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관련사진보기


예진충은 학이 한가롭게 내에서 거닐다가 갑자기 부리로 깊숙이 찌르는 백학량시(白鶴亮翅)로 무영객의 인중과 옥당을 노리고 들어갔다. 이에 무영객도 피하지 않고 견적출검(見賊出劍)으로 베어들어 갔다. 쏴악, 쌔액 허공을 가르는 소리가 울렸다. 몇 번의 동작이 이어졌지만 두 사람의 검이 맞부딪치지 않고 스쳐지나갔다.

예진충은 등뒤가 허전함 느꼈다. 장포의 앞섶이 비갑 사이로 살짝 부풀었다. 등판에 고드름을 댄 것 같은 차가움이 닿았다가 이내 아렸다. 상대의 도에 등이 베인 것이다. 뒤를 보인 건 자신의 의도였다. 하지만 베이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간발의 차로 벗어날 것으로 보았는데 상대의 역습은 예상 보다 뛰어났다. 내가 실수한 거다. 하지만 상대의 역동작에서 예진충은 자신의 생각했던 바를 확신했다.

'음, 저 자는…….'

무영객 역시 오른팔 상두박 부근에 쓰라린 통증을 느꼈다. 상대가 공격해 올 때 순간적으로 희열을 느꼈다. 백학량시는 자신에게도 너무도 익숙한 초식이라 검로를 익히 알고 있다. 분명 상대는 지나치면서 순간적으로나마 등을 보일 것이다. 그 틈을 노리면 상대를 쓰러뜨릴 것이다. 그러던 차에 생각지도 않은 방향에서 오른쪽 가슴으로 검이 꽂혔다. 반사적으로 몸을 틀었지만 결국 어깨에서 상두박까지 검길을 내주고 말았다. 피가 배어 나와 팔꿈치로 흘러내렸다. 자신의 공격만 생각하다 비어 있는 곳을 방어하지 못한 것이다. 

무영객은 생각했다. 저 자와의 대결은 기예(技藝)로 판명날 것이 아니다. 순간 무영객의 머릿속에 생각이 스쳤다. 아니 어쩌면 이곳 수월정에 오면서부터 자신도 의식하기 전에 이미 본능적으로 파악한 것인지도 모른다. 살수의 동물적 감각으로 말이다. 그것은 달빛이었다. 어제까지만 해도 먹장구름이 하늘을 덮고 비를 뿌렸었다. 오후에 갰지만 지금도 간간히 먹구름이 지나가며 달을 가리고 있다. 달이 구름을 가리면 그때 기회가 오리라. 그러면 자신의 위치를 서쪽으로 이동해야 한다.

달을 등지고 있어야 한다. 어둠은 나의 편이다. 달을 쳐다보는 우를 범하진 않을 것이다. 도의 날에 비치는 월광으로 구름의 이동을 파악하면 되니까. 문득 노인의 가르침이 떠올랐다. 고수 사이의 대결에서는 기(氣)의 교란이 일어나게 된다. 아니 상대의 기를 교란시키는 자가 우위에 서게 된다. 물론 대결에선 인간이 어찌할 수 없는 우연이란 요소가 있다. 이것은 하늘이 정하는 일이니 운명으로 받아 들여야 한다. 무영객은 달빛이 가려질 때 승부날 것으로 예상했다. 도에 어리는 구름으로 볼 때 앞으로 일각 반이 지나야 달이 숨을 것이다. 그때까지 위치를 확보하자. 그는 큰 원을 그리며 슬금슬금 이동했다. 

예진충 역시 눈앞의 상대를 기량으로 제압하기는 힘들다고 생각했다. 다른 변수에 의해 승패가 결정 날 것이다. 이럴 때 노인은 뭐라고 했던가.

노인은 말했다. 중원의 무술은 형세를 취하지만 나의 검은 그렇지 않다. 형(形)은 안정된 모양에서 굳고 깊게 다가가고, 세(勢)는 형을 기반으로 넓고 고르게 퍼져나간다. 그리하여 형세를 갖춘 자는 상대에게 자신의 기(技)를 쉽게 구현할 수 있고, 힘(力)으로서 제압할 수 있다. 무릇 중원의 무(武)는 이를 기반으로 하고 있으나 거기에는 큰 허점이 있다. 모든 예(藝)는 기(器)에 따라 그 운용이 달라진다. 음악은 그것을 드러낼 수 있는 악기가 있어야 하고, 그림은 종이가 있어야 표현할 수 있다.

궁극에선 예로 통하는 도가 있을지 몰라도, 그 과정에선 음악의 길이 다르고, 그림의 길이 다른 법이다. 마찬가지로 중원의 무예도 검(劍)의 길과 창(槍)의 길이 다르고, 권(拳)의 길과 장(掌)의 길이 다르다. 각각의 무기는 각자의 효용과 운용에 따라 그 결과가 다르게 나타난다. 그런데도 중원의 법사라는 자들은 오로지 모든 무예를 관통하는 도가 있다고 하여 형세를 중요시 하였다. 그리하여 형을 초식으로 만들어 무기의 자유로움을 막아버리고, 세를 중요시 여겨 과장된 동작으로 힘을 집중시키지 못하고 있다.

나는 오로지 검만 말하노니, 검이야 말로 무기의 시작과 끝이기 때문이다. 나의 검은 형(形)과 세(勢)에 있지 않고 시중(時中)과 감기(感氣)에 있다.

시중에서, 시(時)란 때를 말함이다. 때를 관찰하고, 그 오고감을 알아차리고, 그 없음을 파악하는 것이다. 때는 변화로 말미암으니 변(變)이 화(化)로 나아가는 그 간격에 시(時)가 있느니라. 시의 운용만 잘한다면 제아무리 견고한 초식이라도 그 틈을 파고들 수 있도다. 중(中)이란 균형을 말한다. 정확한 자세를 기반으로 나아가고 머무르고 돌아옴에 흐트러지지 않는 동작을 일컫는다. 중원에서 말하는 형세와 비슷한 개념이라고 할 수 있다.

다음으로 감기(感幾)이다. 감(感)은 느끼는 것이다. 이는 생각 이전의 의식으로 몸이 먼저 반응하는 것이다. 기(幾)는 사물의 미묘한 징조다. 천지는 변함을 근본으로 삼는 데 변하는 것은 동(動)하기 전에 징조를 보인다. 그것은 만물의 미세한 파동이다. 길흉(吉凶)에는 먼저 기미가 보이고 화복(禍福)에도 징조가 있다. 그러니 기미를 알아차리고 먼저 행동함으로써 위태로움이 전혀 없는 자를 고수라 한다. 기미에도 단계가 있으니 변화의 시기를 알아차리는 지기(知幾)가 있고, 이것이 체득되어 저절로 느끼는 경지를 감기(感幾)라고 한다.

사설이 길었구나. 시중과 감기, 둘 중에 경중을 가릴 수는 없지만 굳이 순위를 정한다면, 하수와 동수와의 대결에선 시중, 고수와의 대결에선 감기를 우선한다. 하수와 동수와의 대결에선 형세의 우위를 바탕으로 시중을 견지한다면 패하지 않는다. 상수와의 대결에선 형세를 파하고 변화를 꾀하라. 그 가운데서 기미를 먼저 점해야 그나마 승산이 있다. 그러나 어쩌랴 고수라면 그 기미를 상대가 먼저 득하는 것을. 그러니 고수와의 대결에서 수많은 변수를 만들어 상대의 실수를 유도해야 한다. 고수를 흔드는 방법으론 지(地:지형), 세(勢: 무리를 지은 세력), 심(心: 심리전), 상(像: 주변 상황) 등이 있다.

검을 쥐고 대치하였을 때 상대와 나, 둘 중에 먼저 기를 느끼는 자가 승리한다. 감기를 느끼는 방법은 첫째가 상대의 호흡이요, 둘째가 상대의 눈이요, 셋째가 상대의 보법이요. 넷째가 손이요, 마지막이 상대의 몸통이다. 그러나 대개의 경우 세 번째까지의 흐름에서 결정이 난다. 호흡과 눈과 발의 움직임을 먼저 파악할 수 있다면 대결을 끝난 것이다. 그러나 앞의 세 가지를 읽지 못하고 상대의 몸통과 손까지 파악하려 하면 오히려 집중력이 흐트러져 자신에게 불리하게 된다. 상대와 내가 너무나 팽팽하여 호흡, 눈, 발 이 셋에서 서로 틈을 주지 않고 있을 땐 나머지 둘을 읽으려 하지 말고, 기다려라. 기다리는 자가 이긴다. 다섯 가지를 다 읽고 응수하는 건 하수를 놀리려 하거나 제자를 가르칠 때나 하는 것이다.

기다려라! 먼저 틈을 보이는 자가 지고, 인내하는 자가 승리한다.
예진충은 상대가 들어오기를 기다렸다.

예진충과 무영객의 대결을 지켜보는 사람들은 시간의 흐름을 잊었다. 팽팽한 긴장 속에서 부딪쳤다가 떨어지고 다시 대치하다가 또 부딪치고, 총 세 번의 부딪침과 한 번의 스침이 있었는데 그 사이 시간을 가늠할 수가 없었다. 짧은 탐색였던 것 같기도 하고 긴 대치였던 것 같기도 했다. 어느 누구도 둘의 대결에 끼어들 생각을 못했다. 상대부는 연신 침을 삼키며 손바닥의 땀을 비단옷에 문질렀고, 호위무사들 역시 주먹을 쥐었다 폈다 했다.

정자에서 지켜보고 있던 담곤은 승패가 몰고 올 결과보다도 대결 자체에 몰입했다. 무인인 그가 보기에 평생에 한번 볼까 말까한 대결이 눈앞에서 펼쳐지고 있는 것이다. 관조운과 혁련지도 숨죽이고 대결을 지켜보았다. 고수의 대결은 정중동(靜中動)이란 걸 말로만 들었지 실전에서 보기는 처음이었다. 그리고 송림 속의 두 사람.

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태그:#무위도, #무협소설, #예진충, #무영객, #황인규
댓글4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