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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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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미디언들이 토크쇼 같은 데 나와 '남을 웃기는 어려움'에 대해 이야기하는 걸 들을 때가 있다. 그럴 때면 자주 듣게 되는 말이 남을 웃기는 데 탁월한 생김새를 지닌 코미디언이 분명 존재한다는 것이고, 이는 많은 코미디언들의 부러움을 산다는 것이다. 정말 머리에 떠올리기만 해도 괜히 웃음이 나는 코미디언이 있긴 하다. 그런 그들을 머릿속이 아닌 눈 앞에서 보면 확실히 쉽게 웃음이 푹 터지게 된다.

가끔 글을 읽다 보면 코미디언의 생김새처럼 일단은 '먹고 들어가는' 글쓴이를 만나기도 한다. 물론 글을 쓰는 능력이야 갈고 닦아야 하겠지만 그 글의 소재가 되는 '나'가 소잿거리로 안성맞춤이라면 글 쓰는 사람으로서 얼마나 좋을까 싶다. 나와 가장 가까이 있는 나에 대해 죽 풀어놓으면 그만이니 말이다. <저, 죄송한데요>를 쓴 디자이너 이기준도 그런 이유로 왠지 부러운 사람 중 하나다.

우연히 집어 든 이 책을 읽으며 처음에는 '이건 뭐지?' 싶었다. 이런 글도 책으로 출판되다니! 하는 느낌이었달까. 디자이너의 글이라서 그런지 창의적인 것 같기도 한 반면, 진지하게 생각해보자면 아무 내용도 아닌 것 같은 글들. 하지만 그냥 덮기엔 아쉬운 감이 있어 계속 읽다 보니 나도 모르게 끝까지 읽게 되는 요망한 책.

별생각 없이 슬렁슬렁 읽어나갔더니 어느 순간 피식 웃는 나를 만나게 되고, 중간쯤에는 애처롭기 그지없는 이기준이란 사람이 마구마구 궁금해지다가, 나중에는 엉겁결에 "와하하하" 웃게 되면서 다시 한번 '이건 뭐지?' 하는 질문을 던지게 하는 책.

이 책 속 모든 글의 중심엔 저자 이기준이 있었다. 모든 글에 저자 본인이 당당히 자리할 수 있는 이유는, 저자가 세상 소심한 사람이기 때문. 하는 행동 하나하나가 탁월하게(?) 소심한 저자 주위에서 벌어진 잔망스럽고도 자잘한 에피소드가 책에 가득했다(가득했다고는 하나 책이 굉장히 얇기 때문에 분량이 많지는 않다). 그리고 이런 에피소드 사이사이에 디자이너 특유의 섬세한 감각과 저자가 세상을 바라보는 부드럽고 독특한 시선들이 가볍게 섞여 있다.

책의 주제라고 해서 딱히 꼽을 건 없고, 어느 글도 서로 연관성이 없어 전체 맥락을 짚을 수도 없다. 독자는 그저 저자를 따라 히죽히죽 웃으며 즐겁게 책을 읽으면 그만이다. 그러다 '와, 이렇게도 생각하는 사람이 다 있구나' 하면서 자기 자신이 덜 소심한 것에 안도하면 충분하달까.

아니면 나처럼 '나는 왜 이렇게 덤덤한 사람인 것인가' 하며 자책을 해도 된다. 책 속에 이런 이야기가 나온다. 배가 아파 새벽에 깬 저자는 설사를 한 후 본인이 식중독이라고 판단하곤 이렇게 행동했단다.

"응급차를 부르려고 핸드폰을 찾았습니다. 옆구리 쪽에 놓인 핸드폰을 집다가 정신이 번쩍 들었습니다. 땀범벅으로 병원에 가면 간호사랑 의사가 얼마나 불쾌해할까요. 내가 내 몸 만지는 것도 이렇게 싫은데, 응급차 부르기 전에 샤워를 하기로 했습니다. 

침대에서 몸을 굴려 떨어뜨렸습니다. 굴러 떨어진 충격으로 몇 초간 꼼짝도 못 하다가 왼손으로 배를 움켜쥐고 오른손, 왼쪽 팔꿈치와 허벅지로 몸을 밀어내며 기었습니다. 신이 모든 걸 지켜볼 수 있대도 그 순간만큼은 한눈팔기를 바랐습니다." 

이후 저자는 척추를 꿈틀 거리며 화장실로 기어가 문턱을 허들 넘듯 넘은 후 겨우 쭈그리고 앉아 샤워를 끝낸 뒤 새 옷을 입고 핸드폰과 돈, 카드를 챙기고는 혹시 몰라 만화책까지 가방에 넣고 양말을 신을지 말지 고민하다가 아무래도 응급 상황에서는 맨발이 자연스러울 것 같아 신지 않기로 결정한 후 119인지 911인지 헷갈려하다가 119로 전화를 해 병원에 실려가게 된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이 식중독에 걸려 병원 신세를 졌다는 이 별 것 아닌 이야기를 내가 재미있게 읽을 수 있었던 이유는 글맛 때문이다. 지지리도 궁상을 떠는데 그 궁상을 요목조목 적나라하면서도 유머러스하게 묘사하는 실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잘은 모르겠지만 저자는 평소에도 자기 자신의 생각이나 행동에 꽤 관심을 가지고 살면서 스스로를 재미있어 하는 사람이 아닐까. 저자가 느끼는 그 '재미'가 독자인 나에게도 고스란히 전해졌다. 재미있는 책이다.

덧붙이는 글 | <저, 죄송한데요>(이기준/민음사/2016년 12월 30일/8천8백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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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 죄송한데요

이기준 지음, 민음사(2016)


태그:#이기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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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생처음 킥복싱>, <매일 읽겠습니다>를 썼습니다. www.instagram.com/clianna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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