰비시는 일본의 대표적인 극우 성향 기업으로 알려져 있다. 이번에 영화로 제작되며 대중들의 주목을 받고 있는 '하시마 섬'(일명 '군함도') 역시 미쓰비시가 운영하는 탄광이 자리 잡고 있던 곳이었다. 잘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이곳 누카다니 역시 우리가 잊지 말아야 할 또 다른 군함도인 셈이다.

누카다니 동굴 안을 둘러보는 탐방단원들
 누카다니 동굴 안을 둘러보는 탐방단원들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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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카다니를 기억해야 하는 이유

우리가 누카다니 동굴을 기억해야만 하는 이유는 분명하다. 일본이 여전히 강제동원 사실에 대해 반성하지 않고 있기 때문이다. 하시마 섬과 누카다니 동굴을 운영한 미쓰비시의 경우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아무런 보상을 하지 않았다.

오히려 그들은 조선인 노동력을 이용하는 바람에 손해를 입었다는 이유로 일본 정부로부터 보상금을 받아냈다. 이에 한국인 강제동원 피해자들이 몇 년 전부터 미쓰비시를 상대로 손해배상 청구 소송을 제기했지만, 미쓰비시 측이 이에 불복하면서 배상을 받을 길도 요원해진 상황이다.

미쓰비시 동굴 앞에 선 다무라 교수가 다시 한번 입을 열었다.

"독일 역시 나치 정권 당시 강제동원을 한 역사가 있지만, 일본과 달리 피해자들에 대한 사죄와 배상에 적극적으로 나섰다. 독일 정부는 나치 시대에 존재하지 않았던 기업들에게도 보상금 마련을 위한 기금 모금에 참여하도록 독려했는데, 강제동원 피해자들의 희생 위에서 그들이 기업을 설립할 수 있는 기초가 마련됐다고 판단했기 때문이다."

그는 또 "요하네스 라우 독일 대통령의 경우 160만 명에 이르는 강제동원 피해자들에게 일일이 편지를 보내 사죄하기도 했다"며 "잔학한 역사를 거듭하지 않기 위해서는 역사적 사실을 직시하고 잊지 않는 것이 중요하다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그는 체코 출신의 프랑스 망명 작가 밀란 쿤데라의 말을 인용하는 것으로 누카다니 동굴의 교훈을 요약했다.

"권력에 대한 인간의 투쟁은 망각에 대한 기억의 투쟁일 뿐이다."

아쉬웠던 다무라 교수와의 작별

누카다니 답사를 끝으로 가나자와에서의 일정도 모두 마무리됐다. 이틀간 우리와 동행하며 현장 강의를 해준 다무라 교수와도 작별한 시간이 다가왔다.

그는 자신의 조국이 과거 벌인 만행에 대해 피해자인 우리들보다도 더 적극적으로 진상규명에 앞장서 온 양심적 지식인이었다. 일본인들 대다수가 과거 자신들의 만행을 부정하거나 외면할 것이라는 나의 편견을 깨준 장본인이기도 했다. 그래서인지 그와의 짧았던 만남이 너무나도 아쉽게 느껴졌다.

다무라 교수와 헤어진 우리는 신칸센을 타고 도쿄(東京)로 이동했다. 중간에 표를 잃어버리는 해프닝이 있었지만, 우여곡절 끝에 목적지인 우에노(上野)역에 무사히 도착해 숙소에 여장을 풀었다.

도쿄의 조선인 유학생들, 대형사고를 치다

도쿄에 도착한 다음 날, 아침부터 비가 주룩주룩 내리기 시작했다. 때마침 일본에서도 장마가 시작된 것이다. 그러나 비가 온다고 해서 일정을 건너뛰거나 쉴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우리는 정해진 일정을 소화하기 위해 아침 일찍 숙소를 나섰다. 오늘부터 우리는 도쿄 일대의 독립운동사적지를 탐방할 계획이었다.

일본의 수도인 도쿄는 구한말부터 시작된 조선인 청년들의 대표적인 일본 유학 코스였다. 1918년 말 재일유학생의 총수는 769명인데, 이 중 642명이 도쿄에 있었던 것으로 파악된다. 우리에게 익히 알려진 이광수·최남선·홍명희 역시 도쿄를 중심으로 활동한 유학생 1세대에 속했다. 도쿄에 모인 유학생들은 친목 단체를 조직하고 기관지를 발행하며 계몽운동을 전개했다.

망국의 설움과 울분으로 가득 차 있던 조선인 유학생들은 마침내 '대형사고'를 친다. 1919년 2월 8일, 도쿄에서 조선청년독립단을 조직한 뒤 독립선언서와 결의문, 민족대회소집청원서를 발표한 것이다. 대담하게도 이들은 독립선언 직후 해당 문서들을 일본 정부와 조선총독부, 언론사 등에 배포하고 유학생 대회를 개최했다. 이른바 '2.8 독립선언'이었다.

이날 독립선언을 주도한 유학생들 대부분이 일경에 의해 체포됐지만, 그 뜨거운 열기는 수그러들 줄 몰랐다. 이튿날인 9일 조선총독부 관할 기숙사에서 80여 명의 학생들이 동맹 퇴사를 결의한 데 이어 12일 히비야(日比谷) 공원에서 제2차 만세시위가 벌어진 것이다. 결정적으로 2.8 독립선언은 3월 1일 국내에서 전개되는 3.1혁명의 도화선으로 작용했다.

2.8 독립선언 당시 투옥됐던 학생대표들의 출옥기념사진
 2.8 독립선언 당시 투옥됐던 학생대표들의 출옥기념사진
ⓒ 2.8독립선언 기념자료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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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8 독립선언의 산실,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을 찾아서

그 당시 조선인 유학생들이 모여 독립선언을 낭독한 곳이 바로 '조선기독교청년회관'이었다. 그러나 그 당시의 건물은 1923년 9월 간토(關東) 대지진 당시 소실되는 바람에 그 흔적을 찾아볼 수는 없었다. 다만 사루가쿠초(猿樂町)에 그 후신인 재일본한국YMCA회관이 남아 당시의 기억을 증명하고 있었다. 지금도 운영 중인 이 회관의 입구에 '2.8 독립선언기념비'가 세워져 있었던 것이다.

재일본한국YMCA회관 입구에 세워진 '2.8 독립선언 기념비'
 재일본한국YMCA회관 입구에 세워진 '2.8 독립선언 기념비'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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YMCA 앞에 도착하니 일본인 직원 다즈케씨가 마중을 나왔다. 그는 상당히 유창한 한국어로 우리에게 인사말을 건넨 뒤 우리를 건물 10층으로 안내했다. 그의 안내로 도착한 곳에는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이라는 팻말이 붙어있었다.

2008년 국가보훈처의 후원으로 개관했다는 이 자료실은 2.8 독립선언을 기억하기 위한 공간으로 활용되고 있었다. 자료실로 올라가는 계단 벽면마다 당시 독립선언에 참여한 조선인 유학생들의 사진이 걸려 있었다. 넓지 않은 자료실에는 독립선언의 경과와 의의를 소개하는 전시물들이 촘촘히 진열되어 있었다.

재일본YMCA회관 10층에 자리잡고 있는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 전경
 재일본YMCA회관 10층에 자리잡고 있는 '2.8 독립선언 기념자료실' 전경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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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좁은 공간이었지만 일본 땅에 우리 독립운동의 흔적을 기념하는 공간이 존재한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벅차올랐다.

어쩌면 이곳은 우리 같은 한국인들보다는 과거 자신들이 저지른 만행을 기억하지 못하는 일본인들에게 적극적으로 알려질 필요가 있지 않을까.

관람을 마치고 나서는 우리들에게 다즈케씨가 인상 깊은 작별인사를 던졌다.

"과거에는 한국과 일본의 관계가 좋지 않았지만 지금 여기 YMCA에서는 한국인 직원들 그리고 나와 같은 일본인 직원들이 평화를 이야기하며 함께 일하고 있다. 이곳이야말로 한일우호 관계의 상징과도 같은 공간이라는 점을 기억해달라."

98년 만에 재현된 만세 함성

이날 오후 우리는 히비야 공원으로 향했다. 2.8 독립선언 나흘 뒤인 12일 당시 이곳에서는 200여 명의 유학생들이 모여 제2차 만세운동을 벌였다.

우리들은 98년 전 낯선 이국땅에서 '독립'을 목표로 하나가 되어 만세를 부르짖었을 그들을 생각하며 다 함께 '대한 독립 만세'를 힘차게 제창하는 시간을 가졌다.

1919년 2월 12일, 도쿄 재일유학생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던 히비야공원에서 98년 만에 만세함성을 재현하는 모습
 1919년 2월 12일, 도쿄 재일유학생들이 모여 만세운동을 벌였던 히비야공원에서 98년 만에 만세함성을 재현하는 모습
ⓒ 김경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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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 한 번 부르는 데 목숨을 걸어야만 했던 시대, 그것도 식민지 백성이 적국(敵國) 수도의 한복판에서 만세를 부르기까지는 엄청난 용기가 필요했을 것이다. 오늘 우리들이 내지른 만세 함성을 어찌 감히 절박했던 당시의 함성에 비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그들의 넋이 서려 있는 역사적 현장에서 다 함께 만세를 부르고 나니 가슴 속에 응어리진 한(恨)이 조금은 풀리는 것도 같았다.

(* 4부에서 계속됩니다)

덧붙이는 글 | 참고문헌 : <일본 지역 한국독립운동의 발자취를 따라서>, 윤소영(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17.



태그:#군함도, #누카다니, #도쿄, #가나자와, #독립기념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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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양대 사학과 박사과정 (한국사 전공) / 독립로드 대표 / 서울강서구궁도협회 공항정 홍보이사 / <어느 대학생의 일본 내 독립운동사적지 탐방기>, <다시 걷는 임정로드>, <무강 문일민 평전>, <활 배웁니다> 등 연재 / 기사 제보는 heigun@naver.com

오마이뉴스 김도균 기자입니다. 어둠을 지키는 전선의 초병처럼, 저도 두 눈 부릅뜨고 권력을 감시하는 충실한 'Watchdog'이 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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