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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원도 탄광마을에 위치한 초등학교에서 4학년 친구들과 함께 지내고 있습니다. 아침 시간, 수업 틈틈이 짬을 내어 그림책을 읽고 있습니다. 그림책 같이 읽으며 나온, 아이들의 말과 글을 기록합니다. - 기자말

"여자야? 남자야?"
"까마귀 소년이라잖아. 남자겠지. 못생겼다."

표지부터 심상치 않았다. 검댕이 묻은 노란색 얼굴. 하얀 스카프를 뒤집어쓴 '까마귀 소년'은 아이들 눈에 분명 잘 생긴 사람이 아니었다. 이런 캐릭터가 주인공이라니 내용이 궁금해졌다. 첫 장을 넘겼다. 웬 1학년 남자애가 학교 마룻바닥 밑에 혼자 숨어 있었다. 키 작고 소심한 이 친구의 별명은 '땅꼬마'였다.

땅꼬마는 선생님을 아주 무서워해서 의자에 제대로 앉아 있지 못한다. 선생님이 시선을 자기 쪽으로 옮기면 두려운 마음에 팔로 머리를 감싸고 웅크려 앉는다. 그래서 아무것도 제대로 배우지 못한다. 같은 반 또래들도 두렵기는 마찬가지다. 무리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나와 유령처럼 살고 있는 그는 외톨이다.

땅꼬마는 사팔뜨기 흉내를 내기 시작했다. 보기 싫은 것들을 보지 않기 위해서였다. 칠판에 적힌 수학 문제 '50-27=', 한심과 근심의 기운이 동시에 느껴지는 교사의 눈길, 손가락으로 괴물 표정 만들어 놀리는 어린 악마들. 10살이 채 되지 않은 꼬맹이는 자신을 힘들게 하는 모든 사나운 것들을 왜곡시킨다. 그가 똑바로 바라보는 대상은 책상의 나뭇결, 비 오는 날의 창 밖, 거미, 애벌레, 굼벵이들 뿐이다.

땅꼬마는 타인과 거리를 두고 있다.
 땅꼬마는 타인과 거리를 두고 있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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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 저 더러운 데 들어가 있는 거야?"
"잰 신발도 안 신었어!"
"옷도 계속 하나만 입는데?"

못생긴 남자애가 왕따 당하는 이야기가 계속되자 주민이와 다영이가 끼어들었다. 살면서 따돌림 당하는 존재를 이렇게 집중해서 본 적이 있었던가? 땅꼬마의 못난 점을 우리 반 애들이 자꾸 찾아냈다. 한두 명이 목소리를 높이자, 옆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얌전이들도 덩달아 비판 대열에 합류했다. 땅꼬마는 여기 없었고, 이상한 녀석을 흠잡기는 쉬웠다.

"너희들도 땅꼬마를 미워하는 거니?"

까칠한 눈빛과 목소리들을 뒤로하고, 다음 장으로 넘어갔다. 주변에서 바보, 멍청이라고 하든 말든 땅꼬마는 날마다 타박타박 걸어서 학교에 갔다. 비가 오고, 태풍이 부는 날에도 도롱이를 두른 땅꼬마는 결석하지 않았다. 그렇게 세월이 흘러 코흘리개 1학년은, 6학년 졸업반이 되었다.

새로운 담임은 이소베 선생님. 이 분이 조금 특이하다. 항상 웃음이 가득한 그는 틈만 나면 아이들을 데리고 뒷산에 오른다. 배움의 무대는 교실에서 자연으로 옮겨간다. 벌레 한 마리 잘 들어오지 않는 교실에서 새하얀 피부를 유지하며 공부하던 학생들은 야외 수업이 기대되면서도 낯설다. 그런데 단 한 명, 땅꼬마만 제 집에 온 듯 신났다.

땅꼬마는 어디에 머루가 열리고, 돼지감자가 자라는지 꿰고 있다. 꽃밭을 만들 때도 꽃이란 꽃은 죄다 알고 있었다. 친구가 없는 땅꼬마에게 산과 밭, 풀, 꽃, 곤충, 동물이 유일한 위안이었으리라. 이소베 선생님은 이런 땅꼬마를 아껴 그림을 벽에 붙여주고, 삐뚤빼뚤 붓글씨를 전시해준다. 책상 서랍에서 구겨질 운명의 종이들이 벽에 걸리고, 선생님 관심을 받자 땅꼬마의 자존감도 서서히 차오른다. 마침내 학예회 무대에까지 오른 땅꼬마. 발표 주제는 '까마귀 소리 흉내내기'이다.

누구나 장기는 있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누구나 장기는 있다. 아주 사소한 것일지라도.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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갓 깨나온 새끼 까마귀 소리, 엄마 까마귀 소리, 아빠 까마귀 소리, 이른 아침에 울음소리, 마을 사람들에게 좋지 않은 일이 생겼을 때 우는 소리... 여기까지 읽는데 정호가 혼잣말을 했다.

"어떻게 저걸 다 따라 하지? 천잰가?"
"정호는 까마귀 소리 낼 줄 아니?"
"까아아까꾸악~"
"아니야. 이거야. 꽈악꽈까까아아."

난데없이 까마귀 타령이 시작되었다. 너도나도 까마귀 소리를 내겠다고 아우성이었다. 하도 의지가 강하여 잠시 책을 엎어두고, 손든 아이들 소리를 들어보았다. 나연이가 목청을 가다듬더니 길게 울음을 토했다. 청소년 장학센터 옆 전봇대 전깃줄에 앉은 까마귀가 오후 4시에 내는 소리란다. 그랬더니 주민이가 질세라 리드미컬한 울음을 선보였다. 보도블록 위에서 애벌레를 잡아먹고 만족한 소리라 했다.

동네에서 까마귀와 마주친 학생들은 저마다 그 기억을 떠올려 울음소리를 흉내 내었다. 입술을 오물거리며 진지하게 임하는 그 모습을 보고 있으니 참으로 귀여워 콧구멍 주위가 간질거렸다. 차마 티는 내지 못하고 들어주고 있었더니 울음소리를 따라 하지 못하는 아이들이 까마귀의 생활 습성에 대한 설명을 했다. 반짝이는 것을 좋아한다느니, 일본에서는 길조를 뜻한다라느니 자기가 알고 있는 지식을 총동원하였다.

'눈 맞추고 들어주기만 해도, 이리 기뻐하는구나.'

꽤 진행이 지체되었기에, 더 말하겠다는 아이들을 진정시키고 다시 그림책을 집어 들었다. 까마귀 울음소리를 멋지게 발표한 땅꼬마는 청중들을 감동시키고 당당해진다. 사람들도 더 이상 땅꼬마라 부르지 않고 까마동이라는 새로운 이름을 붙여준다. 까마귀 소년도 그 별칭이 싫지 않은지 씨익 웃는다. 또 졸업식 날, 땅꼬마는 반에서 유일하게 6년 개근상을 받는다.

우리 반 아이들 솜씨. 서툴고 거칠어도 일단 걸어둔다.
 우리 반 아이들 솜씨. 서툴고 거칠어도 일단 걸어둔다.
ⓒ 이준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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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른처럼 어깨를 펴고 걷는 까마동이는 눈빛에서 단단함과 씩씩함이 느껴졌다. 키도 훌쩍 커 보였다. 아이들은 땅꼬마의 극적인 변화에 놀라워했다. 갑자기 달라진 것 같다고, 머리를 깎은 것 같다고도 했다.

모두가 까마귀 소년을 칭찬할 때 나는 이소베 선생님이 진실로 존경스러웠다. 자녀를 키우는 학부모나, 고학년을 지도하는 선생님들은 알 것이다. 오랫동안 외롭고 위축되어 있던 13세 남학생을, 단기간에 자아존중감 충만한 청소년으로 탈바꿈시키는 일이 마법에 가깝다는 사실을.

기적 같은 마음 쏟기의 힘

이소베 선생님이 땅꼬마와 함께한 시간은 고작 1년이다. 전교 왕따에 괴짜인 아이를 지지해주고, 인정해주는 조치만으로 땅꼬마는 새 사람이 된다. 땅꼬마의 하루 일과는 변하지 않았고, 능력 또한 갑자기 생겨나지 않았다. 다만 열정적이고 따뜻한 담임으로 인해 원래 가지고 있던 장점을 발휘할 수 있었다.

우리는 외부에서 확인받기 전까지, 스스로가 지닌 가치들을 평가절하하는 경향이 있다. 모든 사람은 가치 있고 소중하다는 뻔한 이야기를 하지 않더라도, 자존심과 자긍심은 개인의 인생에서 매우 중요한 감정이다. 안타까운 건 일상에서 나의 귀함을 자각하게 되는 기회가 흔하지 않다는 점이다.

인간은 제 눈으로 자기 뒷모습을 못 본다. 의식하지 않으면 팔꿈치나, 종아리, 쇄골을 살펴보지 않는다. 그런데 다른 이들은 비교적 쉽게 볼 수 있다. 우리의 매력도 눈에 잘 띄지 않는 곳에 있으면, 지나치게 된다. 당신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살펴봐주고, 감탄해주는 사람이 있다면 금세 행복을 느끼게 되지 않을까?

우리는 모두 까마귀 소년이자 이소베 선생님이다. 누구나 찬찬히 뜯어보면, 사랑받을 구석이 무척 많다. 혼자서는 다 알지 못하고, 들여다볼 수 없다. 그러니까 이소베 선생님처럼 내 곁에 있는 사람들부터 아끼고 지켜봐주자. <까마귀 소년>을 읽고 이소베 선생님을 생각하게 되듯, 사랑을 주는 자는 이미 사랑받는 자이다.



까마귀 소년

야시마 타로 글.그림, 윤구병 옮김, 비룡소(1996)


태그:#그림책, #까마귀소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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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구를 구하는 가계부, 산지니 2021>, <선생님의 보글보글, 미래의창 2024> 를 썼습니다.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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