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모한의 90세 어머니. 매일 아침 마당에 부처님께 바치는 꽃과 뭇생명들을 위한 먹거리를 내놓고 있다. ⓒ 송성영
네팔 박타푸르에서 이틀째. 이른 아침 씨라파가 양보해준 침대에서 일어나 밖으로 나왔다. 씨라파 아버지 모한이 산책 나갈 준비를 하고 있었고 씨라파는 어께에 숄을 두르고 침대에 앉아 노트를 펼쳐 놓고 뭔가에 몰두하고 있었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잠자리가 불편하지 않으셨어요?"
"씨라파 덕분에 모처럼 잠을 푹 잤어요. 그런데 아침부터 공부해요?"
"숙제를 하고 있어요."
어제 오후 내내 나를 돕겠다고 박타푸르 곳곳을 휘젓고 다녔고 거기다가 자신의 방까지 내주었으니 숙제할 틈이 없었던 것이다. 밀린 숙제에 몰두하고 있는 씨라파에게 방해가 될까봐 더 이상 말을 건네지 않았다. 그런데 씨라파의 엄마가 보이지 않았다. 씨라파의 아버지 모한에게 물었다.
"당신의 아내가 보이지 않네요."
"아침 일찍 명상을 하기 위해 불교사원에 갔습니다."
평소 아내와 함께 산책을 나선다는 그는 나를 기다렸던 것이다. 나는 모한과 함께 산책길을 나섰다. 이른 아침임에도 불구하고 많은 사람들이 아침 산책을 나서고 있었다. 모한은 힌두교 사원 주변에 있는 작은 호수로 나를 안내했다. 아침마다 이 호수를 한 바퀴 돈다는 것이다.
"호수 주변을 도는 것은 어떤 의미가 있습니까?"
"마음을 맑게 합니다."
이 호수는 그에게 물을 가둬 놓은 단순한 호수가 아니었다. 종교에서 물이 지니고 있는 의미가 그러하듯 그가 아침마다 호수 주변을 도는 것은 탁한 마음을 순화시키는 정화의식 같은 것이었다.
내내 나에게 베풀기만 한 모한 가족들
▲ 이른 아침부터 축구공을 차고 있는 박타푸르의 여학생들 ⓒ 송성영
▲ 공원에서 요가나 태극권 같은 부드러운 몸 동작으로 몸을 풀고 있는 박타푸르 사람들 ⓒ 송성영
힌두교 사원에서 공원으로 가는 길목에 기숙사 학교로 보이는 너른 운동장에서 여학생들이 축구공을 차고 있었고 태권도를 하는 모습도 보였다. 개들이 늘어지게 잠들어 있는 학교 근처 공원에서는 사람들이 여기저기 모여 요가를 하거나 태극권처럼 부드러운 동작으로 몸을 풀고 있었다.
모한은 보통 걸어서 한 시간 거리에 있는 불교 사원까지 산책을 나선다는데 나의 다친 무릎 때문에 더 이상 걷지 못하고 공원 주변을 서성거리다가 곧장 집으로 돌아왔다. 씨라파는 여전히 못 다한 숙제에 코를 박고 있다. 나 때문에 어제 숙제를 못한 것 같아 미안하다 말했더니 금방 끝낼 수 있으니 걱정 말라며 환하게 웃는다.
모한은 집에 들어서자마자 토스트와 삶은 계란을 준비한다. 하지만 이게 아침 식사의 전부는 아니었다. 뒤늦게 들어 온 아내와 함께 양고기에 야채를 볶아 내온다. 네팔의 전통 요리인데 나를 위한 특식이라며 모한이 환하게 웃는다.
"모한 당신은 돼지고기를 먹습니까?"
"아내는 먹지 않지만 나는 아주 가끔 먹기도 합니다."
한국 사람들이 즐겨 먹는 돼지고기 두루치기 요리법을 알려줬더니 한번 시도해 보겠다고 한다. 아침 식사를 마치고 등교를 서두르는 씨라파와 함께 아파트 밖으로 나섰다. 씨라파는 아버지의 모터사이클 뒷좌석에 올라탔다. 씨라파가 다니는 외국어고등학교는 모터사이클로 10분도 채 안 돼는 거리에 있다며 잠시 기다리라고 한다.
▲ 네팔 전통 옷을 만드는 모한 아내의 옷가게. 그녀는 내게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 송성영
아파트 앞에 쪼그려 앉아 풀숲을 헤치고 다니는 닭들을 지켜보고 있는데 모한이 금세 돌아왔다. 나는 배낭을 짊어진 채 모한의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앉았다. 그가 모터사이클을 몰고 간 곳은 아내가 네팔의 전통 옷을 직접 만들어가며 운영하는 옷가게였다. 옷가게 셔터 문을 열고 있을 무렵 그의 아내가 왔다. 비록 세 평도 채 안 돼는 소박한 옷가게지만 그녀는 네팔 아이들의 전통 옷을 재단해 패션쇼에 나설 정도로 수준있는 디자이너라고 한다.
"다시 뵐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고마웠습니다."
"아닙니다. 당신을 만날 수 있어 저희 가족이 더 고맙습니다."
내내 내게 베풀어 주고 나는 받기만 했는데 무엇이 고맙단 말인가. 보시할 기회를 주었기 때문에 고맙다는 것일까. 나는 그녀의 고맙다는 말이 당황스러웠다. 그녀에게 다시 한 번 합장을 하면서 재차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모터사이클에 올라탔다.
그가 농사를 짓고 있다는 고향으로 가기 위해 혼잡한 도시를 통과해야 했다. 그는 시커먼 매연을 뿜어대는 낡은 자동차들 사이사이를 아슬아슬하게 잘도 피해 달린다. 숨이 턱턱막히는 도시를 벗어나자 이름을 알 수 없는 작고 아담한 중소도시가 나왔다.
거기서 온갖 먹거리들이 질펀하게 널려 있는 시장을 기웃거렸다. 시골 농막에서 며칠을 보내려면 먹을거리를 준비해야 했다. 모한은 농막에 먹을거리가 충분히 있다며 내가 먹고 싶은 것만 사라고 한다. 하지만 나는 그의 가족에게 신세진 것을 조금이나마 갚음하기 위해 그의 노모에게 선물할 과일을 비롯해 쌀에서부터 채소에 이르기까지 찬거리를 푸짐하게 장만했다.
그리고 한국의 요리,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요리해 주겠노라 정육점을 찾아 헤맸다. 닭이나 양고기를 파는 정육점은 몇 군데 있었지만 돼지고기를 파는 정육점은 쉽게 눈에 띄지 않았다. 힌두교도가 87%를 차지하는 네팔 사람들 역시 인도에서처럼 돼지고기를 즐겨 먹지 않기 때문이었다.
한참을 헤맨 끝에 돼지고기를 파는 정육점을 찾았다. 돼지고기는 킬로그램 단위로 팔고 있었다. 가격은 1킬로그램에 300루피, 우리식으로 말하자면 네팔의 백반 식사비가 보통 200 루피 정도하니 아주 싼 편이다.
▲ 네팔의 전형적인 전통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파나우티 마을 길. 마을 곳곳에 오래된 힌두 사원이 들어서 있다.
ⓒ 송성영
▲ 17세기에 지어졌다는 크리슈나 나라얀 힌두사원(krishna narayan mandir). 사원 앞에 시신을 화장 하는 가트가 있고 그 앞으로 강물이 흐르고 있다. ⓒ 송성영
중소도시를 벗어나자 네팔의 전통가옥들이 즐비한 작고 아담한 파나우티 마을이 나왔다. 모한 말로는 지금은 시골 마을에 불과하지만 파나우티에는 아주 오래 전 왕궁이 있었다고 한다. 나는 오래된 힌두 사원을 만나면서 그의 말뜻을 이해할 수 있었다.
나중에 알게 된 것인데 오래전 네팔과 티벳의 교역로 였던 파나우티는 자체적으로 왕궁을 건설할 정도로 번영을 누렸다고 한다. 13세기에 세워진 인드레슈와르 마하데브 힌두사원 (Indreshwar mahadev mandir)을 중심으로 네팔의 전통적인 가옥들이 들어서 있는 파나우티는 박타푸르와 더불어 네팔의 전통 가옥들이 잘 보존된 마을로 손꼽히고 있다고 한다.
하지만 아쉽게도 모한네 고향마을로 곧장 향하는 바람에 13세기에 지어졌다는 이 오래된 사원을 만날 수 없었다. 다만 그의 고향 길로 접어드는 길목에서 17세기에 지어졌다는 고풍스런 크리슈나 나라얀 사원(krishna narayan mandir)를 만날 수 있었다.
이 사원에는 비슈누의 화신 크리슈나를 모시고 있다. 모한의 말에 따르면 이 사원은 마을 사람들의 종교적인 모임 장소라 한다. 사원 앞에는 계단식 제단인 가트가 있고 그 앞으로 작은 강이 흐르고 있다. 파나우티 마을사람들은 이 강을 인도 바라나시의 갠지스강처럼 성스럽게 여기고 있다는 것이다. 힌두교인들은 이 강물로 몸과 마음을 정화시키고 사원 앞의 가트는 화장터로 사용하고 있다고 한다.
가트에서 장작불에 시신이 타오르는 상상을 하다가 인도 바라나시에서 일주일을 머물며 매일 이른 새벽 찾아갔던 번 가트, 화장터를 떠올렀다. 불과 두 달 전이었는데 까마득히 먼 전생처럼 다가왔다. 내 존재감조차 까마득하게 멀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불과 하루 전까지만 해도 생면부지였던 네팔 사내의 모터사이클 뒤꽁무니에 매달려 나는 지금 어디로 가고 있는가. 나는 누구인가. 장작불 속에서 재만 남기고 흔적없이 사라지는 시신처럼 내 존재감은 저 강물에 쓸려가고 있었다.
그렇게 나는 본래 존재하지 않는 시간을 가늠해 가며 오랜된 힌두사원 앞으로 흐르는 강물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장작더미 위에서 한 줌의 재만 남게 되는 시신을 떠올리며 내 존재감을 강물에 띄워 보내고 있었다. 모한이 내 옷자락을 잡아끌지 않았다면 나는 수백 년의 시간을 간직한 중세 사원 앞에 하염없이 앉아 있었을 것이었다.
▲ 모한의 고향은 중세 도시, 파나우티 마을 앞에 놓여진 이 다리를 건너 비포장 길을 더 달려야 했다. ⓒ 송성영
파나우티 마을 앞에는 강줄기를 가로지르는 작은 다리가 있었다. 모한의 고향을 향해 이 다리를 건넜다. 모한의 모터사이클 뒷자리에 앉아 강다리를 건너며 밑도 끝도 없이 삶과 죽음의 경계선을 달리고 있다는 상상을 했다. 내가 지나쳐온 길이 죽음의 길일까 아니면 앞으로 나아가고 있는 길이 죽음으로 향하는 길일까. 갈피를 잡을 수 없다. 나는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 있었다.
모한의 고향은 파나우티 마을의 강다리를 건너 비포장 길을 10여 분 달려야 했다. 울퉁불퉁한 비포장 길은 배낭을 짊어지고 있는 나에겐 힘든 길이었다. 나는 통통 튀는 길바닥에 튕겨나가지 않으려 안간힘을 써가며 그의 옷자락을 꼭 붙들어야 했다. 이 보잘 것 없는 모습이 나의 존재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90세 된 어머니는 평생 고기를 잡수지 않았습니다"
▲ 농막 앞에 우리가 타고온 모터사이클을 세워놓고 있는 모한. 농막은 작은 복도 사이로 창고와 부엌, 널찍한 방으로 나눠져 있다. ⓒ 송성영
▲ 모한이 어린 시절을 보낸 고향집. 네팔의 전통적인 농가 형태인 이 집에서 팔남매, 열 식구가 생활했다고 한다. ⓒ 송성영
모한네 고향 마을 송콕은 넓직한 논과 밭을 펼쳐 놓고있는 전형적인 네팔 농촌마을이다. 모한네 농막은 모터사이클에서 내려 걸어가야 할 정도로 가파른 언덕위에 자리잡고 있었다. 붉은 벽돌로 지어진 농막은 제법 규모가 있었다. 작은 복도 사이로 창고와 부엌, 널찍한 방으로 나눠져 있다. 농막 옆에는 흙벽돌로 쌓아 올린 이층집이 있는데 네팔의 전통적인 농가인 이 집이 바로 모한이 태어난 본가라고 한다. 한눈에 봐도 규모가 꽤 큰 집이다.
"어머니 한데 돼지고기를 나눠 드리지요."
"내가 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알면 큰일납니다."
"예? 무엇 때문에요. 당신은 돼지고기를 먹을 수 있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나는 육식을 하지만 어머니는 평생 고기를 잡수지 않았습니다."
지극정성으로 부처님을 따르는 불교신자인 어머니는 평생 채식만 해왔다고 한다. 모한 자신도 고기를 먹지 않는 것으로 알고 있기 때문에 고기를 먹는다는 것을 알면 난리가 난다는 것이었다. 우리는 돼지고기를 부엌 한구석에 감춰 놓다 시피하고 시장에서 사온 과일을 한 꾸러미 싸들고 본가 마당으로 들어섰다. 허리가 구부러진 할머니 한 분이 반긴다. 모한의 노모였다.
"나마스테!"
"나마스테."
▲ 평생 육식을 멀리해 온 모한의 어머니. 90세를 넘기셨다고 하지만 모한의 농사일을 참견할 만큼 총기가 있었다. ⓒ 송성영
낯선 이방인의 인사에 "누구여?"라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반기더니 모한을 쳐다본다. 모한이 네팔어로 몇마디 건넨다. 평생 부처님을 모시고 살아오고 있다는 노모가 다시 공손하게 두 손 모아 합장하며 인사를 한다. 노모에게 나를 한국에서 온 수행자라 소개했던 모양이다. 나는 노모의 합장에 너무나 황송해 머리가 땅에 닿도록 허리 굽혀 합장을 했다.
노모는 이 집에서 허리가 구부러지도록 농사일을 해가며 팔남매를 먹이고 입히고 가르쳐 시집장가 다 보냈다고 한다. 팔남매 중에 넷째 아들인 모한은 바로 옆집으로 분가한 셈이다. 모한의 어머니는 우리네 농촌에서처럼 큰 형이 모시고 있다고 한다. 평생 채식을 해오셨다는 노모의 눈빛에는 총기가 서려있다.
"어머니 연세가 어떻게 되십니까?"
"90세를 넘기셨습니다."
"예?!"
90세가 넘었다는 말에 내가 놀란 표정을 보내자 모한이 말했다.
"허리가 좋지않아서 그렇지 아주 건강하십니다. 내가 농사를 지을 때 이런저런 참견을 다 하십니다."
팔남매를 낳고 키운 90세의 노모, 구부러진 허리에 다리 힘이 없어 지팡이 신세를 지고 있지만 평생 부처님을 모셔오며 육식을 멀리해 오셨다고 한다. 모한이 본가 앞산을 손짓으로 가리킨다. 멀리 불교 사원이 자그마하게 들어서 있다. 노모는 매일 아침저녁 저 불교 사원을 바라보며 부처님께 기도를 올린다는 것이다.
우리는 농막으로 돌아와 어머니 몰래 돼지고기 요리를 시작했다. 모한은 밥솥에 쌀을 안치고 채소를 기름에 살짝 볶아 냈고 나는 시장에서 사온 마늘과 농막에 있던 고춧가루 등의 온갖 양념을 넣고 달달 볶았다. 모한의 입맛에 맞추기 위해 평소 넣지 않는 방울토마토에 약간의 카레도 넣었다.
1식 2찬에 불과하지만 나름 푸짐한 밥상이 차려졌다.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내놓고 나는 모한의 눈치를 살폈다. 북인도 코사니에서 인연을 맺은 사람들에게 닭볶음탕을 내놓고 실패한 일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모한이 고기 한 점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하더니 살짝 인상을 찌푸린다.
"소금을 너무 많이 넣었나? 입맛에 맞지 않나봅니다."
"아, 짜지는 않습니다."
"입맛에 맞지 않으면 먹지 않아도 됩니다."
그는 고기 한 점을 더 먹고 나서는 자신이 요리한 채소볶음만 먹었다. 그럼에도 그는 자신을 위해 요리해 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잊지 않는다. 나는 오랜만에 맛보는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땀을 뻘뻘 흘려가며 게걸스럽게 먹었다. 하지만 양이 너무 많아 반쯤 남길 수밖에 없었다.
모한의 포크가 돼지고기 두루치기로 다가왔다. 그가 다시 몇 점을 먹어 보더니 맛이 괜찮다는 표정을 지어 보인다. 모한이 처음 먹었던 돼지고기 몇 점이 비게 덩어리였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분명 나를 위해 먹어 주고 있는 것이다. 그의 속내를 알 수 없었지만 그는 내 요리를 잘도 먹어줬다.
▲ 마당에 놓여진 작은 돌 재단. 모한의 어머니는 여기에 매일 아침 꽃과 먹거리를 내놓는다. 꽃은 부처님에게 올리는 것이고 밥알은 뭇생명들을 위한 것이라고 한다. ⓒ 송성영
다음날 이른 아침. 모한의 노모가 불교 사원이 들어서 있는 앞산을 바라보며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노모가 구부정하게 서 있던 곳에 재단 같은 작고 둥근 돌이 보였다. 가까이 다가가보니 그 둥그런 돌 위에 꽃과 함께 밥알이 굴러다니고 있다.
꽃은 부처님에게 바치는 것이고 밥알은 뭇 생명들을 위한 것이라며 모한이 설명해 준다. 평생 채식을 해오고 있다는 노모는 하찮은 생명들에게 조차 자비를 베풀고 있었던 것이었다. 맛난 식사에 잠자리까지 배려해 준 모한과 그의 아내와 딸 씨라파가 내게 베푼 자비심은 뭇 생명들에게 조차 자비를 베풀고 있는 늙은 어머니로부터 나온 것이었다. 그 자비심은 90세를 넘기도록 건강을 유지해 온 또다른 비결이기도 할 것이었다.
얼굴이 화끈거렸다. 노모는 뭇 짐승에게조차 자비를 베풀고 있는데 나는 어제 밤 모한까지 끌어들여 육식을 즐기지 않았던가. 채식이든 육식이든 먹고 나서 그 기운을 되돌려 놓으면 된다는 교묘한 논리를 앞세워 뭇 생명들을 탐해 왔던 것이다.
그를 위해 자비를 베푼답시고 돼지고기 두루치기를 요리했지만 따지고 보면 나를 위해 고기를 먹어준 그가 내게 자비를 베푼 것이나 다름없었다. 그와 노모는 내게 누군가에게 베푸는 것은 바로 자신에게 베푸는 것이라는 사실을 새삼 일깨워 주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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