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 전 대통령이 처음 이틀간 교도관 당직실에 기거했다고 한다. 그 이틀간 구치소 측은 박 전 대통령의 독방에 도배를 해주었다고 한다. 

14일자 <노컷뉴스>에 따르면, 지난달 31일 새벽 서울구치소에 수감된 박근혜는 감방이 너무 지저분하다며 독방에 들어가기를 거부했다고 한다. 그러면서 도배를 요구했다고 한다. 그래서 구치소 측은 박근혜를 이틀간 당직실에 수용하는 한편, 그 사이에 독방을 도배해 주었다고 한다.

이런 보도에 대해 서울구치소는 14일 설명 자료를 통해 "박근혜 전 대통령이 입실을 거부하거나 도배를 요청한 사실은 전혀 없다"며 "박 전 대통령이 수용된 해당 거실은 2013년 이후로 도배를 한 적이 없어 구치소 자체 판단으로 거실 정비 작업을 진행했다"고 밝혔다.

하지만, 서울구치소의 행위는 형집행법(형의 집행 및 수용자의 처우에 관한 법률) 위반이다. 형집행법 제14조는 다음과 같다.

형집행법 제14조.
 형집행법 제14조.
ⓒ 국가법령정보센터

관련사진보기


위 조문에 따르면, 죄수는 원칙상 독거수용 즉 독방 수용을 해야 한다. 하지만, 예외가 있다. "다만"으로 시작하는 단서 조항의 제1호에 따르면, 독방이 부족하거나 기타 사유로 인해 시설이 불충분할 때는 혼거수용을 할 수 있다. 

따라서 독거수용실에 대한 도배가 필요해서 수용자를 가두기 힘든 경우에는, 다른 독방에 임시로 가두거나 아니면 여러 죄수들이 함께 사용하는 혼거수용실에 가두면 된다. 이런 경우에 수용자를 수용실도 아닌 교도관 당직실에 수용해도 된다는 규정은 없다.

그러므로 서울구치소가 박근혜를 이틀씩이나 당직실에 수용한 행위는 법적 근거가 없는 일이다. 박근혜를 구치소에 가두라는 법원의 명령을 이틀간이나 이행하지 않은 셈이 된다.

그리고 그것은 박근혜에 대한 명백한 특혜다. 4일자 <오마이뉴스> 보도의 표현처럼, 그 이틀간 박근혜는 죄수 생활을 한 게 아니라 '교도관 체험'을 한 셈이 된다. 

강화도에 유배중이던 광해군의'교도관 체험'

지금으로부터 393년 전이다. 1624년의 조선왕조도 유사한 사건으로 시끄러웠다. 1623년부터 강화도에 수감(유배) 중인 광해군이 '교도관 체험'을 했다는 이유로 조정이 시끄러웠던 적이 있었다.

박근혜의 교도관들은 이틀씩이나 당직실을 비워주었다. 광해군을 지키는 교도관들은 이틀이 아니라 훨씬 더 오랫동안 '당직실'을 비워주었다. 그 정도가 너무 심해서 세상에 소문이 퍼지고, 그로 인해 정부에서까지 문제가 된 것이다.

광해군과 폐비 류씨를 강화도에 호송한 별장 홍진도는 인조의 이종사촌형이었다. 홍진도는 인조 쿠데타(이른바 인조반정)에도 관여했다. 덕분에 쿠데타 이듬해인 1624년에 왕자 급인 남양군에 책봉되기도 했다. 공신 대우를 받았던 것이다.

음력으로 인조 2년 6월 3일자(양력 1624년 7월 17일자) <인조실록>에 따르면, 홍진도는 자신과 동료들의 방을 광해군 부부가 쓰도록 했다. 그리고 자신들이 광해군 부부의 방을 사용했다. 광해군 부부를 강화도로 호송하는 동안 혹은 강화도로 호송한 뒤로 한동안 이런 일이 있었다.  

광해군이 폐위된 해는 1623년이다. 그 해 음력 3월 12일, 양력 4월 11일, 그는 임금 자리를 빼앗겼다. 강화도로 유배된 날은 11일 뒤인 음력 3월 23일, 양력 4월 22일이다. 홍진도가 광해군 부부의 방을 사용한 것은 양력 4월 22일 이후의 일이다. 이런 일이 얼마 동안 지속됐는지는 정확히 알 수 없다.

서울구치소 직원들은 박근혜한테 당직실을 내주었다. 홍진도의 행위도 외형상 똑같다. 하지만 동기는 달랐다. 서울구치소 직원들은 박근혜를 위해서 그렇게 했지만, 홍진도는 자신과 동료들을 위해서 그렇게 했다. 

강화도로 이동하는 동안 혹은 강화도로 이동한 뒤에 홍진도와 그 동료들에게 배정된 방은 마루방이었다. 마루가 깔린 방이라면 구들 같은 난방 시설이 없었을 것이다. 그냥 마루만 깔려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잠자기가 불편했을 것이다.

대만(타이완) 기상학자 류자오민이 쓴 <기후의 반역>에 따르면, 홍진도가 살았던 17세기 동아시아는 지금보다 평균기온이 1도 정도 낮았다. 그래서 당시의 4월 하순은 지금보다 쌀쌀했다. 홍진도가 광해군을 '당직실'로 밀어 넣은 이유 중 하나는 그것이었을 것이다. 난방이 안 되는 방에 광해군 부부를 밀어 넣고, 난방이 되는 방은 자신들이 차지했던 것이다.

홍진도는 인조 쿠데타에 기여했다는 이유로 상당히 들떠 있었다. 위의 <인조실록>에서는 그가 교만하고 방자했다고 말한다. 4월 하순이라 마루방이 쌀쌀해서 그랬을 수도 있지만, 마음이 너무 들뜬 나머지 폐주를 무시하고 싶은 생각이 들어서 그랬을 수도 있다.

<인조실록>에서는 홍진도의 행위를 들은 사람들이 다들 놀라움을 감추지 못했다고 한다. 어쩌면, 안방을 빼앗는 것보다 더한 일이 있었을 수도 있다. 이 시기는 광해군 정권이 몰락한 뒤라서 광해군에 대한 소소한 박대는 그냥 묻히기 쉬웠다. 그런데도 홍진도의 행위가 문제 된 것은 그가 너무 막 나갔기 때문이다.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영화 <광해, 왕이 된 남자>.
ⓒ 리얼라이즈 픽처스

관련사진보기


광해군에 정신적 고통 안겨 준 궁녀

광해군은 강화도에 있다가 제주도로 옮겨졌다. 그는 이곳에서도 '제2의 홍진도'를 만났다. 이번에는 남성이 아니라 여성이었다. 실학자 이긍익의 <연려실기술>에 인용된 정재륜의 <공사견문록>에 따르면, 그 여성은 광해군을 시중하라고 배치된 궁녀였다. <공사견문록>은 궁궐에 출입하면서 보고 들은 이야기를 정리한 책이다.

여성 교도관 격인 그 궁녀는 광해군한테 모질고 건방졌다. 참다못한 광해군이 그를 꾸짖었다. 이때 광해군은 '되로 주고 말로 받는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느꼈을지 모른다. 궁녀를 질책한 뒤에 엄청난 봉변을 당했기 때문이다.

궁녀는 광해군을 '영감'이라고 불렀다. 영감은 차관이나 국장급에 대한 존칭이었다. 요즘 식으로 하면, 광해군을 '이 차관님' 혹은 '이 국장님'으로 부른 셈이다.

광해군의 꾸지람을 듣고 격분한 궁녀는 영감 호칭을 써가며 길고 긴 일장연설을 해댔다. 연설 주제를 한마디로 정리하면 '높은 자리에 있을 때 잘했으면 이런 일을 겪지 않지'였다. 홍진도는 광해군에게 육체적 고통을 안겨준 데 비해 이 궁녀는 정신적 고통을 안겨주는 존재였다.

광해군은 인조의 입장을 대변하는 홍진도와 궁녀 때문에 괴롭고 치욕적인 유배 생활을 경험했다. 안 그래도 괴로운 광해군은 인조의 충신들인 그들로 인해 한층 더 괴로움을 겪었다.

그런 광해군이 2017년 3월 31일 오전에 서울구치소에 벌어진 풍경을 봤다면 어땠을까? 박근혜가 교도관 당직실에 들어가는 장면을 봤다면, 자세한 내막을 알 리 없는 광해군의 머릿속에서는 그 순간 홍진도의 일이 스쳐 지나갔을 것이다. 그 순간 광해군은 "저자들도 홍진도처럼 폐주를 괴롭히는 자들이구나"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태그:#박근혜, #서울구치소, #광해군, #홍진도
댓글6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오마이뉴스 장지혜 기자 입니다. 세상의 바람에 흔들리기보다는 세상으로 바람을 날려보내는 사람이 되고 싶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