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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 <무위도>
 소설 <무위도>
ⓒ 황인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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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조운과 혁련지는 어안이 벙벙했다. 담사숙이 이 시각에 수월정에 있는 것도 의아하거니와 그들에게서 유품을 탈취한 흑의인이 사숙과 같이 있는 건 더더욱 이해가 가지 않았다.

"대체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사숙님. ……저 자는…."

관조운이 담곤을 향해 허리를 굽혀 배례를 하면서도 무영객을 향한 눈길만은 거두지 않았다. 

"자세한 것은 나중에 차근차근 설명하마. 너희는 속히 이곳을 빠져나가거라. 이유는 묻지 말고."

담곤이 관조운을 향해 말했다.

"저희는 기사숙님의 유언을 받잡고자 일부러 이곳까지 왔습니다. 진인의 유품도 유품이지만 둘째 사숙님과의 언약을 저희는 거스를 수 없습니다."

혁련지 역시 배례를 하며 말했다. 

"이곳은 위험한 곳이다. 잠시 후면 너희가 상상도 못할 위인이 이곳에 나타난다. 시간이 그리 많지 않으니 어서 피하거라. 내일 미시(未時)에 낙양 비룡문으로 나를 찾아오너라."

"송구스러우나. 기사숙님께서 당신의 목숨과 맞바꿔 일러주신 유언을 확인하기 전까진 저희는 이곳을 떠날 수 없습니다. 이점 해량하여 주시길 바랍니다. 담사숙님." 

관조운이 정중하게 말했다.

"어허, 너희가 정녕 이 사숙의 뜻을 외면한다면 마음대로 하거라. 하지만 닥쳐올 위험에 대해 스스로 감당할 준비가 되어 있어야 할 것이다."

담곤이 싸늘하게 말했다.

"사숙님께 감히 여쭙겠습니다. 저 분은 저희가 소림에서 애써 구해 온 유품들을 저희 가족을 협박해 탈취한 사람이옵니다. 그런데 어찌 하여 이 자리에 사숙님과 같이 있사온지 제자로썬 이해가 가지 않습니다."

관조운이 눈으로 무영객을 가리켰다가 다시 담곤을 바라보며 말했다. 

"그건 너희가 알 바가 아니다. 지금은 밝힐 때가 아니니 너희가 이 자리를 떠나는 게 최선이라는 것만 거듭 말하마. 고집을 부리면 감당 못할 화가 미칠 수 있다."  

담곤의 말투뿐 아니라 표정까지 점점 차가워졌다.

그때였다.

"아하, 담 대협께서 우리에게 알리지도 않고 다른 손님을 청하셨구먼. 장차 강호의 무성한 뒷말을 어찌 감당하려고 하오. 하하하."

낭자한 웃음소리가 수월정과 주위를 파고들었다. 높은 성대역이면서도 가냘프지 않는 목소리다. 시중에선 쉽게 들을 수 없는 남성도 여성도 아닌 중성의 목소리 즉 황궁에서나 들을 수 있는 내관의 목소리였다. 이어 어두운 숲에서 사람이 나타났다.

앞서 나타난 사람은 보통 체격에 짙은 눈썹이 인상적인 중년인이다. 그는 회색 경장에 검은 비갑을 덧입고 허리엔 검을 차고 있다. 이어 네 사람이 멘 사인(四人) 평교자(平轎子)가 나타났다. 가마 위에는 옥색 비단옷에 관모를 쓴 사람이 앉아 있다. 백옥처럼 하얀 피부에 뚜렷한 눈매와 얇은 입술이 꼬리치듯 살짝 올라가 있다. 중년 같기도 하고 청년 같기도 한 나이를 가늠하지 못할 얼굴이다. 보아하니 목소리 주인공 같았다.

가마를 멘 자들은 회색 경장 차림에 이들 역시 검은 비갑을 덧입었는데 모두 허리에 짧은 검을 차고 있다. 담곤과 관조운이 설전을 벌이는 바람에 이들의 접근을 눈치 채지 못한 면도 있지만, 그렇다한들 가마를 메고 비탈길을 오르면서도 그토록 소리 없이 다가왔다는 건 이들이 단순한 가마꾼이 아닌 무공을 익힌 자들이라고 봐야 할 것이다.  

"상대부 어른께서 납시옵니까?"

담곤이 얼른 포권을 하며 인사를 했다.

상대부 노순광이 부채를 들어 손바닥을 탁 치자 가마를 멘 무사들이 제자리에 서서 가마를 내려놓았다. 노순광은 천천히 자리에서 일어나 공터로 나왔다.

"담대협께선 본관이 묻는 말에 답하지 않았소이다. 대체 이 선남선녀들은 누구요?"

노순광은 관조운과 혁련지를 무시한 채 담곤에게 물었다.

"제가 초대한 손은 아니올시다. 이들 역시 진인의 유품을 쫓다보니 이 자리까지 온 것으로 압니다."

"호오, 그렇다면 담대협이나 우리 모두에게 불청객이구려. 아깝구나. 앞길이 창창한 젊은 남녀가 발걸음을 잘못 놀려 이곳에서 생을 버려야 하다니. 쯧쯧."

노순광이 안하무인으로 말했다.

관조운이 생각하니 담사숙과 상대부라는 환관이 이곳에서 만나기로 한 모양이었다. 이들이 사람들 발길이 없는 야심한 시각에 만나기로 한 것으로 보아 비밀리에 회동하기로 한 것임에 틀림없다. 그런 자리에 자신과 혁련지가 끼어들었으니 비밀을 지키기 위해 제거하겠다는 것 아닌가. 관조운은 돌연 담사숙의 정체가 궁금해졌다. 처음 흑의인과 같이 있을 때부터 아리송하긴 했지만 환관에게 대하는 태도와 좀전 자신과 혁련지에게 자리를 뜰 것을 종용하다 싸늘하게 태도를 바꾼 것 하며 납득할 수 없는 의구심 무럭무럭 솟았다.

상대부 노순광이 네 명의 가마꾼을 돌아보자 그들이 허리에서 검을 뽑았다. 채쟁, 챙, 챙, 발검(拔劍)하는 소리가 마치 편종을 두드리는 소리처럼 맑게 퍼졌다. 관조운과 혁련지도 요운검과 심운검을 뽑았다.

"태감 어른, 이들은 비록 초대받지 않은 손이라 하나 본인의 사질들이옵니다. 우연찮게 이 자리에 있게 되었으나 제가 책임지고 단속할 터이니 부디 살상은 피해주심이 어떠신지요?"

담곤이 관직 태감으로 호칭하며 노순광에게 청하였다. 

"아니 되오, 담대협. 본관이 황궁 밖으로 출타한 것은 물론이거니와 경부(京府) 밖으로 출행한 것을 아무도 알아선 안 되오. 본관의 행차를 눈으로 본 자는 눈을 파내고, 귀로 들은 자는 귀를 메우고, 입으로 떠든 자는 입을 꿰매야 하오. 하물며 대면까지 했으니 더 이상 무얼 따지겠소."  

상대부 노순광이 싸늘하게 말했다. 그의 얼굴에서 살얼음을 떼어내도 낼 것 같은 표정이다.

"그렇다면 저와 대감님 사이의 일부터 마무리 짓는 게 어떻겠습니까?"
"좋아. 나도 피 냄새부터 맡긴 싫으니까."

노순광이 언제 그랬냐는 듯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관조운이 보기에 환관은 표정의 달인이었다. 말하는 내용에 따라 얼굴을 순식간에 천변만화시키는 재주가 있다. 입술 하나 눈짓 한 번에 생사가 오가는 궁중의 암투에서 자연스레 체득된 습관이리라.   

담곤이 무영객에게 바랑을 건네주었다. 무영객은 바랑을 가지고 상대부 쪽으로 갔다. 상대부가 짙은 눈썹의 중년인을 바라보았다. 중년인이 가볍게 읍을 하고 앞으로 나섰다. 예진충은 공터 가운데로 가서 무영객한테 바랑을 건네받고는 상대부에게 바쳤다. 상대부가 바랑을 열어 퉁소와 문병을 꺼내 태허진인의 인장을 확인했다. 

"음……, 틀림없군."

상대부가 바랑을 가마 위에 놓으며 말을 이었다.

"그런데 그림과 부채는 왜 이 안에 없는가?"
"그건 여기 있습니다."

담곤이 대나무통을 품에서 꺼내들고는 계속 말했다.

"두 개를 확인하셨으니 대감께서도 저에게 약조한 것을 보여주셔야 하지 않겠습니까?"
"일단 내가 모두를 확인해봐야겠네."

상대부가 이마를 찌푸리며 말했다.

"그렇게는 아니 되겠습니다. 본시 약조한 바와 다르옵니다. 대감."

담곤도 이마에 내 천자를 그리며 단호하게 말했다.

"허어, 세상물정을 알고 권도의 흐름을 능히 알만한 대협이 왜 이러시나. 일을 어렵게 만들면 피해 보는 건 그쪽이라는 걸 알 만한 사람이. ……쯧쯧."
"태감 어른, 유품을 확인했으면 저한테 돌려줘야하지 않습니까."

담곤이 다소 누그러지며 말했다. 

"담대협, 이 유품을 개인의 사사로운 소유로 해선 안 되네. 본래 강호의 일에 관이 개입하지 않는 게 상례(常例)이긴 하지만 치세에 필요하다면 하시를 막론하고 만기(萬機)를 섭리(攝理)하는 것이 또 조정의 일인지라, 이 기물들은 조정에서 압수하는 걸로 하겠네."

"태, 태감 어른. 약조와 다르지 않습니까. 어르신께서 유품을 확인하고는 저한테 돌려준 다음 나머지 진경의 소재 파악을 저한테 일임하기로 약조하지 않으셨습니까?"

"암, 그렇고말고. 진품이 확인되면 담대협께 돌려줄 뿐만 아니라 황금 이십 관까지 더불어 포상하기로 약조했었지."

"그런데 어찌…… 중천금의 언약을 바꾸십니까?"

"우리 황궁에서는 언약의 조변석개가 다반사라네. 황상의 심기에 따라 어제의 언약이 오늘의 휴지가 되고 오늘의 약조가 내일의 거짓이 되는 게 궁중의 일상사지. 어차피 여기에 있는 모든 사람들은 살아서 돌아갈 수 없는데 약조가 무슨 소용인가. 하하하"

상대부의 웃음소리가 달빛 속에서 울려퍼지자 관조운의 귀에는 마치 귀곡(鬼哭)처럼 들렸다. 

"오……, 대감은 애초부터 약조를 지킬 생각이 없으셨구려."

담곤이 비탄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손에 쥔 대나무통을 다시 품에 넣고는 상대부를 똑바로 쳐다보며 입을 열었다.

"흐흐흐, 말은 바로 합니다. 조정의 신료대신들이 한낱 강호의 기물을 가지고 만기 운운하며 간섭하겠소이까. 진경을 입수하고자 하는 저의는 당신의 사적 욕심으로 무력을 갖추고자 함이 아니오. 노 대부."

담곤의 갑작스런 태도 변화에 상대부의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해지더니 마침내 일갈했다.

"아니? 네 이노오옴….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따위 무엄한 말을 지껄이느냐?"
"아무리 심계(心計)로 조정을 쥐락펴락하고 모사(謀事)로 천하를 엎치락뒤치락하는 그대들이지만, 어제한 말과 오늘한 말이 다르고 자고 일어나 생각이 바뀐다면, 그 권세가 어찌 오래 가겠소. 힘으로 모든 걸 결정하는 우리 강호인도 그렇게 하진 않소이다!"

담곤의 쏟아붓듯 대거리하는 말투에 상대부는 할 말을 잊은 듯 잠시 멍하다가 예진충을 돌아보았다.

"예총관!"

종이라도 벨 것 같은 날선 목청이다. 

예진충이 옙! 하는 대답과 함께 천천히 검을 뽑았다. 스르릉, 검집을 나오며 검이 울음소리를 냈다. 담곤이 무영객을 바라보며 천천히 고개를 끄덕였다. 무영객도 협봉도를 뽑았다. 창, 하는 짧은 소리가 났다. 

두 사람은 공터 한 가운데서 마주 섰다. 예진충은 달빛에 검날을 살폈다. 무영객은 도첨(칼끝)을 손바닥에 대고 살짝 눌렀다. 만월이 은빛 가루를 뿌려대며 두 사람을 환하게 비췄다.

그 시각 수월정을 둘러싼 송림에 두 사람의 인영이 서 있었다. 둘 다 감색 장포를 입고 머리에는 당건을 쓰고 있다.

"신 영반, 이제 진짜로 우리가 나설 때가 됐네."

키 큰 사내가 말했다.

"일단 저 두 사람의 대결을 지켜본 후에 나서는 게 어떻겠습니까. 풍장반님."

작은 키 사내가 말했다.

"설마 예총관이 패하기야 하겠는가."
"모릅죠. 저 흑의인이 예검비화 채욱을 쓰러뜨리고 이 자리에 나타나리라고는 누가 상상이나 했습니까?"
"그러니까 이번에도 설마를 믿지 말라는 것이지?"
"네, 그렇습니다. 길고 짧은 건 대봐야 아는 거죠."
"음, 그나저나 저 상대부라는 작자, 계략을 꾸미는 데는 과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군, 어느 누가 유품을 손에 넣어도 지금 이 자리에서 만나게 돼있으니까 말이야."

"그렇습니다. 채욱이 입수하면 상대부 수중에 직접 떨어지는 것이고, 담곤이 손에 넣어도 상대부와 거래를 하기로 약조돼 있습니다. 다만 서생과 낭자가 불시에 끼어들어 조금 헷갈리긴 했지만 이거야 손등의 가시 정도 아니겠습니까. 빼내면 그만인."
"저런 자가 조정을 좌지우지한다니 정말 소름 끼치는 일일세. 신영반."

"금의위가 위상을 찾기 위해서라도 저 자를 필히 제거해야합니다. 풍장반님."   
"쉬잇, 이제 본격적으로 대결이 시작되려 하네."

풍천의가 손가락을 입술에 대자 신렵도 무영객과 예진충의 대치하고 있는 현장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달빛이 송림 사이로 스며들자 소나무들도 두 사람의 대결을 보기 위해 각자 몸을 비틀기 시작했다. 
첨부파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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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월, 수, 금, 연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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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설가. 『디고』, 『마지막 항해』, 『책사냥』, 『사라진 그림자』(장편소설), 르포 『신발산업의 젊은사자들』 등 출간. 2019년 해양문학상 대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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