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망진단서 작성 방법'시민 노릇 하기 힘들다'는 이야기가 나올 수밖에 없다. 이제는 하다하다 사망진단서 작성 방법까지 알아야 하다니…. 고 백남기 농민의 사망원인이 병사인지 외인사인지에 대한 논쟁이 이어지면서 많은 사람들이 '사망진단서 작성 지침'을 공부할 수밖에 없었다.
사망진단서의 '직접사인'에는 심정지나 호흡정지를 쓰면 안 된다는 것 정도까지야 상식으로 알아둘 수도 있다고 치자. 그러나 사망진단서의 '사망의 종류'에는 사인의 맨 아래칸의 사망원인(원사인)에 따라 병사·외인사를 구분해야 한다는 것, 그래서 고 백남기 농민의 경우 외상으로 인한 뇌출혈이 원래 사인이고 따라서 사망의 종류는 '외인사'여야 한다는 것, 이런 내용을 도대체 왜 전 국민들이 공부해야 하는가.
백남기씨의 경우 물대포에 맞아서 사망했다는 것은 그가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동영상이 존재하는 만큼 너무나 명백하다. 제대로 된 사회라면 지금 사회적으로 논의돼야 할 의제는 '물대포 사용 금지' 등 재발방지나 '책임자 처벌'이었을 것이다. 그런데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에서는 '진짜 사망원인'을 밝히기 위해 부검을 하겠다는 정권이 동원한 수천 명의 경찰과 죽여놓고도 모자라 이제는 부검까지 하느냐는 유족들과 시민들이 물리적으로 '대치'를 벌였다.
집도의인 백선하 교수는 사망원인을 '병사'라고 주장했다. 이에 대해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인의협) 소속 의사들은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었고, 필자도 사망원인에 대한 설명을 했다. 씁쓸하고 황당했다. 똑같은 장소에서 11년 전 전용철 농민의 사망원인에 대한 기자회견을 했던 기억 때문이다. 그뿐인가. 부검을 두고 인의협과 시민들이 정권과 싸운 것은 1980년대부터 계속돼 온 일이다.
서울대병원과 대한의사협회의 책임회피
여기까지만 해도 그럴 수 있었다고 치자. 문제는 그 다음이다. 서울대병원이 특별조사위원화를 구성했다고 해서 사망진단서가 수정될 것이라는 기대가 없지 않았다. 그러나 서울대병원은 사망진단서가 작성지침과 '다르다'고 이야기하면서도 '수정할 권한이 없고' 심지어 주치의가 사망진단서를 '진정성'을 가지고 작성했다는 말까지 덧붙였다.
더욱이 발표 장소에는 엉뚱하게 백선하씨가 등장해 온갖 의학적 용어를 늘어놓으며 자신을 합리화했다. 의사협회도 마찬가지였다. 서울대병원과 똑같은 내용을 이야기했다. 지침과 다르다, 적성권한은 담당의사의 권한이다, 진단서는 신중하게 작성해야 한다.
정답과 '다르면' 오답이다. 그리고 틀렸으면 고쳐야 한다. 도대체 이 사망진단서는 틀렸으므로 수정해야 한다는 말이 그렇게도 힘든 것인가? 서울대병원도 윤리위원회가 있고 징계위원회가 있다. 의협도 그렇다. 여러 방법으로 서울대병원은 자신의 직인이 찍힌 사망진단서를 수정할 수 있었다.
그러나 서울의대와 서울대병원은 수정권한이 오직 작성한 의사에게 있다며 이를 고치지 않았다. 의협도 아무런 행동이 없다. 자정능력의 상실이라는 말 이외에는 어떤 말로도 설명되지 않는다. 이후로 국민들은 언론을 통해 그리고 국회 교육문화체육관광위원회와 보건복지위원회 국정감사장에서 서창석 병원장의 오락가락하는 답변과 백선하씨의 궤변을 들어야 했다.
'지병이 있었다' '유족들의 치료중단 요청 때문에 사망했다' '제 소신이다' 등등. 거짓이 거짓을 낳고 백선하의 '의학적 전문용어'들은 오직 진실을 가리기 위한 직업적 은어와 상투어로 전락했다. 인의협 소속 의사들이 매일 서울대병원 장례식장으로 가서 기자들에게 의학적 용어를 설명해야 했고, 사망원인에 대한 의견서를 작성 중이다. 이 정권은 의학적 논쟁의 대상이 전혀 될 수 없는 사건을 의학적 논쟁으로 만드는 데 어느 정도 성공한 듯하다.
도대체 전문가의 자율성이란 무엇인가
가장 황당한 것은 서울대병원이나 서울의대가 틀린 사망진단서를 수정할 수 없다면서 내세운 것이 '진정성'이라고 이름붙인 '전문가 자율성'이라는 점이다. 그런데 이 전문가 또는 지식인의 '자율성'은 굳이 사회학자 부르디외를 거론하지 않더라도, 지식인들이 국가권력으로부터 독립적이라는 것을 전제로 하는 '자율성'이다.
백선하씨의 '사망진단서'는 의사 국가시험에 나올 만큼 엉터리 진단서의 대표적 사례다. 한국의 의과대학들이 그리고 의사들이 정말 자율성을 주장하려면 그 진단서는 의사들의 자율적 자정작용을 통해 수정돼야 한다.
더욱이 이 엉터리 사망진단서야말로 현 정권이 사망원인에 대해 거짓 주장을 하는 근거가 되고 있다. 의사의 사망진단서가 정권의 도구가 된 사건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 진단서를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수정하지 못한다는 것인가? 자율성의 포기를 자율성이라는 이름으로 합리화하는 황당한 작태일 뿐이다. 또 백선하씨는 서울대학교 교수다. 서울대가 서울의대 뒤에 숨는다고 서울대의 체면이 지켜지지 않는다.
황우석 사태 때에는 전 국민이 배아줄기세포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미국산 쇠고기 전면개방 때에는 전 국민이 광우병 프리온에 대해 공부해야 했다. 메르스 유행시기에는 바이러스의 전파양식에 대해 공부해야 했고 병원 이름을 스스로 알아내야 했다.
왜 그랬던가. 왜 아직도 우리는 사망진단서 작성지침까지 공부해야 하나. 한국의 의학, 나아가 과학 분야의 지식인들이 전 국민적 압력을 받지 않으면 자신들의 잘못을 스스로 수정하지 못하고 권력의 도구로 작동하기 때문이다. 시스템 바깥에서 그야말로 전 국민이 개입할 때 전문가들, 지식인들이 권력으로부터 해방돼 과학적 결정이 겨우 내려진다.
이화여자대학교 사태는 어떤가. 이대 정치외교학과 교수인 입학처장이 총장에게 "박정희 전 대통령, 박근혜 대통령, 정윤회·최순실 씨의 관계를 그리며 총장에게 직접 정유라 학생을 설명"했을 때 끝나야 했던 사태였다. 그러나 이대 학생들이 86일간 본부 건물을 점거하고, 학생처장이 그렸다던 그 그림을 전 국민이 그리게 돼서야 겨우 이대 총장이 사퇴했다.
우리 사회에서 정치·사회적으로 중요한 학문적·과학적인 결정들은 너무나 명백한 사안임에도 어김없이 학문이나 대학 내 시스템 안에서 해결되지 않았고, 전국민적이고 사회적 개입없이 해결된 적이 없다고 말할 수 있을 정도다.
그렇다면 사회적 개입이 없었던 그 밖의 수많은 경우에는 어땠을까. 한국의 대학과 학문은 권력의 순종적 도구로서 기능하고 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운 결론이 아닐까. 한국에서의 지식인들이나 대학의 자율성은 민주주의 발전에 따라 확립돼가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그야말로 순진한 착각이라는 것이 곳곳에서 드러나고 있다. 오히려 오늘날 대학은 자본과 권력에 '자율적으로' 봉사하는 곳이 되고 있다는 게 백남기 농민의 사망진단서 논란에서도 드러난다.
오늘 한국사회의 학문과 지식의 자율성과 진리는 고고한 상아탑 속에서 지켜지고 있지 않다. 대학의 자율성은 학생들이 본부를 점거해야만 지켜진다. 우리 사회의 진리는 서울대병원 장례식장 앞에서 노숙했던 시민지킴이들의 고단한 잠자리에서 지켜진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우석균님은 인도주의실천의사협의회 공동대표입니다. 이 글은 월간 <참여사회> 11월호에 실린 글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