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정치권의 개헌 논의로 주권자는 다시금 공론장에서 소외되는 기분을 느낄지 모릅니다. 하지만 개헌 논의를 그 자체만으로 '더러운 기득권의 권력 나눠먹기'라 할 수는 없습니다. 헌법은 일종의 계약서입니다. 계약서의 내용이 복잡하다고 정치인들이 무엇을 작성하고 있는지 따져두지 않는다면 우리와 우리의 후손들은 큰 손해를 볼 것입니다. 시민들 앞에 진열된 상품들의 질과 판매자들의 진정성을 요리조리 따져봅시다. -글쓴이 말

'불확실하지만 효율적인 민주주의'와 '견제 가능하지만 느린 민주주의'

경복궁 북쪽문인 신무문 너머로 청와대가 보인다.
 경복궁 북쪽문인 신무문 너머로 청와대가 보인다.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지난 연재 세 편에서는 5년 단임 대통령제, 의원 내각제, 이원정부제의 성격과 한계를 살펴봤습니다. 이로써 우리는 현재 정치권에서 진행 중인 개헌 작업의 문제점 5가지를 알게 됐습니다. 이 5가지 문제에 대한 설득력 있는 해법을 내놓지 못 하는 이상 현행 5년 단임제, 내각제, 이원정부제 모두가 주권자에게 매력적인 상품이 될 수 없다는 점도요.

해법을 찾아야 할 5가지 문제들
[문제1] 대중이 언제나 옳고, 좋은 결정만을 내리는 것은 아니다. 18대 대선에서 51.6%의 시민은 박근혜 후보에게 표를 줬다. 우리가 오류를 범했을 때 이를 시정하려면 보통 5년이라는 긴 시간이 걸린다. 시민의 입장에서 이 기간이 적당한지 재고해야 한다.

[문제2] 반면에 국정 운영을 하는 대통령의 입장에서는 5년은 짧다. 그래서 국정 운영의 효과성이 떨어지고 무리수를 두려고 하는 경향이 생긴다는 비판이 있다. 그렇다면 지도자에게 얼마나 충분한 임기가 보장되어야 하는지도 재고해야 한다.

[문제3] 문제는 문제1과 문제2가 상충한다는 것이다. 따라서 두 가지를 조화시킬 수 있는 대안을 찾는 것 역시 또 하나의 문제가 된다.

[문제4] 대통령 중심제와 내각제는 주권자가 국가기구에 정통성을 부여하는 방식에 따라 나뉜다. 대통령제 국가는 대통령과 국회가 각각 직접 선거로 뽑혀 권력을 위임받고 행정과 입법을 담당한다. 반면에 내각제 국가는 국회에서 '간선'으로 뽑힌 수상이(총리) 기존에 대통령이 갖던 행정권 대부분을 가져가면서 권력 집중 현상이 나타난다.

용어만 이원정부제(혼합형 내각제, 분권형 대통령제, 대통령 직선 내각제)일 뿐 사실상 내각제나 대통령제 둘 중 하나에 가깝게(대개는 내각제로) 운영되는 경우도 마찬가지다. 물론 내각제나 이원정부제 국가는 권력이 의회에 집중되므로 입법부터 행정까지 국정 추진이 쉽고 빨라지는 장점이 있으며 실제로 많은 선진국들이 이 제도를 채택하고 있다.

그러나 실권을 쥔 수상을 주권자가 직접 선거로 선출할 수 없게 되며, 국회의원들끼리 수상을 뽑고 다수당 내각을 구성할 경우 엘리트주의가 강화되고 제왕적인 것을 넘어 총통적인 리더십이 출현할 위험성 역시 배제할 수 없다. 또한 한국이 내각제나 이원정부제로 전환한다고 선진국들처럼 건전한 아웃풋을 낼 것이라는 명확한 근거는 없는 반면(효율성은 양날의 검), 주권자는 대통령을 통해 의회를 견제할 힘을 상당 부분 잃게 된다. 요컨대 우리는 '불확실하지만 효율적인 민주주의'와 '견제 가능하지만 느린 민주주의'의 기로에 서 있다.

[문제5] 우리가 둘 중 어떤 길을 선택하든 꼭 감안해야 할 것은 제도의 변화는 물론 중요하지만, 민주주의는 단순한 제도 이상의 무언가라는 것이다. 왜냐하면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뽑히는 것도, 뽑는 것도 결국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이제 유일한 대안은 '사람을 변화시킬 제도'와 '제도를 변화시킬 사람' 사이의 선순환 구조를 만드는 것 아닐까.


그렇다면 우리는 이 문제들을 어떻게 해결할 수 있을까요?

4년 중임 대통령제가 대안입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푸드뱅크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손님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이 푸드뱅크에서 자원봉사를 하며 손님과 악수를 나누고 있다.
ⓒ 미국 백악관 제공

관련사진보기


필자는 위 다섯 가지 문제 대부분을 해결할 수 있는 대안이 '4년 중임 대통령제'라고 생각합니다. 대선을 지금처럼 5년마다 한 번씩 치르는 게 아니라 4년마다 한 번씩 치르되, 대통령의 연임을 1회에 한 해 허용하자는 겁니다. 이 제도를 채택한 대표적인 국가는 미국입니다. 왜 이 제도를 한국 실정에 맞게 수용해야 하는지 이유를 설명드리겠습니다.

첫째, 시민이 오판을 해 잘못된 지도자를 뽑았을 경우 좀 더 빨리 바로잡을 수 있습니다(문제1 해결). 또한 이것은 주권자가 권력을 능동적으로 행사할 기회가 늘어나는 획기적인 의미입니다. 현재 한국 시민은 대통령, 국회의원, 지방자치 단체장 및 의원, 교육감을 직접 선거로 뽑습니다. 따라서 대선, 총선, 지방(교육감) 선거 때마다 엘리트들은 대중의 눈치를 봅니다. 그런데 대선 주기를 4년으로 줄이면 선거 사이클이 더 빠르게 돕니다.

그만큼 주권자는 정치가가 공약을 깨뜨리거나 주권자를 무시하는 행태를 견제할 수 있습니다. 둘째, 대통령의 연임을 허용해 일 잘 하면 기회를 한 번 더 주고 그렇지 못 하면 빨리 내쫓아버릴 수 있습니다(문제2, 3 해결). 이러면 시민의 입장과 대통령의 입장을 절충할 수 있습니다. 4년이면 재평가를 받기에 적기이기 때문입니다.

대통령 임기 1년 차에는 전임 대통령 때 정해진 예산과 사업을 수행할 수밖에 없고, 2년 차에야 민의를 수렴하고 예산을 확보하고 인허가 및 발주 등을 통해 자기 사업을 시작합니다. 3년 차에 첫삽을 뜨고 4년 차가 되어야 사업이 궤도에 오릅니다. 이쯤 되면 주권자가 재평가를 해볼 여지가 생기죠. 이 사람에게 계속 나라를 맡겨도 좋은지 아닌지.

하지만 어쨌든 내각제나 이원정부제가 아닌 대통령 중심제를 유지한다면, 결국 '불확실하지만 효율적인 민주주의'와 '견제 가능하지만 느린 민주주의' 중 후자에 속하는 게 아닐까요. 네 맞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후자를 택해야 하는지 말씀드리겠습니다(문제4, 5).

'주입식 교육'은 우리의 시민성을 황폐화시켜왔습니다

수능을 준비하는 한 고3 수험생.
 수능을 준비하는 한 고3 수험생.
ⓒ 권우성

관련사진보기


만약 한국이 내각제나 이원정부제로 전환해 '실세' 지도자를 직선제가 아닌 국회에서 간선제로 선출한다면, 시민들은 자신들 대신 수상을(총리) 선출할 국회의원들을 처음부터 잘 뽑아야 합니다. 그렇지 않다면 '불확실하지만 효율적인 민주주의'는 실패할 가능성이 높습니다.

의회 엘리트들이 권력을 독식하고 대통령에게 견제도 잘 받지 않으면서, 효율성을 역이용해 나라를 쉽고 빠르게 망칠 수도 있기 때문입니다. 결국 효율성은 그 자체로 옳거나 좋은 게 아닙니다. 물론 내각제나 이원정부제를 택한 나라들은 대부분 선진국들입니다. 하지만 외국의 사례는 어디까지나 참조일 뿐 한국이 외국의 제도를 따라 한다고 선진국이 되리라는 확실한 보장은 없습니다. 그러한 근거 역시 전혀 제시되지 않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고위험-고수익을 무릅쓰며 주권자가 권력을 의회에 몰아주기로 결정한다면, 빨리 선거 제도를 뜯어고쳐야 할 것입니다. 정치학자 아렌트 레이파르트의 <민주주의의 양식>에 따르면, 총선 결과에서 나타나는 불비례성(실제 의석 수로 반영되지 못하는 유권자의 표의 비중)은 한국이 21.97%로 독일의 2.55%에 비해 현격히 높습니다. 그래서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도입해 승자 독식과 민의 누수를 방지하자는 목소리도 나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민주주의가 단순한 제도 이상의 무언가라는 것을 잊어서는 안 됩니다. 대통령이든 국회의원이든 그들은 모두 '사람'입니다. 그들을 뽑는 것도 결국은 '사람'입니다. 사람이 제도를 변화시킬 수 있을까요. '제도를 변화시킬 사람'만으로도 이제는 충분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솔직해져야 합니다. 민주주의는 완벽하지 않습니다. 우리는 오류를 범할 수 있습니다.

가깝게는 18대 대선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가 민주 시민으로서 '나도 틀릴 수 있다'는 생각 하나만 인정한다면 비로소 완벽에 가까워질 수 있습니다. 엘리트들은 제도를 바꿔 자신들에게 권력만 몰아주면 모든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양 오만함에 젖어서는 안 되며, 시민사회는 '주입식 교육'을 통해 우리 자신과 우리의 후손들의 정신이 오랜 세월 황폐화되어 왔다는 점을 인정해야 합니다. 현 위치를 냉혹히 진단하되 미래를 도모합시다.

대학 평준화는 프랑스보다 독일이 더 잘 되어있으며, 프랑스에는 여전히 엘리트 대학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 교육에는 여전히 한국이 배워야할 점들이 존재한다. 프랑스에서 바칼로레아는 통과 의례 정도의 의미를 갖지만 한국 교육이 학생들에게 제공하지 못 하는 비판적 사고능력 신장의 기회를 프랑스가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대학 평준화는 프랑스보다 독일이 더 잘 되어있으며, 프랑스에는 여전히 엘리트 대학들이 존재한다. 그러나 프랑스의 철학 교육에는 여전히 한국이 배워야할 점들이 존재한다. 프랑스에서 바칼로레아는 통과 의례 정도의 의미를 갖지만 한국 교육이 학생들에게 제공하지 못 하는 비판적 사고능력 신장의 기회를 프랑스가 제공하고 있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 하지율

관련사진보기


유권자가 애초에 제대로 된 지도자를 뽑고, 만약 뽑힌 지도자가 민심을 거스르더라도 맹목적인 지지가 아닌 합리적인 비판을 하면 된다는 상식은 원론적으로는 옳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상식에는 정작 '어떻게' 그런 강력한 시민이 존재할 수 있는지에 대한 해답이 결핍되어 있습니다. 저는 그 해답을 '사람을 변화시키는 제도' 즉 교육에서 찾습니다.

이것은 논리적인 귀결입니다. 우리는 청소년 때 학교에서 교양 시민이 되는 법을 체득합니다. 그곳에서 사람과 교류하고, 지식을 접하며, 비판적 사고력을 기릅니다. 학교는 곧 우리의 시민성의 방향을 잡아주는 초창기 사회적 경험입니다. 그러나 한국의 교육이 수십 년간 길을 잘못 들었다면 우리의 시민성에 대해 강한 확신을 가질 수도 없고 가져서도 안 됩니다.

학생들은 한 교실에 모여있으되 입시라는 체제하에 경쟁하는 예정조화(豫定調和. monade. 독일 철학자 라이프니츠의 중심사상인 형이상학적 개념) 되고 파편화된 존재들로서 가능성이 구속되어 왔습니다. 주입식 교육으로 배운 지식들은 졸업 후 삶을 살아가는데 그다지 쓸모가 없으며 국정교과서 제도가 보여주듯 지배 이데올로기를 주입하는 수단으로 전락할 위협에 놓여있습니다. 반면에 프랑스의 고교 졸업 겸 대입 시험인 '바칼로레아'에 대해 들어보셨습니까. 위 그림은 그들의 역대 철학 시험 문항입니다.

우리는 우리의 동료 시민인 청소년들에게 저러한 문제의식들을 주고받을 '제도적인' 기회를 보장하고 있습니까? 그렇지 못 합니다. 개헌을 한다면, 이제 주입식 교육과 입시 위주 교육을 헌법으로 금지시키고 대학을 평준화시켜야 하며 교육 과정에 철학과 작문 교육을 확고히 반영할 방법들을 찾아야 합니다. 하지만 지금 정치권의 개헌 논의는 이러한 근본적인 문제는 결핍된 다분히 정치공학적인 논의에 머물고 있습니다.

주입식 교육은 우리의 동료 시민들에게 가하는 정신적 폭력입니다. 그들의 가능성을 억압하고 사고의 폭을 좁히며 체제에 순응하도록 길들이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우리 스스로에게 이런 폭력을 수십 년 동안 가해왔는데, 권력 구조와 선거 제도만 바꾼다고 우리의 시민성이 반영된 나라가 선진국이 되기란 어려울 것입니다. 이제 우리는 '제도를 바꾸는 사람'과 '사람을 바꾸는 제도'의 선순환 관계를 확립시킬 장기 비전을 상상해야 합니다. 후대에 이르러 이것이 잘 이루어질 때 그때서야 내각제도 논할 수 있는 겁니다.

하지만 아직은 시기 상조입니다. 지금 우리에게는 선거 사이클을 높여 우리가 오판을 해 잘못된 지도자를 뽑았을 때 빠르게 시정하고 그 경험에서 교훈을 얻을 수 있는 권력 구조가 보다 절실합니다. 개헌을 한다면 권력 구조는 미국식 4년 중임 대통령제를, 선거 제도는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교육 제도는 프랑스와 독일식 철학 및 작문 교육을 벤치마킹하되 우리 실정에 맞게 변형·수용하는 방안을 고려해야 합니다.

정치권에 4년 중임 대통령제와 독일식 정당명부제를 주장한 대선주자가 한 명 있습니다. 바로 더불어민주당 문재인 전 대표입니다. 필자는 이 부분만큼은 문 전 대표를 높이 평가합니다. 하지만 그도 아직 교육 제도는 생각 못 한 것 같습니다. 이 의제를 빨리 선점한다면 문 전 대표도 개헌 시장에서 자신만의 차별화된 콘텐츠를 내놓을 수 있지 않을까요.

(연재 끝)


태그:#개헌, #4년 중임제, #대통령, #오바마, #문재인
댓글8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