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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찾아서
▲ [남자 찾아 산티아고 19] 검을 찾아서
ⓒ 정효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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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을 걷기 시작한 초반의 기억이다. 누군가 뛰어와서 내게 말을 걸었다.

"안녕, 너는 어디에서 왔니?"
"음... 한국인인데?"


자기소개도 없이 다짜고짜 어디에서 왔냐고 묻는 그 때문에 살짝 얼굴을 찌푸리고 대답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는 환호성을 지르며 자신의 친구들에게 뛰어갔다. "것 봐, 내 말이 맞지" 하는 소리가 들렸다. 내가 한국인인지 아닌지 일부러 알아보러 온 것이다. 나는 그들에게 다가가 물었다.

"그래, 너 한국인 처음 보니?"
"아니, 사실은 요 며칠동안 한국인을 많이 봐서, 너도 한국인인지 궁금했어."


그게 그렇게 신기한 일인가 싶다. 하긴 처음 여행을 계획할 때도 스페인 친구한테 메시지가 왔다.

"어디서 왔니?"가 아니라 "너도 한국인이니?"
▲ 가끔씩 던져지는 뜬금없는 질문 "어디서 왔니?"가 아니라 "너도 한국인이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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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 내 친구들한테 네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간다고 했거든. 근데 거기 한국인 되게 많대. 너 그거 알고 있었어?"

몰랐다. 난 그냥 거기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소리만 들었을 뿐. 며칠 후 그는 자신이 조사한 결과를 알려줬다.

"한국 작가가 산티아고 순례길에 대한 책을 썼는데, 그 책이 굉장히 유명해졌대. 그래서 산티아고로 가는 한국 사람이 많아진 거래."

그 친구는 친절히도 저자의 이름까지 조사해왔다. 김효선이라고 했다. 찾아보니 순례길을 8번이나 걸은 대선배님이셨다. 그 후, 순례길을 걸으면서도 "이 길에 한국인이 왜 많은 거냐?"고 물어보는 외국사람들을 자주 만날 수 있었다. 그들에게 '이 길의 한국인'은 꽤 흥미로운 탐구주제인가 보다.

"너 김효선이라는 작가 알어?"
▲ 어느날 스페인 친구가 보내준 메시지 "너 김효선이라는 작가 알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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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제로 산티아고 순례길에 한국인이 많긴 하다. 순례길의 동양인 중 한국인이 절대 다수를 차지하고 나머지는 싱가폴, 대만, 일본 등이다. 물론, 그래봤자 스페인인이나, 독일인, 이탈리아인에 비하면 압도적으로 적은 인원이다. 그럼에도, '한국인 많다'라는 것이 화제가 되는 이유는 단 하나다.

천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 순례길은 '백인들의 길'이었기 때문이다.

8세기, 갈리시아의 한 수도사가 야고보(산티아고)의 유해를 발견하고, 1189년 교황 알렉산더 3세가 산티아고 데 콤포스텔라를 성지로 선포했다. 그 후 많은 기독교인들이 죄를 감해준다는 칙령에 따라 이 길을 걸었다. 잊혀졌던 이 길은 1987년 교황 바오르 2세가 이곳을 방문하고, 또 파울로 코엘료가 소설 <산티아고>를 출간하며 다시 사람들에게 떠오르기 시작했다. 미국 순례객들은 영화 <더 웨이> 이후 급격히 늘었다고 한다. 그렇게 이 길은 점점 종교를 넘어 힐링과 자아성찰의 길로 각광받기 시작했다.

어딜 가나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 피레네 산에서 아일랜드 국기를 흔드는 아이리쉬 순례자 어딜 가나 꼭 이런 사람들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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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길은 백인들의 순례길이었다.
▲ 백인들의 길 천년이 넘는 시간동안 이 길은 백인들의 순례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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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이때까지만 해도 순례길에 백인이 아닌 다른 인종이 나타나는 일은 거의 없었다. 사실 자기자신을 찾는 일 외에는 아무런 생산성도 없는 길을 한 달 동안 걸을 수 있는 경제력을 지닌 민족은 이 지구상에 극히 소수다. 인도나 아이티, 에티오피아 사람들이 이 길을 걸으러 오진 않는다. 그러던 중 새천년에 들어서자 처음으로 군집을 이룬 새로운 인종이 나타났다. 이들이 바로 한국인인 것이다.

그가 한국 라면을 파는 이유

갈리시아 지방의 한 시골마을에서 뜻하지 않게 한국 라면을 만났다. 피터판크(Peter pank)라는 잡화점이었는데, 의아해서 주인인 윌리엄에게 물어봤다.

"이 시골에서 왜 한국음식을 파는 거예요?"

그러자 그는 펜을 가져와서 종이에 적어보였다.

"한국인이 많으니까. 2008년까지만 해도 이 길에 한국인은 거의 없었지. 2009년까지만 해도 18명인가 그랬어. 하지만 2010년을 지나 2014년에는 3800명, 2015년엔 4500명을 넘어섰어. 특히 겨울에 산티아고 순례길을 걷는 건 주로 한국인이야. 얼마나 파워풀한지 몰라."
"혹시 2010년에 한국에 무슨 일이 있었는지 아세요?"
"파울료 코엘료의 <순례자>가 한국에 출간됐지."


돌아와서 자료조사를 해보자, 디테일은 좀 다르긴 했다. 한국순례자협회에 따르면 (http://caminocorea.org)  2005년 14명에 불과했던 한국인 순례자의 수가 공식적으로 2007년에는 이미 일본을 추월해서 449명, 2008년에는 915명, 2012년에는 2493명, 2013년에는 2774명의 한국인이 이 길을 걸었다고 한다. 한국인은 순례길을 걷는 다양한 국적 중 12위를 차지하고 있었다. (1위 스페인, 2위 독일)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과 산이 이어진다
▲ 갈리시아의 풍경 평화롭고 목가적인 풍경과 산이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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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한국라면과 3분요리를 발견했다
▲ 갈리시아에서 발견한 한국 라면 이 작고 조용한 마을에서 한국라면과 3분요리를 발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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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순례자수가 늘어난 것에는 다양한 이유가 있었다. 파울로 코엘료의 <연금술사> <순례자>등이 국내에서 인기를 끌고, 국내에서도 여행작가 김효선, 김남희 등이 관련 에세이를 냈다. 또 산티아고 순례길을 모델로 한 제주올레길이 생기면서 이 길은 더욱 유명해졌다고 한다.

국내에서 산티아고 순례길은 유명해졌지만, 서양인들에게 아직 한국인은 낯선 이민족의 출연이다. '한국의 국교가 카톨릭이냐'고 묻는 이도 있었고 심지어는 '한국에는 순례길을 걸으면 대학입시에 유리하게 해준다는데 정말이냐'고 물어보는 사람도 있었다. 어이없는 질문에 나는 일부러 이렇게 답했다.

"물론이지, 산티아고 순례를 완료하고 나면 정부에서 보조금도 줘. 안 그러면 내가 이 길을 걸을 거 같아?"

그러자 그걸 또 곧이곧대로 믿는다. 아이고, 이 순진한 영혼들... 결국 다시 불러서 한국인들도 너희와 같은 이유로 순례를 한다는 것을 설명해줬다. 물론 난 좀 다른 이유긴 했지만.그리고 좀 골려주고 싶어서 이렇게 말해줬다. 

"너 뉴스에서 중국인 6000명이 니스에 왔던 거 봤지? 머지않아 이 길에도 중국인이 오기 시작할 텐데, 그렇게 되면 순례길에 한국인만 많던 지금이 그리워질 걸? 그들이 오기 시작하면 800km 정도야 인간띠로 가뿐히 이을 수 있다고."

아직 순례길에 중국인은 극소수이긴 하다.
▲ 중국... 그들이 오고 있다 아직 순례길에 중국인은 극소수이긴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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검을 찾아서

순례 30일차, 어느새 10월 하순이다. 날씨는 아침저녁은 춥고, 매일같이 비가 왔다. 갈리시아 지방은 비가 많이 오기로 유명하다. 대서양으로부터 불어오는 편서풍이 처음으로 산과 맞닥뜨리는 지역이기 때문이다.

문제는 내 우비다. 따로 아웃도어용 우비를 사지 않고 집에서 슈퍼 갈 때나 입는 빨간 바탕에 하얀 물방울무늬가 있는 일상용 우비를 가져왔다. 이 우중충한 날씨에 나만 너무 튄다. 튀는 게 문제가 아니라 비가 퍼붓는 산길을 몇 시간 씩 걷는데 이 우비는 제대로 된 기능을 못했다. 애초에 준비단계에서 '비가 오면 안 걸으면 되지'라고 안일하게 생각했던 게 문제였다. 이미 갈리시아는 우기로 접어들어 비가 안 오는 날이 거의 없다.

도로를 벗어나면 이제 저 안개가 가득한 산으로 들어서게 된다
▲ 비와 안개로 가득한 갈리시아 도로를 벗어나면 이제 저 안개가 가득한 산으로 들어서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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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 익은 밤이 지천이었다
▲ 알밤 줍는 재미로 전진 또 전진! 잘 익은 밤이 지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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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가 억수같이 오는 날 라파바(Lafaba) 로 향했다. 그나마 위안이었던 것은 갈리시아에는 밤이 지천이다. 비가 오고 힘든 상황이지만 산길을 걸으며 탱글탱글한 알밤 줍는 재미로 전진했다. 밤에는 다들 모여앉아 밤을 삶아 먹었다.

라파바에서 가파른 경사로를 5km 정도 걸으면 해발 1330m의 오세브레이로(O Cebreiro)가 나온다. 산티아고로 향하는 여정의 마지막 고비다. 산등성이를 따라 구름이 내려오다 흩어지고, 고개를 넘으면 햇볕이 보이다가, 다시 안개 속으로 접어드는 등 변화무쌍한 날씨가 이어졌다. 안개 속을 계속 걷다보니 꿈속인 듯 싶다. 오세브레이로 마을 역시 안개에 휩싸여 있었다. 마을 입구에는 둥근 벽에 초가지붕을 한 고대 켈트인의 건물이 보인다. 사람이 아니라 요정이 살 것 같다.

계속 안개속을 헤매다 어느 순간 마법처럼 안개가 사라진다
▲ 갈리시아 산길 계속 안개속을 헤매다 어느 순간 마법처럼 안개가 사라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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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찬식에 쓸 빵과 포도주과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 오세브레이로의 산타마리아 성당 성찬식에 쓸 빵과 포도주과 실제 예수님의 살과 피로 변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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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마을의 산타마리아 성당에는 신비로운 이야기가 전해온다. 14세기의 어느 폭풍우 치는 날, 산 아래 가난한 농부가 미사에 참석하기 위해 산을 올라왔다고 한다. 신부는 그가 빵과 포도주를 얻기 위해 온다고 생각해 그를 업신여겼다. 하지만 그 순간 성찬식에 쓸 빵은 살로, 포도주는 피로 변했다. 또한 이 기적을 보기 위해 성모상이 머리를 기울였다고 한다. 지금도 이 성당에는 이 살과 피가 유리병에 보관되어있다고 전해진다. 뿐만 아니라 이 마을에는 최후의 만찬에서 쓰였다는 성배가 보관되어 있다는 이야기도 있다. 

여러 신기한 이야기에 더하여 이 곳은 소설 <순례자>에서 파울로 코엘료가 마스터의 검을 찾았던 곳이기도 하다. 소설 <순례자>는 자신이 특별하다고 믿는 한 음반회사의 중역(파울로 코엘료)이 신비주의 의식의 검을 찾으러 떠나는 이야기다. 검을 찾음으로서 더욱 특별한 능력과 비밀을 가질 수 있으리라 믿던 그에게 인도자 페트루스는 전혀 다른 이야기를 했다. 이 길은 소수의 선택된 자가 아니라 모든 이의 것, 평범한 사람들의 것이라는 이야기다.

'선택된 자들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니고 "지금 내가 여기서 무엇을 하고 있는 거지?"라고 묻는 대신 마음속의 열정을 깨워 줄 무언가를 실행하겠다고 결정을 내리는 사람이었고, 천국문의 열쇠는 열정을 쏟아 행하는 그 일 속에 있었다. 그렇게 사랑은 변화를 부르고 인간이 신에게 다가 갈 수 있다는 것이었다.'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중

'비범한 것은 평범한 사람들의 길 위에 존재한다는 것.' 소설 속 이 문장의 의미는 다음날  듣게 되었다. 여행자 모임의 한 친구가 자전거로 순례길을 여행 중이었다. 내가 한 달 동안 걸어 왔던 길을 그는 자전거를 타고 단 열흘 만에 주파했다. 우리는 사모스에서 겨우 교차점을 만들 수 있었다. 그는 자전거를 타고 단기간에 이동하기에 걸어오는 사람들의 표정변화를 파노라마처럼 볼 수 있었다고 한다.

사람들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 자전거를 타고 온 한국인 여행자 사람들 눈빛이 변하는 것을 볼 수 있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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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례길 초반에는 사람들이 진짜 죽을 상을 하고 걸어요. '내가 왜 이 길을 걷고 있지?'라는 표정으로요. 하지만 중간이 넘어가면서부터 사람들 얼굴은 평화로워지기 시작해요. 낙오자가 많은지 인원수도 많이 줄어요. 그리고 목적지를 앞둔 지금은 사람들 표정이...." 
"환희에 넘치나요?"
"아뇨, 독기에 넘쳐요. 눈빛이 형형한 게..."


순례길의 마지막에 다가갈수록 사람들의 표정은 밝아지고 눈빛은 더 강렬해진다고 한다. 그 이야기를 들으며 다시 한번 소설 <순례자>를 떠올렸다. 오세브레이로에서 검의 비밀을 깨닫는 순간 파울로 코엘료는 검을 찾을 수 있었다. 검의 비밀은 바로 검이라는 보상이 아니라 그 '검으로 무엇을 할 것인가'에 대한 동기였다. 그것을 위해 그는 모든 것을 버리고 길을 걷는 '선한 싸움'을 계속 해온 것이다. 검의 비밀을 깨달은 그가 신에게 했던 기도는 다음과 같았다.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이 힘을 지닐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중
▲ “인간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자신이 힘을 지닐 수 있음을 깨닫는 것입니다.” 파울로 코엘료 <순례자>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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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산티아고에 괜찮은 남자가 많다'는 말만 듣고 800km를 걸어버린 한 여자의 이야기입니다.



태그:#산티아고, #카미노, #파울로코엘료, #순례자, #CAMIN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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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송작가, 여행작가. 저서 <당신에게 실크로드>, <남자찾아 산티아고>, 사진집 <다큐멘터리 新 실크로드 Ⅰ,Ⅱ> "달라도 괜찮아요. 서로의 마음만 이해할 수 있다면"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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