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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 어느 곳을 가든 스페인 여행은 지루할 틈이 없다. 1년 365일 곳곳에서 크고 작은 축제가 펼쳐지기 때문이다. '축제의 계절'이라는 봄은 말할 것도 없고, 여름과 가을에 스페인을 찾는다면 뻑적지근한 소란스러움을 각오해야 한다. 도시의 수많은 광장은 본디 축제를 위한 공간으로 마련된 것처럼 느껴질 정도다.

축제의 흥을 북돋우는 악단의 즉석 공연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 주말 마드리드 거리의 풍경 축제의 흥을 북돋우는 악단의 즉석 공연을 보기 위해 관광객들이 모여들고 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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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히 봄철 성주간 축제와 불 축제, 여름철 소몰이 축제와 토마토 축제 등은 우리에게도 잘 알려진 세계적인 축제다. 해마다 세계의 수많은 관광객들을 불러 모으며 전국을 들썩이게 하는데, 축제가 스페인을 먹여 살린다는 이야기도 있다. 주지하다시피 스페인에서 관광 산업은 국내총생산에 차지하는 비중이 매우 큰 핵심 산업이다.

스페인을 소개할 때마다 바늘과 실처럼 따라붙는 '정열의 나라'라는 수식어도 축제와 무관치 않다. 낯선 사람에게 먼저 다가가 인사를 건네고, 만면에 웃음이 가득한 그들 특유의 낙천성은 축제를 즐기면서 길러진 그들만의 'DNA'일지도 모른다. 축제가 즐거운 일상을 만들고 그것이 다시 축제로 이어지는 선순환이 스페인을 정열의 나라로 이끌었다.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가장행렬이다. 이들의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마드리드 중심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 퍼레이드를 준비하고 있는 가장행렬단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가장행렬이다. 이들의 퍼레이드를 보기 위해 마드리드 중심가는 인산인해를 이루었다.
ⓒ 서부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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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람브라 궁전이 있는 그라나다에서 그랬던 것처럼, 주말 마드리드의 도심을 걷다 우연히 대규모의 가장행렬을 맞닥뜨렸다. 대개 축제의 하이라이트는 손수 제작한 옷을 입고 분장을 한 채 음악에 맞춰 거리를 행진하는 가장행렬이다. 참가자들의 옷차림과 휘장에 적힌 글귀를 보니, 스페인이 이슬람 세력의 지배에서 벗어난 것을 기념하는 축제 같았다.

어른과 아이들이 어우러진 축제

족히 예순은 넘어 뵈는 어르신들과 그들의 손주 뻘인 어린 아이들까지 한데 어우러진 축제의 장이었다. 무사 복장을 한 이들이 길을 열면, 그 뒤로 화려하게 치장을 한 여인들이 따르고 웬만한 관현악단 부럽지 않은 음악대가 흥겨운 행진곡을 연주한다. 차림새로만 보면 아군과 적군이 확연하지만, 축제의 유래와는 상관없다는 듯 서로 웃고 떠들며 하나가 됐다.

거리는 순식간에 사람들로 가득 찼고, 음악에 맞춰 박수를 치거나 어깨춤을 추며 일부는 가장행렬을 뒤따르기도 했다. 관광객들 중 누군가가 함께 사진을 찍자고 부탁하면, 대열에 맞춰 행진을 하다 말고 다가와 환한 얼굴로 포즈를 취해주었다. 스페인에는 겨울이 없다는 말도, 어쩌면 추위를 녹여버릴 만큼 축제의 열기가 뜨겁기 때문 아닐까 싶다.

가장행렬이 끝나는 곳은 마드리드의 중심인 솔 광장이다. 그다지 규모는 크지 않지만, 대규모 상업시설이 밀집된 번화가다. 대부분의 지하철 노선이 이곳을 지나며 하루 종일 사람들로 북적인다. 유동인구가 많은 탓인지 수많은 행위예술가들의 삶터이기도 하다. 광장 한쪽에는 스페인 각 지역을 연결하는 도로가 시작된다는 뜻의 '0km' 표지가 있어 이곳이 마드리드, 나아가 스페인의 중심임을 보여준다.

여느 도시의 한복판이라면 오가는 차량의 경적 소리로 요란할 테지만, 이곳에서는 음악의 선율을 당해내지 못한다. 광장의 구석마다 만화 캐릭터를 코스프레한 기괴한 분장으로 행인들을 놀라게 하는 행위예술가들이 동상처럼 서 있고, 다른 한쪽에서는 바이올린과 색소폰, 트럼펫 등으로 귀에 익은 클래식을 연주하는 이들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각양각색의 재주를 뽐내는 예술가들이 솔 광장의 진정한 주인인 셈이다.

하긴 스페인의 어느 곳을 가도 '거리의 예술가들' 천지다. 광장은 물론, 관광지와 지하철역, 시장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곳이면 어딜 가든 그들을 만날 수 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관객이고, 그들이 선 자리가 무대다. 언뜻 구걸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지만, 그들은 엄연히 거리 공연 중이고 자신이 낸 음반을 전시한 채 즉석에서 판매하는 경우도 있다.

스페인의 상징이라는 플라멩코도 따뜻한 남쪽 세비야에서만 볼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웬만한 도시에선 밤마다 현란한 기타 연주에 몸을 맡긴 무용수의 정열적인 발굽소리를 어렵지 않게 들을 수 있다. 스페인의 밤이 낮보다 환한 것은 수많은 예술가들의 열정이 어둠을 불사르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의 일상 속에서 예술은 '교양'을 넘어 '생활필수품'으로 자리 잡은 듯했다.

축제가 마무리될 무렵, 인파를 피해 숨 돌릴 겸 솔 광장이 한 눈에 들어오는 카페를 찾았다. 스페인의 카페는 건물 바깥이 '상석'이다. 비가 내리는 궂은 날이 아니면 대부분의 사람들은 추운 겨울에도 바깥 자리를 선호한다. 일부 고급 카페의 경우엔 같은 음식을 주문해도 건물 안이냐 바깥이냐에 따라 가격에 차등을 둘 정도다.

그런데, 스페인에서 한 달 동안 식사를 하거나 커피를 마시기 위해 카페를 숱하게 들락거렸지만, 우리네처럼 음악을 틀어주는 곳은 단 한 군데도 없었다. 먹고 마시며 왁자지껄 대화를 나누는 걸 좋아하는 그들에게 음악을 틀어봐야 들릴 것 같지도 않지만, 길거리 공연이 흔한 탓도 있을 듯싶다. 수준 높은 생음악이 있는데 굳이 기계의 힘을 빌릴 필요가 없지 않은가.

스페인 청년들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

주위가 어둑해질 무렵, 축제로 들썩였던 솔 광장이 잠시 조용해졌다. 가장행렬과 구경 나온 관광객들로 발 디딜 틈조차 없던 광장이 원래 모습으로 돌아온 것뿐이지만, 소란스러웠던 낮에 비하면 마치 침묵의 공간처럼 느껴졌다. 내일 낮에도 광장은 예술가들의 차지가 될 것이고, 다음 주말에는 더욱 화려한 축제가 펼쳐진다고 한다.

밤이 되자 축제의 열기는 시위로 옮겨 불붙었다. 그들이 든 현수막에는 유럽의 불평등을 반대한다는 글귀가 씌어있다.
▲ 솔 광장의 시위대 밤이 되자 축제의 열기는 시위로 옮겨 불붙었다. 그들이 든 현수막에는 유럽의 불평등을 반대한다는 글귀가 씌어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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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권을 되찾자는 구호를 외치는 청년 시위대의 모습
▲ 시위대로 뒤덮인 솔 광장 노동권을 되찾자는 구호를 외치는 청년 시위대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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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로 그때, 어둠을 찢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사방의 도로에서 수백 명의 사람들이 한꺼번에 솔 광장으로 내달려 왔다. 그들의 분노에 찬 구호 소리는 확성기의 사이렌 소리와 호응하듯 불어대는 부부젤라 소리와 뒤엉켜 마치 전쟁 통을 방불케 했다. 대열 뒤로는 앰뷸런스와 경찰차, 청소차량이 따랐고, 인도를 걷던 사람들이 속속 시위대에 합류하는 모습도 보였다.

방금 전 낮 축제로 북적였던 솔 광장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마치 각본에 따라 움직이기라도 하듯 예술가들이 삼삼오오 서 있던 곳에는 길거리 공연 대신 격렬한 구호들이 나부꼈고, 가장행렬이 지나던 간선도로는 이내 시위대의 차지가 됐다. 사뭇 그로테스크한 광경이었다. 불과 두세 시간 만에 전혀 다른 세상을 경험하게 된 셈이다.

공공성을 강화하고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맨 뒤에 섰다. 그 뒤로 줄선 앰뷸런스와 경찰차, 청소차량이 이채로웠다.
▲ 민영화 반대의 물결 공공성을 강화하고 민영화에 반대한다는 구호를 외치는 시위대가 맨 뒤에 섰다. 그 뒤로 줄선 앰뷸런스와 경찰차, 청소차량이 이채로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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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들의 요구가 그다지 낯설진 않았다. 경제적 불평등과 민영화에 대한 시민들의 저항은 새삼 놀랄만한 건 아니다. 제대로 알아듣긴 어렵지만 현수막에 적힌 글귀만 봐도 그들의 구호에 담긴 간절한 바람을 읽어낼 수 있다. 많이 호전됐다고는 하나 여전히 실업률이 20%에 육박하고, 특히 25세 이하 청년 실업률이 45%에 이르는 등 스페인의 경제 위기는 심각한 상황이다.

무언가에 홀린 듯 시위대를 따라갔다. 언뜻 보니 대부분은 20~30대 청년층이었다. 사실 지금 스페인에선 청년들의 모습을 보기가 쉽지 않다. 마땅한 일자리가 없어 취업을 위해 인근 프랑스나 독일로 나가는 것이 보편적이라고 할 정도다. 단순 서비스 업종에서 종종 보이는 젊은이들은 대개 아랍과 아프리카, 남아메리카 등지에서 건너온 이주 노동자들이다.

그러나 청년 시위대 속에서 '반이민' 정서는 느낄 수 없었다. 현수막과 손 팻말 어디에도 그런 내용을 찾아볼 수 없었다. 드문드문 검은 피부의 젊은이들도 눈에 띄었다. 실업의 고통 속에서도 유럽의 불평등에 분노할지언정 생존과 더 나은 삶을 위해 건너온 이민자들에게 화살을 돌리지는 않는 모습이었다. 하긴 스페인에선 도시를 걷다보면 난민을 환영한다는 내용의 현수막을 어렵지 않게 볼 수 있다.

광장에서 낮과 밤을 보내며 스페인의 축제와 시위를 동시에 경험한 특별한 하루였다. 장님 코끼리 만지듯 편견에서 벗어나 진짜 스페인을 보게 되었다고나 할까. 그때까지 일상이 축제이고 예술을 품고 사는 스페인 사람들에게 과격한 시위란 맞지 않는 옷이라 여겼다. 그러나 축제와 예술을 통해 길러진 특유의 낙천성과 정열적인 태도는 외려 시위를 이끄는 근원적인 에너지였다. 지금 힘겨운 시기를 보내고 있는 스페인의 청년들의 미래를 낙관하는 이유다.


태그:#스페인, #축제의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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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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