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 1일 오후 서울 동숭동 대학로에서는 고 백남기 농민 추모대회가 열렸다. 대회 진행은 호흡이 빨랐다. 대회를 마친 후 고 백남기 농민이 물대포를 맞고 쓰러진 종로1가 르메이에르 종로타워까지 행진이 예정돼 있어서였다. 대회 주최 측은 종로타워에서 고인을 기리는 헌화를 하겠다고 예고했다. 그래서 참여자들에게 헌화할 국화 한 송이를 지참해줄 것을 당부했다.
행진은 평화롭게 진행됐다. 하지만 대열은 종각에서 멈춰서야 했다. 경찰은 먼저 교통의경들을 배치했다. 이러자 행진 참여자들은 격앙하기 시작했다. 분위기가 심상치 않게 돌아가자 기동대가 나서기 시작했다. 경찰의 대오는 잠시 뚫리는 듯했다. 그러나 르메이에르 타워를 불과 300m를 앞에 둔 지점에서 경찰은 다시 한 번 행진 대오를 막았다.
백남기투쟁본부(아래 투쟁본부)는 경찰을 향해 "백남기 농민이 쓰러진 곳으로 가서 헌화하고 돌아갈 수 있도록 길을 열어달라"고 호소했다. 일부 시민들은 저지선 돌파를 시도하면서 충돌 가능성도 우려됐다. 그럼에도 경찰은 한 치도 물러서지 않았다.
경찰의 이런 모습은 이제 익숙하다. 지난 2년 동안 거리에서 벌어진 일들을 하나하나 복기해 보자.
기도회 현장 봉쇄한 경찰 (1) 2014년 8월 25일 천주교정의구현사제단(아래 사제단)은 서울 광화문 광장에서 단식기도회를 열려고 했다. 이때는 '유민 아빠' 김영오씨가 40일 넘게 단식하다 입원했다는 소식이 들려오던 시점이었다. 이에 사제단 사제들과 수녀들은 동조 단식을 결심했고, 기도회는 동조 단식에 앞서 계획된 것이었다.
수녀와 사제들이 속속 모여들자 경찰이 들이닥쳤다. 경찰은 스크럼을 짜고 사제와 수녀들의 이동을 막았다. 수녀, 사제, 그리고 기도회에 참여하려던 성도들은 거세게 항의했다. 수십 분의 실랑이 끝에 경찰은 스크럼을 풀었다. 그러나 이게 끝이 아니었다. 단식기도회는 불미스러운 일 없이 진행됐다. 그러나 경찰은 단식 기도회장을 포위했고, 병력을 더 동원해 아예 광장을 점령하다시피 했다.
(2) 2015년 4월 16일, 이날은 세월호 참사 1주기를 맞는 날이었다. 세월호 유가족과 시민들은 이날 서울광장에서 추모집회를 마친 뒤 광화문 광장으로 이동해 희생자들에게 헌화하려 했다.
그러나 이때도 경찰이 개입했다. 경찰은 광화문으로 통하는 태평로 일대에 경찰버스를 배치해 놓고 사실상 통로를 봉쇄했다. 광화문 광장 앞에도 경찰병력을 배치했다. 경찰의 봉쇄로 시민들은 청계천길을 통해 광화문 광장으로 향하려 했다. 이때 경찰은 우회로마저 봉쇄했고, 항의하는 시민들과 몸싸움을 벌였다. 이날은 세월호 희생자를 가장 애도해야 하는 날이었다. 경찰의 통로 봉쇄는 추모 열기에 찬물을 끼얹은 처사나 다름 없었다.
(3) 2016년 3월21일 개신교 진보교단인 한국기독교장로회(기장)은 서울 대한문 광장에서 '고난당하는 민주주의를 위한 긴급시국기도회'(아래 시국기도회)를 열었다. 시국기도회를 마친 목사와 성도들은 옛 국가인권위에 마련된 기아자동차 비정규직 농성장을 지나 광화문 광장으로 행진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때 갑자기 경찰이 더 이상 행진은 안된다며 대열을 막아섰다. 현장에 나와 있던 정보과 형사는 "집시법(집회와시위에관한법률) 상 참여 인원 300명 이하인 경우 인도로만 행진해야 한다"는 이유를 내세웠다. 그러나 시국기도회 운영위원들은 "경찰이 평화로운 집회와 행진을 약속해놓고 말을 바꿨다"고 반발했다.
경찰의 저지에 아랑곳없이 목사와 성도들은 계속 행진을 시도했다. 이에 맞서 경찰은 스크럼을 짜고 버텼다. 이 와중에 마찰이 불거졌고, 경찰은 이를 빌미로 당시 기장 교단 총회장인 최부옥 목사에게 소환을 통보하기까지 했다. 종단을 막론해 집회 과정에서 불거진 마찰을 빌미로 교단장을 소환한 일은 무척 이례적이었다.
경찰, 정권의 '불통'과 한 짝 이뤄 (4) 2016년 7월27일 '416세월호참사특별대책위원회'(특조위) 이석태 위원장은 단식농성에 들어갔다. 이 위원장은 농성에 앞서 연 기자회견에서 "특조위 문을 닫으라는 정부의 위법하고 부당한 요구를 도저히 수용할 수 없다"는 입장을 밝혔다.
이 위원장이 농성에 들어간 지 얼마 지나지 않아 비가 내렸다. 광장에 있던 활동가들은 이 위원장이 비를 피할 수 있도록 그에게 비닐을 씌우려 했다. 바로 이때 경찰이 들이닥쳐 비닐을 씌우지 못하게 막았다. 이 과정에서 활동가들과 경찰 사이에 실랑이가 오갔다.
다시 1일 고 백남기 농민 추모대회 당시로 되돌아가보자. 행진 참여자들은 격앙된 어조로 "부검 말고 특검 하라", "백남기를 살려내라", "책임자를 처벌하라"는 구호를 외쳤다. 그러나 그 어떤 과격행동은 없었고 무엇보다 질서 유지에 세심한 주의를 기울였다. 그리고 참여자들의 손에는 국화 한 송이, 그리고 공권력을 규탄하는 구호가 적힌 손팻말이 전부였다.
경찰이 행진을 막아서자 한 시민은 기자에게 "헌화하려는 곳이 상징성이 크다. 그래서 경찰도 자존심을 앞세워 물러서지 않는 것 같다"는 말을 건넸다.
이명박-박근혜 정권을 거치면서 경찰이 정권유지의 도구로 전락했다는 비판의 목소리가 날로 높아가고 있다. 일정 수준, 경찰 수뇌부가 도구 역할을 기꺼이 수용한 측면도 있을 것이다. 그래서 경찰은 정권의 '불통'과 한 짝을 이뤘다. 경찰 조직을 이대로 방치했다가는 더 큰 불상사가 벌어질 것 같아 불안하기만 하다.
시민들과 자존심을 걸고 힘겨루기하는 경찰이 아닌, '민중의 지팡이'로서의 경찰을 바라는 건 사치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