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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참여연대를 비롯한 90개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5월 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한국본사 앞에서 '옥시 불매 2차 집중행동 보고대회'를 마친 뒤 가습기 살균제 책임자 처벌과 옥시 예방법 제정을 촉구하며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가습기살균제피해자와가족모임과 참여연대를 비롯한 90개 시민사회단체가 지난 5월 31일 오후 서울 여의도 옥시레킷벤키저 한국본사 앞에서 '옥시 불매 2차 집중행동 보고대회'를 마친 뒤 가습기 살균제 책임자 처벌과 옥시 예방법 제정을 촉구하며 거리행진을 벌이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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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습기 살균제가 '소리 없는 살인자'라는 오명을 얻게 된 것은 장시간에 걸쳐 조금씩 생명을 위협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한 피해를 '안방의 세월호'라고 빗댄 것도 기업의 무리한 이윤추구, 정부의 무능과 무책임 때문일 것이다.

세계보건기구(WHO)는 야간노동을 2급 발암물질로 규정했다지만, 대한민국의 고교생은 '경쟁'의 심리적 압박까지 더해진 상태에서 '야자'(야간자율학습)라고 하는 야간(학습)노동을 하고 있다. 이 역시 장시간에 걸쳐 학생들의 건강뿐 아니라 의식 성장에 매우 나쁜 영향을 끼치고 있다.

필자가 근무하는 인천지역 고교의 경우, '학습선택권조례' 덕분으로 강제로 야자나 보충수업을 하는 분위기가 많이 완화되었다. 하지만, 자발적 복종이라고 해야 할까. 강제로 '야자'나 '보충'을 하지 않는다는 현실이, 학벌사회를 기반으로 하는 입시경쟁교육의 본질까지 없앴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고교생들은 스스로가 원해서(!) 밤늦게까지, 새벽까지 학습에 시달리고 있다. '명문대'의 학벌을 취득하는 것이 인생의 행복을 보장해줄 것이라는 기성세대의 주입 속에서 아이들은 미래에 대한 불안감을 깊이 내재한 채 학교에 다닌다.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국가 중 압도적 1위인 최장시간의 학습량, 그러나 학생들의 행복도는 정반대로 최하위인 이 모순된 교육 현실에 대해 더 이상 아무도 문제제기를 하려 하지 않는다면, 이는 마치 가습기 살균제의 폐해가 지금 당장 눈에 보이지는 않는다고 해서 가만히 있으려 하는 것과 다를 바가 없을 것이다.

'신체적 성장, 지적 성장, 정서적 발달, 사회성의 발달 등을 조화롭게 하여 넓은 교양과 건전한 인격을 갖춘 인간을 육성한다'는 전인교육의 측면에서 보면, 모든 학생들이 하루종일 공부에 몰입하는 것이 바람직한 것만은 아니다. (물론, 예외적인 경우도 있다. 소수의 아이들 중에는 공부가 하나의 '여가'처럼 느껴지는 학생도 있다. 그러한 '천재적 연구자'도 우리 사회에 꼭 필요하기도 하다. 하지만, 그러한 경우가 대다수 학생에게 적용될 수는 없을 것임에도 불구하고 대다수 학생들에게 요구된다는 점이 안타깝다는 것이다.) 학생들로 하여금 하루 24시간을, 8시간의 수면과 8시간의 노동(배움), 그리고 8시간의 여가를 적절하게 활용할 줄 알게 하는 것도 교육이다. 아이가 '라면'을 좋아한다고 해서 몇 날 며칠을 라면만 먹도록 놔두는 것이 올바른 급식교육은 아닌 것처럼, 이제는 아이들이 초등학생부터 대학교까지 공부에만 몰입하는 모습에 대해 제동을 걸기도 해야 한다.

그 작은 실천이 고교의 '야자 폐지'다. 건강과 정신에 악영향을 끼친다는 비판적 측면뿐만 아니라 현실적인 측면에서도 현재와 같은 과도한 야간학습이 입시에 그다지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것을 다수의 교사들은 알고 있다. 최근 입시는 이른바 '학생부종합전형'을 강조하고 있는 추세다. 이 전형은 동아리 활동 등 다양한 학창 시절의 활동을 중요시한다. 또 '높은' 서열의 대학에 입학했다고 해서 안정적이고 행복한 생활이 보장되는 것은 아니라는 인식도 점점 확대되고 있다.

하지만, 현실이 그렇게 녹록지만은 않다. '야자'만을 당장 폐지하는 것이 모든 문제를 해결해 주는 것은 아니다. 좋은 취지로 도입되었던 이른바 '학생부종합전형'도 사실상 자사고, 특목고 학생들에게 더 유리하다는 인식이 팽배한데, 이러한 문제에 대한 총체적 해결 없이는 '야자 폐지'는 오히려 기존 체제에서는 자사고, 특목고, 일반고 간 학력격차만 더 늘릴 뿐이다. (그렇다고 현재의 입시경쟁교육에 그대로 순응한다거나, 학력격차를 줄이기 위해 야자를 온존케 하는 것 또한 더 큰 문제임은 두 말할 것도 없지만 말이다.) 단지 '야자 폐지'가 모든 입시경쟁교육을 해결해줄 것이라고 생각한다면 그것은 단단한 오산이라는 것이다. '야자'는 입시경쟁교육의 현상이지, 본질은 아니다.

따라서 '야자 폐지'에 대해 학부모, 학생, 교사의 공감과 단위학교 차원에서의 실행이 가능하려면 적정한 최저임금의 보장, 직업별 근무조건 개선 등 관련한 사회적 인프라 구축이 전제되어야 한다. 만약, 어떤 직업에 종사하든 하루 8시간 정도의 일과를 성실하게 수행하는 사람에게 기본적인 삶을 영위할 최소한의 재화를 보장해준다고 해보자. 부모 등 기성세대들도 이렇게 자기의 아이들이 피말리는 생존 경쟁의 전초전이라고 할 입시교육에 내몰리도록 하지는 않을 것이다.

이를 위해, 전 사회적으로 학벌 체제 타파 정책을 실현하기 위한 노력이 매우 필요하다. 이미 대학평준화 정책이나 서울대 학부 폐지 및 대학원대학화, 수능 자격고사화, 입사원서 학력란 폐지, 공직자 지역할당제 등에 대해 많은 연구자들이 대안을 제시하기도 하였다. 사회적 합의만 있다면 그렇게 비용이 많이 드는 개혁과제도 아니다. 실현 가능한 충분한 토대는 마련되었다. 핵심은 정책적 뒷받침과 사회적 인식의 전환이다.

20대 국회가 개원했다. 교육 문제가 사회 시스템과 긴밀하게 연동되어 있는 만큼, 차제에 국회가 정부부처, 시도교육감, 대학 교육 관계자, 교원단체, 시민사회단체, 노동계, 기업 등과 힘을 합쳐 학벌로 인한 차별을 금지하도록 하는 법 또는 기초 생활이 가능한 합리적 액수의 최저임금제, 대학평준화 관련 법 등을 만들어 낸다면, 한국 사회가 그동안 해결하지 못했던 입시 경쟁 교육에 대한 거대한 사회적 전환의 계기를 제도적으로 마련할 수도 있다.

이렇게 되면 학교에서 아이들이 밤늦게까지 남아서 '2급 발암물질'인 야간(학습)노동에 매일같이 시달리는 대신에 도서관을 이용한다든지 지역사회 주최의 프로그램에 참여한다든지 가족들과 포근한 저녁식사를 한다든지 하는 각종 다양한 문화체험활동이나 여가활동을 수행할 수 있을 것이다.

불과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치열한 토론거리였던 '체벌'문제를 생각해 보라. 그로부터 몇 년 지나지도 않은 지금은, 옳고 그름의 문제, 필요성의 문제 등을 모두 떠나 '체벌' 자체가 학교현장에서는 있을 수 없는 일이 되어 버렸다. '야자'도 마찬가지다. '헬조선'의 사회에서도 많은 사람들 내면에 소박한 삶의 행복을 가슴 깊은 곳에서 갈망하는 그 마음이 시대적 요구로 나타나게 되어있다. '시대 정신'이란 그런 것이다. 교육감이든, 국회의원이든, 교육행정가이든 간에 그 시대적 흐름의 순리를 바탕으로 입시경쟁교육 및 학벌사회 타파 의제를 정책화하여 실천한다면, '대통령이 되어서도 못 고친다는 한국 교육'을 고쳤다는 점에서 아마 매우 높은 평가를 받게 될 것이다.

30여 년 전, '행복은 성적순이 아니잖아요'라며 아이들이 죽어갔을 때 전 사회가 분노의 마음으로 슬퍼했던 때가 있었다. 그 후 지금까지 성적 비관 자살이 끊이지 않지만 이제는 이슈가 되지 않을 정도로 둔감해진 학교와 사회를 보면서 올해로 15년째 교단에서 학생들을 가르치는 교사로서 자괴감이 크다.

가습기 살균제에 대해 많은 문제 제기가 있어왔지만 최근에야 전 국민의 공분을 샀다. 만시지탄의 아픔이다. 마찬가지다. '야자'도 단시일에는 그 심각성이 느껴지지 않을지 몰라도, 고교에서는 청소년들의 건강과 영혼이 매우 피폐해지는 제도로 오래전부터 굳어져왔다. 교육과 그 교육으로부터 시작된 한국 사회의 고질적 병폐를 개선해야 한다는 책임을 느끼는 사람이라면 기득권과 관행에 짓눌려 모르쇠하기보다 이에 대한 개선 방안을 어떻게든 내놓을 때가 되었다.

덧붙이는 글 | 1. 참고한 내용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 '야자 폐지', 전 이 공약에 투표하겠습니다(
http://m.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190237&CMPT_CD=SEARCH)
2. 정책에 대한 연구서의 출처는 다음과 같습니다.: 학벌사회(김상봉, 한길사, 2004)
3. 필자는 전교조 인천지부 정책실장으로서 현재 인천산곡고 국어교사로 근무하고 있습니다.
4. 한겨레 신문 "왜냐면"에 투고하여 실린 글(2016.06.01)을 보완하였습니다.



태그:#야자, #학벌사회, #대학 평준화, #입시경쟁, #행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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