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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상범님의 영정사진
 남상범님의 영정사진
ⓒ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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걷기는 대단히 역설적인 여행이다. 가장 쉽고 흔한 반면 가장 힘겹고 드물기 때문이다. 더불어 가장 값싼 동시에 가장 비싸고 호사로운 여행 기술이다.

10년에 걸쳐 우리 국토 13바퀴 3만2500km를 걸어 순례한 남상범 선생이 지난 2월말 담도암으로 별세했다. 1년 6개월간 암세포와 싸웠다. 유언에 따라 생전 그가 심어놓은 선산의 마디 굵은 벚나무 아래 수목장을 치렀다. 74세 일기로 마지막 여행을 떠난 '걷기 영웅'의 자리는 쓸쓸하고 신산했다.

선생은 걷기 열풍이 불기 전인 2005년 11월부터 병마에 쓰러지기 직전인 2015년 9월까지 국토 13바퀴를 홀로 여행했다. 필자는 2009년 5월 국토 8바퀴를 돌던 울산의 한 포구에서 그를 처음 만나 인연을 이어왔다.

국토 한 바퀴를 걸어 도는데 짧게는 3개월, 길면 10개월이 걸렸다. 20kg 배낭을 등에 지고 하루 평균 30~40km, 때로 80km를 걸었다. 강골 체력과 걷기에 대한 소명감으로 일정표는 늘 빠듯했다. 언젠가 그에게 '힘들면 천천히 가면 되지 않느냐'고 물은 적이 있다. "허허, 먹고 자고 하루 경비만 10만원이 들어, 거지 노인네가 돈이 어딨어?"라는 답이 돌아왔다.

그의 궤적을 들여다보면 무모하고 때로 드라마처럼 장엄하고 가슴이 뛴다. 동해~남해~서해~전방 철책선을 거짓말 보태지 않고 마름질* 따듯 걸었다.(* 옷감이나 재목 따위를 치수에 맞도록 재거나 자르는 일)

길 아닌 길을 걷다보니 영화에서나 있음직한 활극이 연출된 적도 부지기수. 맨 손으로 아찔한 해벽을 닌자처럼 넘나드는가 하면 풍경에 넋 놓고 있다 서해 밀물에 갇혀 죽을 고비도 여러 차례 넘겼다. 뻘밭에 어깨까지 빨려드는 위험천만한 순간도 있었다. 풀독으로 양 종아리는 10년간 지독한 가려움에 시달려야 했다.

  땡볕에서 국토순례 도중 환하게 웃는 남상범님.
 땡볕에서 국토순례 도중 환하게 웃는 남상범님.
ⓒ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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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년 노구에 왜 이토록 처절하게 국토를 행보하였을까. 그는 자신의 도보여행을 두고 '인생의 법정'에 섰다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고독하고 힘든 여정을 통해 자신의 삶을 뿌리까지 거슬러 통찰했고 길섶에 주저앉아 돌이킬 수 없는 회한에 오열했다. 그런 뒤 비로소 과거로부터 자유로워졌다고 말했다. 길 위에서 과거 오만했던 자신의 민낯을 대면하고 스스로 옭아맨 형벌을 스스로 푼 것으로 보인다. 어찌됐건 걷기는 그에게 구원의 길을 열어 주었다.

사람이 풍경이 될 수 있음을 그는 길에서 깨달았다. 사람에 감동하고 사람에 실망하며 걷기 여행은 풍경이 아닌 사람과 사람을 이어가는 여정임을 확인했다. 쳇바퀴 돌 듯 국토를 걷다보니 이 땅 벽촌의 웬만한 촌부들과는 스스럼없는 사이가 됐다.

"어르신, 또 걸으시네요"
"어, 집에 별 일 없지?"

공인 아닌 공인이 돼 행동거지를 함부로 할 수 없다며 웃던 기억이 선연하다. 실체 없는 응어리로 지역이 사분오열되어 있음도 목도했다. 경기도 포천 어느 시골 목욕탕에서 만난 어느 사내의 일화가 대표적이다.

탕 속에서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사내는 처음 본 선생에게 30년 된 비밀 하나를 털어놓았다. 자신은 본래 전라도 사람인데 일 때문에 경기도로 와 여태껏 고향과 말투를 감추고 살고 있다고 했다. 전라도에 대한 편견 때문이었다. 모국어 같은 사투리를 숨기느라 그가 치렀을 삶의 무게가 가슴 한켠을 오랫동안 후벼 팠다.

어느해 봄날 선생에게서 전화 한 통을 받았다. "계절을 멈추는 방법을 알았다"는 뚱딴지 같은 전화였다. 그의 말인즉슨 국토를 남에서 북으로, 때로 북에서 남으로 한 달 일정으로 종단하다 보면 계절의 변화가 멈춘다는 것이다. 어느 해는 한달 내내 '화무십일홍' 벚꽃 세상에 파묻히는가 하면 어느 해는 붉은 단풍 속에 갇히는 기이한 경험을 하게 된다고 했다. 무엇이든 한 분야를 파고들면 깨달음을 얻듯 그는 걷기를 통해 깨달음의 경지에 오른 듯 했다.

동가숙서가식하며 국토를 주유천하한 그의 호탕한 웃음이 우리 땅 곳곳에 배어 있다. 그물에 걸리지 않는 바람처럼,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걸어가는 그의 모습이 아프도록 그립다.

  국토순례 중인 남상범님이 어느 봄날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호젓한 도로를 걸어가고 있다...
 국토순례 중인 남상범님이 어느 봄날 벚꽃이 눈처럼 흩날리는 호젓한 도로를 걸어가고 있다...
ⓒ 김성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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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남상범, #국토순례, #걷기영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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