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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해 선조어서각의 홍살문과 외삼문이 보이는 풍경.
 김해 선조어서각의 홍살문과 외삼문이 보이는 풍경.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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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조 시대, 임금의 친필을 받는 것은 가문의 영광이었다. 당연히 사람들은 어서를 잘 받들기 위해 별도의 집을 지었고, 그 집에 어서각(御書閣)이라는 이름을 붙였다. 예를 들면, 전라북도 장수군 번암면 노단리 어서각(전북 문화재자료 32호)은 장현경(張顯慶, 1730∼1805)이 영조로부터 받은 친필을 보존하기 위해 1799년(정조 23)에 건립된 문화유산이다.

충청북도 청주시 상당구 가덕면 청룡리 어서각은 신의청(申義淸, 1692~1792)이 받은 정조의 어서를 보관하기 위해 1812년(순조 12)에 세워졌다. 경기도 안성시 원곡면 지문리 어서각은 최규서(崔奎瑞, 1650~1735)에게 내려진 영조의 어필을,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서중리 안동권씨 어서각(安東權氏御書閣)은 권상일(權相一, 1679~1760)이 받은 영조의 친필을 고이 모시고 있다.

임금으로부터 받은 문서 소중하게 보관하는 집, 어서각

그런가 하면, 전라북도 장수군 산서면 오성리 어서각에는 안성(安省, ?~1421)에게 하사된 태조의 친필이, 경상북도 경주시 현곡면 하구리 구산서원(龜山書院) 어서각에는 태종의 어서가 보관되어 있다. 전라북도 익산시 삼기면 현동사(玄洞祠) 어서각에는 성종의, 충청남도 연기군 남면 고정리 어서각에는 고려 말 강순룡(康舜龍, ?∼?)  등에게 내려진 태조, 영조, 정조의 어필이 봉안되어 있다.

경상북도 영천시 금호읍 약남리에도 어서각이 있다. 전삼달(全三達, 1570~1632)이 1599년 무과에 급제하여 창원 별장으로 있을 때 선조가 그의 성실함을 격려하면서 상과 함께 편지를 보내왔다. 또, 황해도 병마절도사로 재임 중에는 인조가 청나라를 칠 계획을 담은 편지를 보내왔다. 이곳 어서각은 1854년에 건립되었다.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로 123-18에 있는 '선조 어서각'의 전경. 왼쪽에 멀리 재실 경충재가 보이고, 근경으로 어서각, 그 앞 어서각 들어가는 경첨문, 다시 그 앞에 권탁 장군 사당 현충사. 가장 멀리 현충사 지붕 너머로 홍살문이 보인다.
 경상남도 김해시 흥동로 123-18에 있는 '선조 어서각'의 전경. 왼쪽에 멀리 재실 경충재가 보이고, 근경으로 어서각, 그 앞 어서각 들어가는 경첨문, 다시 그 앞에 권탁 장군 사당 현충사. 가장 멀리 현충사 지붕 너머로 홍살문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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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김해시 흥동로 123-18에 '선조어서각(宣祖御書閣)'이 있다. 선조어서각은 1836년에 처음 건립되었고, 1989년에 현재 위치로 옮겨 지어졌다. 그런데 경상남도  문화재자료 30호인 이 어서각의 이름에는, 전국 여느 어서각들과 달리, 임금의 시호가 붙어 있다. 그냥 어서각이 아니라 '선조' 어서각이다.

다른 어서각들이 태조어서각, 태종어서각, 영조어서각, 정조어서각 식의 이름을 사용하지 않는 데 반해 이곳 어서각만은 어째서 선조어서각이라는 남다른 당호(堂號, 집이름)을 가지고 있는 것일까? 그것은, 이곳에 보관되어 있던 임금의 친필이 특별한 것이기 때문이다. 다른 어서각들에 봉안되어 있는 임금의 문서는 신하 개인에게 주어진 것이지만, 이곳 선조어서각의 친필은 나라 안 모든 백성들에게 선조가 직접 한글로 써서 배포한 국난 타개용 대국민 시국 편지이다.

김해 선조어서각이 보관했던 아주 특별한 임금 친필

보물 951호, '선조국문유서(宣祖國文諭書)'가 바로 그 주인공이다. 그런데 선조국문유서는 안동권씨판결공파 소유물이지만, 현재는 이곳 선조어서각이 아니라 부산시립박물관에 엄중하게 봉안되어 있다. 1975년에 도난을 당했다가 되찾은 적이 있어 선조어서각보다 훨씬 크고 경비가 삼엄한 부산시립도서관을 새로운 어서각으로 선택한 것이다. 물론 지금 선조어서각에 걸려 있는 선조국문유서는 복사본이다.

어서각
 어서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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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국문유서에 대한 문화재청 누리집의 설명을 읽어본다. 선조국문유서는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 당시 피란하여 의주에 머물고 있던 '선조가 백성들에게 내린 한글로 쓴 교서'이다. 이 무렵은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반감이 누적되어 있던 시기였던 탓에 조선 백성들은 포로가 되면 왜적들에게 협조하는 경우가 많았는데, '선조는 일반대중이 쉽게 알 수 있는 한글로 쓴 교서를 내려 포로가 된 백성을 회유'하여 돌아오게 하려는 목적에서 친필 한글 편지를 써서 1593년 9월 전국에 배포했다.

선조로서는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다. 국토의 절반을 이미 일본군에게 빼앗기기도 했지만, 1592년 6월 28일 김성일이 보내온 장계를 읽고 받은 충격이 너무나 컸다. 김성일은 '왜적은 대부대가 서울로 떠난 뒤에 잔여 왜적이 혹은 1백여 명, 혹은 50∼60명씩 부대를 편성하여 곳곳에 주둔하고 있습니다. 성주성을 점거하고 있는 적은 고작 40∼50명인데도 우리 병사가 감히 그 소굴을 엿보지 못하는 실정입니다. 왜적이 목사나 판관을 자칭하면서 관곡을 나누어 주니 백성들이 모두 복종하고 있습니다.' 하고 한탄했다.

선조국문유서(문화재청 누리집 사진)
 선조국문유서(문화재청 누리집 사진)
ⓒ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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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성일은 또 '수사(원균)가 성으로 들어갈 계획으로 고성현 지경에 배를 대자 왜적 1백여 명이 배반한 백성들을 거느리고 재차 와서 성을 점거하였습니다. 결국 들어가지 못하였습니다.' 하면서 나라를 배신한 백성들이 오히려 왜적의 편에 서서 아군을 공격하는 실상도 알렸다. 뿐만 아니라 김성일은 배반한 백성들이 사방에서 일어나 고성현령을 죽이려고 한 사건까지 보고했다.

김성일은 '왜적은 몇 명 안되고 절반이 배반한 백성들이니 매우 한심합니다(倭奴無幾 半是叛民 極可寒心).' 하고 결론을 내렸다. 김성일의 보고 외에도 임금과 조정에 대한 백성들의 이반(離反)을 알려주는 장계는 쏟아졌다. 결국 선조는 선조국문유서를 써서 나라 안 방방골골에 뿌렸다.

권탁(權卓, 1544∼1593)은 선조국문유서를 품고 '적진에 몰래 들어가 적 수십 명을 죽이고 우리 백성 100여 명을 구해 나왔다.' 선조국문유서에는 '어쩔 수 없이 왜인에게 붙들려 간 백성은 죄를 묻지 않는다는 것과, 왜군을 잡아오거나 왜군의 정보를 알아오는 사람, 또는 포로로 잡힌 우리 백성들을 많이 데리고 나오는 사람에게는 천민, 양민을 가리지 않고 벼슬을 내릴 것을 약속한 내용들이 실려 있다. 임진왜란 당시의 상황을 알아볼 수 있다는 점과 한글로 쓰여진 점에서 국문학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권탁 장군을 기리는 빗돌과, 그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재실 경충재
 권탁 장군을 기리는 빗돌과, 그 오른쪽으로 멀리 보이는 재실 경충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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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탁은 본래 김해읍성을 의무적으로 지켜야 하는 관리가 아니었다. 경북 선산에서 살고 있던 마흔아홉 나이의 권탁은 선조국문유서를 읽고 "임금이 의주까지 몽진을 가는 치욕을 당하고 계시는데, 어찌 신하가 죽지 않고 몸을 산골짜기에 숨기겠는가!" 하며 칼을 잡고 일어섰다.

그 무렵 부산 일원은 왜적들의 점령지였다. 김해 일대도 죽도왜성, 농소왜성 등을 쌓은 채 군대를 주둔시키고 있던 왜장 나베시마 나오시게(鍋島直茂)의 손아귀에 들어 있었다. 그래서 모두들 남쪽 지방의 수령을 맡는 것을 두려워하고 기피했다. 그런데도 권탁은 김해 지역을 지키는 임무를 자청했다. 조정의 사령(使令, 임명장)을 받은 권탁은 혼자 걸어서 김해까지 갔다. 

권탁은 왜적의 진지 인근 수풀에 몸을 숨기고 조선인 포로들이 나타나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새벽이 되자 조선인 수십 명이 땔감을 구하러 나왔다. 권탁이 소리를 낮추어 "나는 김해성을 지키는 장수 권탁이다. 임금께서 너희들이 까닭도 없이 죽임을 당하실까 걱정하시어 내게 구출 명령을 내리셨다. 나를 따라 빨리 돌아가자." 하고 말했다. 백성들은 놀라워 하면서도 "저희들도 왜적의 종이 되기를 기꺼워하는 것은 아닙니다. 가족들이 함께 잡혀 있어 차마 이곳을 떠나지 못할 뿐입니다." 하고 고개를 떨구었다.

선조국문유서 가슴에 품고 백성 구출 작전에 나선 권탁

권탁은 품속에 지니고 온 선조국문유서를 백성들에게 보여주었다. 백성들이 눈물을 흘리면서 가슴을 쳤다. 권탁은 백성들에게 계책을 말해주었다. '김해에 사는 친척들이 곧 일본으로 떠납니다. 그들이 술과 고기를 가져와서 이별 행사를 갖고자 하니 우리 가족들이 마지막 인사를 나누게 선처해 주십시오. 그리고 함께 가셔서 맛난 음식을 드시지요.' 하고 유인하면 왜군들이 따라올 것이라는 설명이었다.

과연 왜군들은 잔칫상에 탐을 내었다. 권탁은 장사 수십 명과 함께 낙동강변 수풀 속에 숨어서 기다리고 있었다. 왜군들이 술을 마시며 노는 것을 지켜보던 권탁은 '이때다!' 싶자 장사들과 함께 달려나가 적을 쳤다. 놀란 왜적들이 반항했지만 술기운에 젖은데다 기습을 받은 터라 이내 전멸되었다. 권탁은 미리 준비해 둔 배에 100여 명 백성들을 무사히 싣고 돌아오는 데는 성공했지만 본인은 심각한 중상을 입은 상태였다. 1593년 11월, 그는 끝내 순절했다.

권탁 장군 사당 현충사. 어서각은 현충사 뒤에 있다.
 권탁 장군 사당 현충사. 어서각은 현충사 뒤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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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어서각 일원의 입구에 홍살문이 서 있다. 홍살문 오른쪽에는 재실 경충재(景忠齋)가  있다. 홍살문과 재실 중간에는 '증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 권공 묘비(廟碑, 사당의 비석)'라는 빗돌이 세워져 있다. 홍살문 아래를 지나면 외삼문에 해당되는 숭의문(崇義門)이 계단 위에서 기다린다.

외삼문 안으로 들어선다. 아니, 흔히 외삼문이라고 하지만 이곳에서는 그렇게 부르는 것이 별로 온당해 보이지 않는다. 외삼문이 되려면 내삼문이 있고, 내삼문 안에 사당이 있어야 하는데, 이곳은 외삼문을 들어서자 마자 사당이 나타나기 때문이다.

선조어서각은 권탁 장군을 기리는 사당 현충사(顯忠祠) 뒤에 있다. 현충사 뒤 경첨문(敬瞻門)을 지나면 선조어서각 경내로 들어선다. 이렇게 구성되어 있으니 숭의문은 사당으로 가는 일반적 외삼문이 아니다. 어서각이 임금의 하사품인 친필을 모셔두는 곳이니 자연스레 사당보다 더 높은 위치에 세워졌고, 외삼문과 내삼문은 권탁 장군 사당의 것이 아니라 어서각의 출입문이 된 것이다.

어서각을 사당보다 더 높은 곳에 짓는 것은 당연한 일

현충사 옆에는 홍살문 오른쪽에서 본 묘비가 하나 더 있다. 본래 이곳에 묘비가 있었는데, 세월이 흘러 빗돌의 빛이 퇴색하고 겉모습도 쇠락해지자 훨씬 크고 생생한 빗돌을 홍살문 옆에 새로 세운 것이다. 다만 낡은 묘비에는 '증 통정대부 장예원 판결사 권공 묘비' 좌우로 작은 글씨들이 새겨져 있다.

全城之功 活民之德 성을 지켜 공을 세웠고 백성을 살려 덕을 쌓았네
許國忠烈 求世難諼 나라에 충열을 바쳤고 세상의 잘못됨을 구하였네

현충사 뒤 경첨문 열린 대문 사이로 어서각이 보이는 풍경
 현충사 뒤 경첨문 열린 대문 사이로 어서각이 보이는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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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충사와 선조어서각을 둘러보고 나오면서 한 가지 소망을 가져본다. 선조국문유서를 크게 확대한 조형물이 홍살문 옆에 건립되었으면...... 75cm×48.8cm 크기의 닥나무 종이 원본은 부산으로 가버렸더라도, 살아있는 역사의 현장인 이곳 선조어서각까지 찾아온 나그네들에게 선조국문유서 조형물을 보여준다면 박물관을 모두들 반가워 하리라. 세 군데에 붉게 찍힌 유서지보(諭書之寶, 임금의 도장)의 선명한 자국은 보는 이들의 마음속에 임진왜란과 같은 전쟁이 낳는 비인간적 참상을 다시 한번 아프게 되새겨 줄 것이다.


태그:#선조어서각, #권탁, #선조국문유서, #임진왜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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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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