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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 한눈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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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군은 활 쏘는 자세의 허수아비를 성가퀴 위로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적들은 허수아비를 아군으로 알고 총을 난사해댔다. 적들의 총탄을 일찍 떨어뜨리려는 계교였다.
괴강 건너편에 보이는 충민사의 풍경
 괴강 건너편에 보이는 충민사의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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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민사가 강 건너로 보이는 풍경. 강 이름은 괴강이다.
 충민사가 강 건너로 보이는 풍경. 강 이름은 괴강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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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10월 5일부터 10일까지 엿새 동안 왜적과 조선군 사이의 대혈전이 진주성에서 벌어졌다. 일본군은 약 3만, 아군은 약 8천6백여 명, 숫자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싸움이었다. 게다가 일본군은 오롯이 정예병이었고, 아군은 방금 농사를 짓다가 삽을 들고 쫓아온 의병까지 모두 합한 숫자였다.
1차 진주성 싸움 때 양측 병력 수


박성식의 <지방사>와 이형석의 <임진전란사>에는 일본군이 2만 명, 아군이 3천8백 명으로 나온다. 박성식은 '피아간 장병의 구성을 보면 아군이 얼마나 수적으로 열세였는지 알 수 있다. 특히 수성군은 3천8백여 명으로서 왜병 2만에 비하면 처음부터 중과부적이었다'라고 지적한다.

한국학중앙연구원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도 '적의 2만여 대군이 성을 포위하자 불과 3800여 명의 병력으로' 김시민이 분전했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화재청 누리집도 '김시민은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진주목사가 되어 사천, 고성, 김해 등지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진주성 싸움에서 3800여명의 병력으로 2만 대군과 맞서 싸워 승리를 거두었다'라고 해설하고 있다.

그러나 이 기사는 '일본군 3만, 아군 8600명'으로 기술한 국사편찬위원회의 <한국사>를 따른다. 아무튼 양측 병력이 얼마였는지는 정확하게 알 수 없으나 소수의 아군이 적의 대병력을 물리친 것만은 분명하다.

그러나 이 전투에서 아군이 이겼다. 한산대첩, 행주산성 대첩과 더불어 임진왜란 3대첩의 하나로 칭송받는 1차 진주성 전투가 탄생한 것이다. 진주대첩의 지휘관 김시민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의  홍보물, 현지의 안내판 내용 등을 참조할 수도 있지만, 객관적 학습을 위해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의 관련 부분을 읽어본다.

진주성 싸움이 벌어진 배경은?

<한국사>는 진주성 싸움이 벌어지게 된 배경부터 설명해준다.

'선조 26년(1593) 1월 6일 명군과 조선의 김응서 군 등의 연합군이 평양성을 공격하니 소서행장 군은 8일에 퇴각하여 17일에 서울로 철수하였고, 일본군은 수세에 몰리게 되었다. 그러나 급진격을 하던 명군은 27일 (경기도 고양) 벽제에서 일본군의 기습을 받고 예봉이 꺾인 뒤로는 다시 후퇴하고 진격을 주저하게 되었다.

임진왜란 초기에 조선군은 적의 기습에 패퇴하였으나 전라도는 왜군이 침입하지 못하였고, 왜군의 침입을 받은 경상·충청·경기도에는 순찰사와 각도 절도사가 지휘하는 관군과 의병이 각지에 있어 왜군과 전투를 계속하고 있었다. 그 수는 약 17만 2천여 명에 달했는데, 관군이 13만, 의병이 2만 7천, 수군이 1만 5천이었다.

그러므로 각처의 전략의 요충지에서는 전투가 계속되고 있었다. (경남) 의령과 (대구) 현풍 등 지역에서 의병장 곽재우가 연전연승하고, 추풍령 지역에서는 정기룡 장군이 활약하고 있었다. 7월에는 (충남 금산) 웅치의 격전이 있었고, (금산) 이치에서는 전라도 도절제사 권율이 승리를 거두었고, 의병장 권응수는 (경북) 영천성을 수복했으며, 금산에서는 의병장 고경명 군대가 완강히 저항하고, 의병장 조헌은 한때 청주성을 수복하였다.

그리고 (경북) 성주에서는 의병장 김면·정인홍이 8월에서 12월까지 전투를 계속하여 끝내 성주성을 탈환하였으며, 경주에서도 경상좌병사 박진의 군대가 2차에 걸친 공격 끝에 비격진천뢰를 사용하여 수복하였다.'

이어지는 문장이 단연 호쾌하다.

'그 중에서도 가장 큰 승리는 진주전(晋州戰)과 행주대첩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도 '조선측이 침략군을 궁지에 몰아넣어 결정적인 전승을 거둔 것은 제1차 진주성 전투와 행주대첩이었다'라고 기술하여 <한국사>와 같은 견해를 보여준다. <한국사>의 해당 부분은 최영희가 썼고, <신편 한국사>의 임진왜란 부분은 장학근이 집필했다.

진주성,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를 이루었던 전쟁 사적이다.
 진주성, 김시민 장군이 이끄는 조선군이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를 이루었던 전쟁 사적이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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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한국사>의 진주대첩에 대한 본격적인 서술을 읽어본다.

'임진년(1592) 10월에 (경남) 김해에 주둔하고 있던 왜군은 전라도와 통하는 교통의 요충지인 진주를 일거에 점령하고자 병력을 동원하여 약 3만 병력으로 공격해 왔다. 목사 김시민과 판관 성수경·곤양군수 이광악 등 수성군(守城軍, 성을 지키는 군사) 8천6백 명은 6일간의 격전 끝에 성을 지키고 적을 격퇴하였으나 김시민은 전사하였다. (중략) 이 진주싸움이 수성전이라기보다도 임란 발발 후의 대승리로 일컬어지는 이유는 일본군이 3만의 군대를 동원하고도 일개 고성(孤城, 외로운 성)을 점령하지 못하여 작전상으로도 큰 타격을 받았기 때문이다.'

<한국사>는, 하나의 작은 성에 불과한 진주성 전투의 승리가 어째서 임진왜란 3대 대첩의 하나로 평가받는지에 대해 간명하게 설명해주고 있다. 3만이나 되는 대군을 동원하여 엿새나 공격하고도 끝내 패전, 퇴각함으로써 일본군의 전쟁 계획이 크게 수정되었기 때문이라는 뜻이다. 일본군은 진주성을 점령한 후 전라도로 진격하려 했는데, 진주성 패전으로 그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임진왜란의 흐름이 바뀐 것이다.

진주성 싸움을 임진왜란 3대 대첩으로 평가하는 까닭

전투의 경과를 조금 더 자세히 알아본다. 임진왜란 3대 대첩 중 하나인 1차 진주성 혈투를 수박 겉핥기로 알아본 뒤 그냥 지나칠 수는 없다. 그것도 김시민 장군이 마지막 순간에 전사하고 만 전투인데…….

왼쪽은 경남 유형문화재 1호인 김시민장군전공비이고, 오른쪽은 2호인 촉석정충단비이다. 촉석정충단비는 2차 진주성 싸움 때 전몰한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 장졸들의 영혼을 기려 세워졌다.
 왼쪽은 경남 유형문화재 1호인 김시민장군전공비이고, 오른쪽은 2호인 촉석정충단비이다. 촉석정충단비는 2차 진주성 싸움 때 전몰한 김천일, 최경회, 황진 등 장졸들의 영혼을 기려 세워졌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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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은 9월 24일 김해에서 출발했다. 경상우병사 유숭인이 창원으로 진격해온 일본군을 막으려고 했으나 2천 군사로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유숭인 군을 가볍게 격파한 일본군은 이내 창원과 (경남) 함안을 점령했다. 결국 유숭인과 그의 군사 2천명은 10월 3일 진주성 앞까지 몰려온 일본군과 싸우다가 전멸했다.

이때 김시민은 유숭인 군이 죽어가는 광경을 보고도 성문을 열지 않았다. 틈을 타고 일본군이 들어올 것을 우려한 때문이었다. 김시민은 여자들에게도 모두 남자옷을 입혀놓을 정도로 철저하게 전투에 대비하고 있었고, 오직 성을 지키는 것 이외에는 그 어떤 것에도 관심이 없었다.

10월 5일, 아군과 적군 사이의 신경전이 벌어졌다. 적의 기병 1천여 명이 동문밖 북봉(北峯) 꼭대기에 올라 성내를 정찰하고는 칼을 휘두르며 이리저리 요란하게 질주했다. 정세도 살필 겸 아군에게 겁을 주려는 시위였다. 김시민은 장졸들에게 '단 한 발의 화살도 낭비해서는 안 된다. 성가퀴를 지키면서 오직 조용히 감시만 하라.' 하고 명령했다. 또 잘 보이는 곳에 깃발을 많이 세워 바람에 나부끼게 하고, 여기저기 장막을 쳤다. 그리고는 남장을 한 여인들까지 동서남북으로 행진을 시켜 군사가 많은 양 위장하였다.

사당 내 김시민 장군 영정
 사당 내 김시민 장군 영정
ⓒ 충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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철저하게 대비한 김시민의 전투 준비

밤이 되자 곽재우의 지원군 200명이 왔다. 심대승이 이끌고 온 홍의장군의 응원군은 향교 뒤편 비봉산 위에 나타났다. 각자 횃불을 다섯 개씩 들고 휘두르면서 호각을 불어대니 밤하늘의 풍경이 바뀌었다. 성 안에서는 모두들 큰 목소리로 호응을 하였다. 왜적들은 대군이 지원 온 것으로 여겨 잠시 기세가 꺾였다.

이튿날인 6일, 적은 3개 부대로 나누어 공격해왔다. 남강과 절벽이 천혜의 요새가 되어 막아주는 성 남쪽을 제외한 동, 서, 북 3면이 왜적들로 가득찼다. 선봉으로 나선 조총수 1천여 명이 탄환을 발사하기 시작했다. 아군은 전혀 대응을 하지 않았다. 적들은 많은 탄환을 소비하게 하고, 아군은 화살을 아끼려는 전략이었다.

적들은 머리를 풀어헤친 채 행군을 하고, 괴기스러운 가면을 쓰고 고함을 질러댔다. 긴 장대를 휘두르고, 호화찬란한 햇살가리개를 펼치고, 휘황한 부채를 흔들어대기도 했다. 심리전이었다.

3면을 에워싼 적들, 드디어 공격 개시

이윽고 적들은 성벽을 타고 올라오려 했다. 길고 넓은 사다리 등 왜적들은 온갖 기구들을 동원해 성벽에 달라붙었다. 아군은 적들의 머리 위에 펄펄 끓는 물을 부었다. 비격진천뢰도 날리고, 화약을 넣은 짚뭉치도 날려보냈다.

불이 적진 가운데 떨어지자, 아군을 공격하기 위해 짚과 마른 솔가지를 잔뜩 가지고 있던 적병들이 오히려 피해를 입었다. 그때 정유경이 이끄는 의병들이 남강 쪽에서 소리를 지르며 올라왔다. 양쪽에서 협공을 당하게 되자 당황한 적들은 일단 물러갔다.

정유경의 경우처럼, 김시민이 지휘하는 성내 관군과 백성들만이 아니라 성 밖에서 도운 의병들의 지원은 진주 대첩을 이루어내는 데 큰 힘이 되었다. <한국사>는 '작은 진주성이 왜 대군을 격퇴하게 된 것은 곽재우·최경회·이달·최강·임계영 등 경상도와 전라도의 의병장들이 성 밖에서 후원하였고 군민일체의 협동 작전이었기 때문'이라고 기술하고 있다.

사당 안에 걸려 있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 존영'으로 정형모 화백의 작품이다. (재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음)
 사당 안에 걸려 있는 '충무공 김시민 장군 존영'으로 정형모 화백의 작품이다. (재촬영한 것이므로 원작과는 상당히 다를 수 있음)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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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전란사>의 이형석도 '이 싸움에서 끝까지 성을 지키고 6배에 달하는 병력을 가진 적이 드디어 공위(攻圍, 공격과 포위)를 단념하고 철퇴(撤退, 철수와 후퇴)를 하게 된 주요 원인에는 크게 두 가지가 있다'면서 첫째는 외원(外援, 바깥의 지원)이 있었다는 점, 둘째는 방어 준비가 치밀했다는 사실을 든다.

바깥에서 의병들 지원, 승리에 큰힘

이형석은 성 밖에서 응원군이 계획적으로 움직이고 있다는 것은 성을 지키는 아군의 사기를 높여줄 뿐만 아니라, 공격을 하는 왜적들의 병력을 분산시키거나 공격 의지를 좌절시키고, 나아가 적에게 직접 타격도 가할 수 있기 때문에 1차 진주성 싸움에서 성을 지켜낸 공로의 상당한 부분을 응원군에게 주어도 마땅하다고 평가한다. 그러면서 '(1593년 6월) 2차 진주성 싸움에서 마침내 성이 함락된 큰 원인은 (성밖에) 응원군이 없었다는 데 있다'라고 분석한다.

그만큼, 성 안은 진주의 관군과 백성들이 지키고, 성 밖은 외지에서 온 지원군들이 감당하기로 한 당시 진주성 싸움 지휘부의 판단은 현명했다. 박성식의 <임진년 제1차 진주성 공방전>은 '(경상우병사 유숭인 군의 진주성 입성을 김시민이 거절한 것도) 성 밖에서 원병으로 하여금 왜적의 주력 부대를 공격하여 그 세력을 약화시킴으로써 성을 지키는 작전에 실효를 거두려고 한 목적에서 취해진 김시민 장군의 결단으로 볼 수 있다'라고 해석한다.

7일에는 아침부터 왜적들의 공격이 어지럽게 시작되었다. 적들은 하루 종일 조총과 화살을 쏘아댔다. 그래도 별 소득이 없자 적들은 진주성 둘레 수십 리의 민가들을 모두 부수고 불태웠다.

전국 방방곡곡 아이들, 제각기 다른 사투리로 항복 권유

적들은 나라 곳곳에서 납치해온 어린 아이들을 내세워 항복을 유도했다. 아이들은 제각각 서울말, 경상도 말, 전라도 말, 충청도 말 등을 쓰며 일본군들이 시키는 대로 "서울은 이미 함락되었고, 8도도 무너졌으니 진주성도 항복하는 것이 좋소." 하고 고함을 질러댔다. 그러나 왜적들이 벌인 이 짓은 오히려 성 안 사람들의 분개심을 드높였을 뿐이다.

밤이 되자 적들은 아군이 미처 못 보는 야음을 틈타 새로운 공격 전술을 시도했다. 적들은 대나무를 얽어서 엮은 편죽, 나무판자를 얽어 만든 산대 등 갖가지 장치들을 동문 수백 보 앞에 세우고는 그 안에 돌과 흙으로 층을 쌓아 언덕을 만들었다. 언덕은 어느새 성벽과 높이가 같아졌고, 8일이 되자 적들은 그 위에 올라 포와 조총을 쏘면서 아군을 공격하려 했다.

하지만 화포라면 아군의 것이 우세했다. 그뿐이 아니었다. 적들이 그런 계책을 쓰리라 예상하고 있던 김시민은 진작에 현자총통을 배치한 채 기다리고 있었다. 천자총통 및 지자총통에 비해 크기가 작지만 성능에서는 결코 뒤지지 않을뿐더러 만들기 쉽고, 또 옮기기도 쉬운 장점 덕분에 화기 중 임진왜란 때 가장 많이 애용된 현자총통은 이날도 빛을 드러냈다. 김시민의 명령이 떨어지자 포수들은 적진을 향해 발포했다. 하늘을 뒤덮은 듯한 굉음과 함께 허공을 꿰뚫은 포탄은 세 번이나 적진에 명중했다.

조선 시대 화기 중 가장 큰 것은 천자총통, 그 다음은 지자총통이었다. 이름은 <천자문>의 '천지현황'의 순서에 따라 붙였다. 당연히, 현자총통은 세 번째로 컸다. 하지만 천자, 지자총통보다 실제 전투에는 더 많이 활용되었다. 크기가 작아 만들기도 쉬웠고, 이동하기도 쉬웠고, 그러면서도 성능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 현자총통 조선 시대 화기 중 가장 큰 것은 천자총통, 그 다음은 지자총통이었다. 이름은 <천자문>의 '천지현황'의 순서에 따라 붙였다. 당연히, 현자총통은 세 번째로 컸다. 하지만 천자, 지자총통보다 실제 전투에는 더 많이 활용되었다. 크기가 작아 만들기도 쉬웠고, 이동하기도 쉬웠고, 그러면서도 성능은 결코 떨어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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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들은 언덕을 포기하고 물러가더니 다시 수천 개의 사다리를 동원하여 성벽을 넘으려 시도했다. 아군은 비격진천뢰(지금의 시한폭탄에 해당)와 질려포(수류탄에 해당)를 쏘고, 큰 돌을 굴려 내리고, 화약에 불을 붙여 적진으로 집어던졌다. 그러면서 아군은 활 쏘는 자세의 허수아비를 성가퀴 위로 들어 올렸다 내렸다를 반복했다. 적들은 허수아비를 아군으로 알고 총을 난사해댔다. 적들의 총탄을 일찍 떨어뜨리려는 계교였다.   

고성 지역 의병장들, 남강 남쪽에 와서 요란한 심리전

캄캄한 밤을 이용하여 의병장 최강의 군사들이 왜적들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는 큰일을 해냈다. 최강은 (경남) 고성에서 달려오는 즉시 남강 너머 망진산에 올라 횃불을 켜 들었다. 진주성 동·서·북쪽을 왜군들이 점거하고 있고, 남강 아래도 적들의 세력권이라는 사실을 감안하면 최강 의병군의 작전은 목숨을 건 행동이었다. 최강 의병군이 각각 횃불을 전후좌우에 매달고 이리저리 움직이며 북을 쳐대자 엄청난 지원군이 도착한 듯한 효과가 일어났다. 적들은 사기를 잃었고, 성 안에서는 환호 소리가 진동했다.

고성에서 주로 활동해온 의병장 이달도 두골평에 닿아 적의 옆구리를 공격했다. 성 안에서 성 밖에서도 아군의 병력은 얼마 안 되는 숫자였지만 그렇게 왜적 대군에 효율적으로 대항하면서 가까스로 성을 지키고 있었다.

그래도 김시민은 악기를 부는 사람들을 성루 위에 올려 한가하게 피리를 불게 했다. 여유만만한 모습을 보여 적들의 사기를 가라앉히는 한편, 승리를 낙관하는 대장의 마음을 보여줌으로써 아군에게는 심리적 힘이 되려는 전술이었다.

사당 내부, 제단 너머로 김시민 장군 영정이 보인다.
 사당 내부, 제단 너머로 김시민 장군 영정이 보인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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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일에도 10일에도 전투는 계속되었다. 10일 새벽 2시경, 적들이 갑자기 불을 환하게 밝히더니 마차에 무기 등을 싣고 퇴각하기 시작했다. 아군의 전투 태세와 마음을 풀어놓으려는 속임수였다. 잠시 뒤, 물러났던 적들은 불을 끈 뒤 살금살금 발길을 되돌렸다.

적들이 물러나기 직전에 순절하는 김시민

적들은 둘로 나뉘어 동쪽과 북쪽으로 몰려들었다. 싸움은 동이 틀 무렵까지 이어졌다. 이윽고 적의 기세가 두드러지게 약해진 그 순간, 김시민이 왼쪽 이마에 탄환을 맞고 쓰러졌다. 대장을 대신하여 이광악이 오전 10시 전후까지 싸움을 지휘했다. 드디어 적진에서 후퇴를 지시하는 불길이 일어나면서 전투가 끝났다.

아군은 너무 지쳐 적들을 추격하지 못했다. 김시민은 총탄에 맞은 중상이 악화되어 불과 며칠 뒤에 세상을 떠났다.

사당 뒤로 묘소가 보인다.
 사당 뒤로 묘소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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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청북도 괴산군 괴산읍 능촌리 57(도로명주소 : 충민사길 46)의 충민사 일원은 너무나 아름다운 경치를 자랑한다. 충민사는 사당으로서는 아주 희귀하게도, 1994년에 다리가 놓이기 이전까지는 배를 타고 괴강을 건너가서 참배했던 모양이다. 지금도 강 양쪽 둑에는 배를 타고 내리는 접안 시설이 남아 있다.

게다가 충민사 일대의 괴강은 푸른 물과 휘굽은 물길, 자동차 소리가 들리지 않는 고요함, 맑은 바람 등등 흔히 떠올리는 자연의 아름다움을 어느 하나 빼놓지 않고 모두 갖추고 있다. 역사유적으로서 충청북도 기념물 12호로 지정된 것이 아니라 그냥 자연 명승으로서 문화재의 반열에 오른 게 아닐까 의심스러울 지경이다.

그냥 경치로만 쳐도 충민사 일대는 문화재로 지정될 듯

김시민 장군의 치열했던 진주성 전투를 이렇듯 평화로운 절경에서 생각해볼 수 있다니! 공연히 어색하고, 까닭 없이 기분이 가뿐하다. 어색한 느낌은 전쟁과 너무나 어울리지 않는 빼어난 경치 때문에 빚어진 것이고, 밝은 마음은 더 이상 구할 수 없는 최고의 휴식처가 장군을 위해 마련되었다는 만족감 덕분이다. 강 건너편의 충민사를 바라보며 문득 참배조차 잊는다.

사공 없이 던져진 빈 배가 충민사로 건너가는 뱃길 앞에 놓여 있다.
 사공 없이 던져진 빈 배가 충민사로 건너가는 뱃길 앞에 놓여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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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을 반쯤 물 위로 걸친 배 한 척이 강가에 멈춰 있다. 아직도 저 배는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구나……. 혹시 뱃사공이 없나 주변을 둘러본다. 그가 나타나면 오늘은 문득 배를 타고 강을 건너는 호사를 누려도 좋으리라. 임진왜란 3대 대첩의 주역 김시민 장군을 만나러 가는 길인데 이 정도 추억 만들기는 감행해도 괜찮으리.

하지만 인기척은 없고, 이윽고 홍살문 아래를 지나 다리 입구로 다가간다. 다리 이름이 충민교가 아니라 충무교인 것을 보며 '김시민 장군의 시호가 충무공이구나!' 깨닫고, 차량 진입을 가로막는 쇠사슬 앞에서는 '잘한 일!' 하는 느낌을 받는다. 이 쇠사슬은 곧 조선 시대의 하마비(下馬碑)이다.

'모두들 걸어서 가라! 천천히 걸으면서 좌우로 흘러가는 예쁜 강물도 바라보고, 자연의 일부가 되어 호젓이 시골 다리를 건너는 뜻밖의 귀거래(歸去來)도 체험하고, 강물처럼 세상을 떠나간 김시민 장군을 추모하는 시간도 가져보라!'

충민사에 가려면 이곳에 차를 세운 후 홍살문 아래를 지나 다리를 건너서 걸어가야 한다. 다리 저 끝에 보이는 집이 관리사무실과 구사당이다. 구사당은 김제갑 원주목사, 그 왼쪽 신사당은 김시민 장군을 제향한다.
 충민사에 가려면 이곳에 차를 세운 후 홍살문 아래를 지나 다리를 건너서 걸어가야 한다. 다리 저 끝에 보이는 집이 관리사무실과 구사당이다. 구사당은 김제갑 원주목사, 그 왼쪽 신사당은 김시민 장군을 제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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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을 건너 충민사 관리사무소 앞에 오니, 미처 몰랐던 사실 한 가지가 마음을 콕 찌른다. 충민사 영역이 김시민(金時敏, 1554~1592) 장군만이 아니라 원주 영원산성 전투의 김제갑(金悌甲, 1525~1592) 원주목사도 함께 제향하는 사당이라는 사실을 안내판에서 알게 된 때문이다.

이 사실은 효충문(效忠門, 외삼문) 안으로 들어서는 순간, 바로 확인이 된다. 효충문과 선무문(宣武門, 내삼문) 사이 뜰의 왼쪽에 신도비가 두 기 서 있다. 왼쪽은 제액(題額, 비의 이름)이 '김충무공 신도비명(金忠武公神道碑銘)'으로 김시민 장군 신도비이다. 1974년에 건립되었는데 비문은 권용직이 지었고, 글씨는 김사달이 썼다. 오른쪽은 제액이 '의재김선생신도비(毅齋金先生神道碑)'로 김제갑 원주목사 신도비이다. 1976년에 건립되었는데 권용직이 지었고, 12대손 김상형이 글씨를 썼다.

충민사는 김시민만이 아니라 김제갑도 제향

임진왜란 당시 김제갑은 이미 68세의 고령이었다. 그는 원주를 지키고 있었지만 군대는 충주 탄금대 전투에 지원병으로 보내버린 뒤라서 거의 없었다. 김제갑은 군민들과 함께 영원산성에서 농성함으로써 적에 대항하려 했지만 결국 그곳에서 전몰했다.

왼쪽이 김제갑 원주목사, 오른쪽이 김시민 장군 신도비이다. 사진 왼쪽에 내삼문, 오른쪽에 외삼문이 일부 보이고, 두 신도비 사이로 이 곳을 현대화한 후 세운 기념비가 보인다.
 왼쪽이 김제갑 원주목사, 오른쪽이 김시민 장군 신도비이다. 사진 왼쪽에 내삼문, 오른쪽에 외삼문이 일부 보이고, 두 신도비 사이로 이 곳을 현대화한 후 세운 기념비가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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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붕 세 종류


팔작지붕 : 사면의 지붕이 우진각지붕 형태이지만 측면의 상부만 맞배지붕 형태로 만들어진, 가장 복합적이고 완비된 지붕이다.

맞배지붕 : 가장 간단한 모양의 지붕으로, 집의 앞뒤 양면으로 지붕을 경사지게 낸다. 측면에는 지붕이 없다.

우진각지붕 : 건물의 사면에 모두 지붕이 있다.

내삼문을 지나 사당 앞에 선다. '충민사' 현판이 나를 내려보고 있다. 사당은 정면 3칸, 옆면 2칸의 팔작지붕 목조 기와집이다. 사당에 참배를 하고 나서 뒤로 돌아 묘소로 간다. 김시민 장군이 계신다. 역시 충민사 앞을 유유히 흘러가는 괴강의 경치는 너무나 아름답다.

'장군이여, 우리가 이 강산을 아직도 아름답고 평화롭게 가꾸지 못했나이다. 조국은 왜적들의 손에 송두리째 넘어가 35년이나 겨레 모두가 그들의 발아래 머리를 조아렸고, 해방이 된 뒤에도 반 토막으로 분단되어 지금껏 회복하지 못했나이다. 면목이 없지만, 그래도 다짐하겠습니다. 머잖아 장군이 염원하시던 무릉도원 삼천리를 반드시 이룩하겠나이다. 두고 보소서.' 

그렇게 속으로 되뇌며 한참 동안 사당의 지붕과, 그 너머로 현란하게 빛나는 경치를 바라본다. 여전히, 강 건너 작은 배에는 사공이 없다.  


태그:#김시민, #김제갑, #충민사, #진주대첩, #영원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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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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