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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옷을 차려 입고 거울 앞에 섰는데
어색하기가 짝이 없구나
그토록 탐을 냈던 값비싼 외투인데
이건 내게 어울리지가 않아

나도 쟤처럼 멋들어지게 차려 입으면
훨훨 날아갈 줄 알았어
점점 걔 같은 옷들로만 가득찬
나의 인생을 보며 쓴웃음만

- 선우정아, '뱁새' 가사 중에서

가난한 여행자가 주제에 맞지 않게 한상 거하게 차려 먹으면 어떻게 되는지 어제 충분히 경험을 했다. 무턱대고 먹다보면 가산을 탕진한다는 오사카 도톤보리가 터키로 옮겨왔다.

오늘 아침은 우아하게 퓨전 요리를 해먹기로 한다. 보글보글보글. 한국에서 챙겨간 효자 아이템 전기 쿠커에서 라면 국물이 끓고 있다. 한국에서 챙겨간 음식은 대용량 라면스프, 조미료, 고춧가루, 멸치가루가 전부다. 대학교 때 자취 생활을 10년 정도 했고, 영양사이신 어머니의 피를 물려 받아 이것 저것 뚝딱뚝딱 잘 만들어 먹기 때문에 주로 국물 요리를 위한 양념들을 챙겨 왔다.

라면 국물 속에 둥둥 떠다니는 것은 속이 빈 원통 모양의 파스타. 구멍가게에서 1리라(400원)에 구입했다. 원래 파스타는 한 번 익히고 다시 볶아서 먹는데, 그런 호사를 부릴 수는 없고 그냥 라면 국물 속에 투하하여 끓였다. 그리고 우아하게 계란도 하나 풀었다. 무슨 맛이냐면, 그냥 많이 먹으면 배가 부를 것 같은 맛이다. 탄수화물과 단백질이 어우러진 건강식이다. 원래 몸에 좋은 것은 맛이 없는 법이다. 라고 스스로를 설득한다. 배도 든든하게 채웠으니 다시 본업으로 돌아가자.

시장 종업원들이 모두 남자? 이상하고 낯선 풍경

여행지에서 끓여 먹는 동서양의 조화와 영양소의 조화가 두드러진 라면계란파스타탕. 배가 부르다는 장점이 있다.
 여행지에서 끓여 먹는 동서양의 조화와 영양소의 조화가 두드러진 라면계란파스타탕. 배가 부르다는 장점이 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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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 멘탈의 붕괴로 발걸음을 돌려야 했던 그랜드 바자르로 향한다. 가이드를 동반한 단체 관광객 무리가 보인다. 가이드가 무어라고 열심히 설명을 하는데, 귀동냥으로 들어보니 정체 불명의 언어를 사용하고 있다. 코와 입으로 연신 바람을 내뱉는 저 언어는 어느 나라 말일까. 저 상태로 계속 말을 하면, 산소 부족으로 저혈압이 올 것 같다.

보무당당하게 입성한 그랜드 바자르는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다'는 속담 그대로였다. 가이드북에는 '관광객 물가'라는 것이 따로 있다고 적혀 있었는데, 그 말대로 시장 안에 파는 물건들은 모두 관광객을 향한 손짓이었다. 거대한 기념품가게 같은 느낌이었다. 세련된 듯 또 아닌 듯한 시장 안의 모습은 서울의 광장 시장이나 부산의 진시장과 다를 바가 없었다.

다른 점이 있다면, 우리네 시장에는 아줌마들이 많고 그랜드 바자르에는 외국인 관광객이 많다는 정도였다. 물론 눈이 돌아갈 만큼 예쁘고 화려한 그릇과 조명들은 그런 것에 전혀 관심이 없는 나도 '내일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여행 가방에 꼭 넣고 싶은' 기념품들이었다. 그랜드 바자르는 그 규모 만큼은 엄청나게 넓어서 가로, 세로가 지하철 2정거장 정도 되는 것 같았다. 각 구역 별로 유통하는 상품이 다르다고 하니, 겨우 시장 입구와 가까운 곳을 한 시간 정도 헤매다 나온 내가 가타부타 할 것은 아닌 것 같기도 하다.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시장이었지만, 여자 점원이 한 명도 없어서 놀라웠던 그랜드 바자르.
 '소문난 잔치에 먹을 것 없는' 시장이었지만, 여자 점원이 한 명도 없어서 놀라웠던 그랜드 바자르.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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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장을 걸으며 놀랐던 것은 이 많은 상점들의 종업원이 모두 남자라는 것이었다. 처음에는 그냥 그런가보다 하고 지나갔는데, 관심을 갖고 살펴보기 시작한 후로 시장을 나오기까지 여자가 물건을 팔고 있는 곳은 단 한 곳도 없었다.

심지어 어쩌다 보니 속옷을 파는 구역으로 들어갔는데, 여성 속옷을 파는 가게도 남자가 장사를 하고 있었다. 여자 속옷은 남자 속옷과 달리 배경 지식이 풍부해야만 상품 상담을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입어본 경험도 없는 남자가 팔고 있다는 것에 놀랐다.

남자라고 여자 속옷을 못 팔 이유가 있겠냐만은 적어도 내가 돌아본 가게들 중에 여자가 장사를 하고 있는 곳은 없었다. 속옷에 대한 나의 편견이 문제인가 싶다가도, 여성의 사회 활동을 이 정도까지 제한하는 것이 상식적인가 싶었다. 남녀가 유별하여 그렇다 하면 여성이 자신의 속옷 관련 정보를 남자에게 알리고 상품을 구매하는 것은 문제가 되지 않는 걸까. 전통 시장이라서 문화적 관습이 더욱 강하게 남아 있는 것 같았다. 물론, 터키 사회 전체가 그렇다는 것은 아니다. 카페에서 차도르를 입고 남자와 앉아 담배를 피우는 여자도 있었다.

지난 5년간 여자 고등학교에서만 근무를 해서 그런지 여성 문제에 대하여 자꾸만 생각이 닿는다. 최근에는 아주 가슴 아픈 일도 있었다는 것을 뉴스를 통해 보았다. 나는 결혼도 안 했고, 자식도 없지만, 내 새끼들(교사들은 보통 담임반 학생들을 이렇게 부른다.)이 곧 졸업하여 저 곳으로 간다고 생각하면 참 마음이 아프다. 자녀의 성별은 아버지에 의하여 결정된다. 왜 여성을 향한 차별이 '문화적 전통'이라는 단어로 둔갑하는 것일까. 어디서부터, 어디까지 여성을 향한 차별으로 규정해야 하는지 알 수는 없지만, 여성을 향한 차별을 보고 '전통'이라는 말은 안 했으면 좋겠다. 분명히 그것은 고쳐 나가야 할 '인습'이다.

시장을 나와 또 다시 걷는다. 오늘은 이스탄불의 아시아 지역으로 가 볼 생각이다. 번화한 길을 피해 골목길로 내려가니 주택가 근처에 있는 케밥집에서 바게트 사이에 고기를 듬뿍 썰어 넣은 케밥을 2.5리라에 팔고 있다. 한 블럭 위의 번화가에는 부실한 케밥을 8리라에 팔고 있는데 1/3 가격이다. 여행자의 위는 언제나 비어 있다. 먹을 수 있을 때 먹어야 한다.

사실 '케밥'이라는 것은 우리말로 하면 '꼬치구이' 정도에 해당한다. 우리나라에서 케밥이라고 하는 또띠아에 고기를 썰어서 싸주는 케밥의 이름은 '되네르(Döner)'다. 터키에서는 주로 되네르 케밥을 또띠아 대신 바게트에 싸서 먹는 것이다. 유명 터키 음식점에 들어가면 온갖 종류의 케밥이 다 있으니 궁금하신 분들은 경험해 보시길 바란다. 물론 나는 되네르 말고는 못 먹어 봤다. 그리고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것은 맛있는 케밥이 먹고 싶다면 카자흐스탄으로 가야 한다. 카자흐스탄에서도 대표 간식 또는 패스트푸드는 케밥인데, 어느 가게에서 먹든 정말 맛있다. 심지어 가격도 무척 저렴하다.

터키의 길거리 간식들. 위에서부터 되네르 케밥, 시미트, 삶고 구운 옥수수, 군밤.
 터키의 길거리 간식들. 위에서부터 되네르 케밥, 시미트, 삶고 구운 옥수수, 군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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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 터키 아이스크림이 궁금할 수도 있겠다. 한국에서 파는 쫀득한 터키 아이스크림을 물론 여기서도 팔고 있다. 딱 그 모습 그대로, 한국의 터키 아저씨들이 하는 그 말투까지 그대로 한국어로 장사를 하고 있었다. 맛도 똑같고 심지어 가격까지 똑같다. 터키 아이스크림의 본고장을 찾아 터키에 오신다면 명동이나 인사동으로 가시라고 하고 싶다. 거기 아저씨들이 훨씬 재미있다. 더운 날 내 앞에서 아이스크림을 막대기에 붙여 놓고 이리저리 장난을 치는데, 재미는 없고 배낭은 무겁고 그냥 얼른 줬으면 좋겠다 싶었다.

내가 박장대소를 터뜨릴 때까지 영원히 끝나지 않을 것 같아서 정말 열심히 호응해 줬더니, "이것은 덤이야" 하며 조그만 콘에 제비똥만큼 묻혀서 준다. 그래도 세상을 다 가진 것 같은 표정으로 '테세퀴르 에데림!(고맙습니다)' 외쳐 주었다. 물론 다시는 사 먹을 생각이 없다. 대도시를 벗어나자 터키 아이스크림을 파는 가게를 거의 볼 수 없었는데, 우연의 일치는 아닐 듯싶다.

이스탄불의 길거리 음식은 딱 세 가지다. 참깨빵과 옥수수 그리고 군밤. 다른 지역은 아직 안 가봤지만 다르지 않을 것 같다. 공원이나 관광지 또는 부둣가 어디든 이들을 파는 손수레가 줄을 서 있다. 그런데 별로 맛이 없나보다. 공원 잔디 위 곳곳에 빵과 옥수수가 굴러다닌다. 비둘기들만 포식을 하고 있었다. 하나 먹어 보고 싶은데 별로 맛있어 보이지도 않고, 한국이랑 뭐가 다를까 싶어서 안 먹었다.

그러다 해가 지고 숙소로 가는 길에 지금껏 2리라(800원)짜리 옥수수만 봤는데 알라신 같은 인자한 미소를 가진 할아버지가 1.5리라에 팔고 있는 것이 보여 하나 사 먹어 봤다. 그냥 커다란 통에 물을 담고 옥수수를 넣어 펄펄 끓이고 있었다. "소금 뿌려 줄까?" 헉. 소금을 뿌리다니. 아니요 그냥 주세요. 하고 받았는데 다른 사람들은 옥수수 위에 소금을 철철 흘려서 먹고 있었다. 짠 맛을 못 느끼나? 너무 뜨거워서 옥수수 씹다가 내 옥수수가 빠질 것 같았는데, 이게 뭐람? 정말 정말 맛있었다. 달콤하고 고소한, 해가 진 어두운 거리(이스탄불은 오후 9시가 넘어야 어두워졌다.)에 출출한 뱃속을 달래주는 구원의 손길이었다.

술탄 아흐멧 자미의 환상적인 야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그때 맛있다는 생각을 하며 옥수수를 먹기 시작한 것 같은데, 잘 기억이 나지 않는다. 단언컨대 터키에서 가장 맛있는 음식은 삶은 옥수수다. 다만 다음날 부둣가에서 2리라짜리 고급 옥수수를 사 먹으며 "저기 할아버지는 1.5리라에 파는 데 여긴 왜 2리라에 팔아?" 물었더니, 그 친구의 대답에 모든 의문이 해소되었고, 더 이상 문제 제기도 할 수 없었다. "나는 설탕을 더 많이 넣어." 아.. 설탕. 고소하고 달콤한 이스탄불 옥수수 참 맛있다. 그제야 왜 소금을 뿌리는지도 깨달았다. 달달한 음식에 소금을 뿌리면 단 맛이 더 강해지기 때문이다. 궁금하면 아이스크림에 소금을 살짝 뿌려 보기 바란다.

이스탄불 다음 목적지는 카파도키아다. 기암괴석과 언더그라운드 시티가 있고, 열기구 투어를 할 수 있는 곳. 터키는 기차보다 버스가 더 편리한 교통 수단이다. 국내선 뿐만 아니라 국제선 버스도 탈 수 있다고 한다. 지나가는 길에 여행사에 들러 교통편을 알아보고 투어 상품 문의도 해본다. 이스탄불에서 다른 지역으로 이동할 때 대부분 버스를 이용하는데 버스 티켓을 사는 것이 번거로워서 다들 시내 여행사를 통해 버스 티켓을 예매한다. 그런데 버스 티켓이 비행기 티켓을 구매하는 것과 비슷하여 여행 시기와 티켓 구매 방법에 따라 가격이 다 다르다.

버스 터미널에서 사면 가장 싸고 정확하게 살 수 있지만, 버스 터미널이 시내 중심가에서 멀리 떨어져 있어서 여행사에 수수료를 내더라도 터미널까지 가는 왕복 교통비와 시간을 고려하면 여행사를 통하는 것이 나쁘지 않은 선택이다. 여행사에서는 티켓을 구매하면 무료로 터미널까지 셔틀버스도 제공해 준다며 침을 튀기며 이야기를 한다. 나야 남는 게 시간이고, 이것도 경험이다 싶어서 터미널에서 티켓을 사야지 싶어 그냥 나왔다.

터키 여행에선 기차보다 버스가 편리... "택시는 타지 마세요"

터키에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버스를 잘 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터키에서 여행을 하기 위해서는 버스를 잘 타는 것이 아주 중요하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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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리고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배를 탔다. 성격이 모난 탓에 남들 하는대로 다니지 않고 내 마음대로 다닌다. 가이드북에서도 아시아 지역은 관광지가 아니라 현지인들이 거주하는 주택단지라며 특별한 정보가 없었다. 선착장에서 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많은 배들 중에 딱히 특별한 이유 없이 '하렘(harem)'으로 가는 배를 탔다. 배도 대중교통의 연장이라 지하철에서 내려 환승도 가능하다.

터키는 특히 교통 정체가 심하기로 세계 최고라고 한다. 그럴 수밖에 없는 것이 역사가 오래된 도시여서 도심 속의 도로는 대부분 차량 통행이 불가능하거나, 그나마도 일방통행이다. 구시가에서 신시가로 넘어가는 다리 위에서만 2시간이 걸리기도 한단다. 이스탄불에서 절대 하지 말아야 하는 첫 번째는 택시를 타는 것이다. 숙소의 호스트도 첫 번째 주의사항이 '택시 타지 말 것' 이었다. 그래서 아시아 지역으로 가는 가장 좋은 방법은 페리를 타는 것이다. 그렇게 도착한 하렘 선착장 바로 앞에 떡하니 터미널이 있었다.

이스탄불에 큰 고속버스 터미널이 두 개가 있는데 하나는 유럽 지역, 그리고 하나는 아시아 지역에 있다. 대부분 관광객들이 유럽 지역 터미널을 가기 때문에 아시아 지역에 대한 정보가 없었다. 그렇게 운 좋게 버스 티켓을 예매할 수 있었다. 하렘 역시 메인 터미널은 아니지만 버스 회사에 따라 이 곳에서 출발하는 버스도 있고, 셔틀버스를 타고 메인 터미널로 이동해야 하는 버스 회사도 있었다.

그리고 나중에 알게 된 사실은 여행사에서 대단한 서비스인 양 이야기 했던 무료 셔틀버스는 버스 회사에서 제공해 주는 것이었다. 버스 티켓을 가지고 있으면 유럽 지역, 아시아지역 어디든 도심 곳곳을 누비는 셔틀버스를 무료로 실컷 탈 수 있었다. 덕분에 아시아 지역을 다니며 버스비도 아끼고, 여행사 수수료도 아끼고, 어차피 가려고 했던 아시아 지역도 다녀왔으니 시간도 아꼈다. 청개구리 같은 성격이 이럴 때는 참 좋다. 바뀌지 말아야겠다. 어머니가 이 글을 읽으시면 싫어하실 것 같다.

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할 때에는 값싸고 편리한 페리를 이용하세요. 멋진 풍경은 덤이랍니다.
 아시아 지역으로 이동할 때에는 값싸고 편리한 페리를 이용하세요. 멋진 풍경은 덤이랍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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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찾아 간 이스탄불 아시아 지역은 정말 좋았다. 일단 물가가 저렴했다. 겨우 배 타고 10분 건너 왔는데, 구시가지의 절반이었다. 지나가는 행인들은 생김새와 차림이 낯선 나에게 모두 호기심 가득한 시선을 보였다. 시장은 정말로 사람 냄새가 물씬 풍기는 시장이었고, 그랜드 바자르보다 흥미로운 것들이 많았다. 그리고 사람들이 참 허물없이 성큼 성큼 다가왔다. 이국적인 생선들이 진열된 가게를 보고 있으면 주인 아저씨가 다가와 물고기 이름을 터키어로 알려 주고(아마 그랬을 것이라고 추측한다.) 같이 사진을 찍자며 가게를 배경으로 사진을 찍는다.

그러면 옆집 정육점에서 아저씨가 나와서 같이 찍자고 하고 다같이 셀카를 찍고 그런다. 이제야 진짜 여행하고 있는 것 같다. 언제나 최고의 여행이란 그곳 사람들 사이에 섞여 잠시 살아 보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아시아 지역에서 딱 그랬다.

관광지가 집중된 유럽 지역의 구시가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아시아 지역의 살가운 풍경들.
 관광지가 집중된 유럽 지역의 구시가지의 풍경과는 전혀 다른 아시아 지역의 살가운 풍경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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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서점을 참 좋아한다. 쌓여 있는 책은 보기만 해도 흐뭇해진다. 약속 장소도 가능하면 서점으로 한다. 여유있게 도착하여 서가를 훑어보는 그 순간이 좋다. 이스탄불에는 서점이 많이 있었다. 우리나라처럼 온오프라인 동시에 매장을 운영하는 대형 유통망이 아니라 주인 아저씨가 궁금해지는 작고 예쁜 서점이 참 많았다. 카페와 식당이 줄지어 선 번화가 한가운데에도 작은 서점이 있었고, 사람들이 많이 다니지 않는 외진 곳에도 간판 없는 서점이 있었다. 대로변에도 있었고 바닷가에도 있었다.

독서 수요가 있으니 작은 동네 서점이 이렇게 많을 것이다. 우리나라는 2000년 무렵부터 대형 인터넷 서점이 등장하기 시작하면서 동네 서점은 거대 자본의 가격 공세를 버티지 못하고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중소 서점들이 무너지는 속도가 너무 빨라서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기까지 했다. 그 즈음 학교 앞 서점들도 없어지기 시작했다. 명색이 상아탑인데 어느 대학교 앞에서도 시대 정신을 이어가던 서점은 찾아볼 수 없게 되었다.

내가 다니던 대학교 앞에도 사회과학 서적만을 전문으로 하던 '새벽'이란 서점이 있었는데, 책을 사면 사장님이 직접 한 권 한 권 책표지를 싸주었었다. 그러다가 서점 한 켠에 토익 책이 쌓이고, 컴퓨터 자격증 책이 쌓이는가 싶더니 결국 네일샵으로 바뀌었다. 학교 정문 앞 마지막 서점은 그렇게 사라졌다. 15년 전에 그 서점에서 샀던 책들은 여전히 내 책장에 꽂혀 있다. 한 가지 더 고백하자면 그 당시 나도 온라인을 통해 책을 샀었다. 내가 동네 서점을 죽인 범인인 것 같다.

이스탄불 거리 곳곳에 조그만 서점들이 아주 많다. 터키인들이 부러운 또 하나의 이유다.
 이스탄불 거리 곳곳에 조그만 서점들이 아주 많다. 터키인들이 부러운 또 하나의 이유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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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럽과 아시아를 가르는 보스포루스 해협을 따라 조성된 보행 전용 도로는 시간이 느리게 흐르고 있었다. 그렇게 복작거리던 구시가도 멀리서 바라보니 아름답기 그지 없었다. 그 속에서 치열하게 외쳐대는 삶의 소리가 들리지 않아서다. 멀리서 보니 참 아름다웠다. 셰익스피어는 '인생은 가까이서 보면 비극이지만 멀리서 보면 희극'이라고 했다.

이스탄불 현지인들의 산책로로 사랑 받는 곳을 걸으며 여행 오길 참 잘했다는 생각이 든다. 언제 이렇게 여유로울 수 있었나. 매일 매일이 정말 치열했다. 직장에서 계약 연장은 삶의 목표였다. 계약 연장 실패는 곧 인생의 실패라 생각했다. 이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때면, 전 인류가 나를 향해 내 생각이 얼마나 위험한 사고인지 알려주었다. 그러다 여기까지 왔다. 내 삶의 전부인 줄 알았는데 막상 내려 놓고 보니 내가 가진 것이 아무 것도 없었다.

장기 여행을 떠나면 정리해야 할 것들이 산더미라고 하던데, 나는 겨우 약정이 끝나지 않은 인터넷 정지하는 것이 가장 힘든 일이었다. 그리고 현실에서 잠깐 비켜섰다. 깊이 잠들고 싶다는 핑계로 매일 홀짝이던 술이 없어도 설레는 내일을 꿈꾸며 깊이 잠들었고, 휴대폰 알람이 울리지 않아도 창밖이 밝아오면 눈이 떠졌다.

노천 카페에 앉아 싸구려 수제 버거를 입에 물고 지금 순간을 즐긴다. 한량이다. 세상에 이런 호사가 없다. 나는 이래도 될 만큼 열심히 살았나. 돌아본 내 인생은 스스로도 대견할 만큼 노력하며 살았고, 다시 그 속으로 돌아가도 지금의 경험으로 내 삶을 타자화하여 바라볼 수 있을 것 같다. 20kg 배낭 하나면 1~2년 여행하는 데 부족함이 없는데, 나는 무엇을 그리 많이 가지려고 하고 짊어지려고 했을까. 햇볕이 참 좋다.

부산에 지인들이 찾아오면 광안대교를 보고 싶어 한다. 광안대교를 지나 집에 도착하면 광안대교는 왜 안 갔냐고 한다. 광안대교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려면, 광안대교에서 멀리 떨어져야 한다. 광안대교 위에서는 그 자리가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이지 않는다.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보이는 이스탄불 유럽 지역의 신시가지.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보이는 이스탄불 유럽 지역의 신시가지.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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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보이는 이스탄불 유럽 지역의 구시가지.
 보스포루스 해협 너머로 보이는 이스탄불 유럽 지역의 구시가지.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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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안가를 걷고 있는데 인형 같이 예쁜 아기를 데리고 나온 신혼부부가 벤치에 앉아 있다. 아기를 보며 웃고 있는 나에게 갑자기 한 번 안아보라며 아기를 덥썩 안겨 주었다. 3개월 정도 된 신생아를 낯선 이방인의 품에 이렇게 안겨주다니 어안이 벙벙했다. 요즘은 엘리베이터에서 만난 아이의 머리를 쓰다듬는 것도 범죄라며 조심해야 한다고 들었는데, 대체 내가 누군지 알고 이렇게 아기를 안기는 걸까. 인형 같이 생긴 아기는 솜털 같이 가벼워서 내가 사람을 안고 있는 게 맞나 싶었다.

아기와 함께 사진도 찍었다. 쿨한 표정으로 내 품에 있는 아기와 광대가 터질 듯 웃고 있는 시커먼 아저씨가 사진 속에 같이 있었다. 내 몸에서 나는 낯선 그리고 그리 유쾌하지 않을 냄새가 아이에게 트라우마로 남지는 않을까 싶어서 얼른 아기 엄마에게 돌려 주었다. 앞으로도 계속 될 '터키 사람들의 따뜻한 마음 시리즈'의 첫 번째 사건이었다.

다시 배를 타고 숙소로 돌아간다. 석양을 받은 자미(이슬람 사원)가 더 웅장하게 보인다. 다리 위에서는 오늘도 구두닦기들이 내 앞에 구둣솔을 떨어뜨리느라 부산하게 움직인다. 장난을 좀 쳐볼까 하다가 관둔다. 이제 내 일이 아닌 것 같아 그마저도 정이 생기려고 한다.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자 자미에 조명이 켜진다. 어두운 밤하늘 아래에서 조명을 받은 자미는 또 다른 모습을 보여 준다.

또 옥수수를 하나 사서 물고 사람들 사이에서 저 예쁜 장면을 어떻게든 카메라 속에 담아보려 욕심을 부린다. 아무리 찍어도 마음에 들지 않는다. 당연하다. 내 눈에 담긴 장면 보다 아름다울 수 있을까. 카메라에 담지 말고 두 눈에 가득 담자. 이 기억이 희미해질 때쯤에 다시 이 자리에서 옥수수 먹자. 그나저나 옥수수 정말 달다.

석양을 받은 갈리타 대교에 조명이 들어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석양을 받은 갈리타 대교에 조명이 들어와 환상적인 분위기를 연출하고 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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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야 소피아 성당의 야경. 실재를 카메라에 담고 싶어 욕심을 내지만, 처음부터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아야 소피아 성당의 야경. 실재를 카메라에 담고 싶어 욕심을 내지만, 처음부터 그것은 안 될 일이었다.
ⓒ 한성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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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기자의 블로그 '타박타박 아홉걸음' http://ninesteps.tistory.com에도 동시에 게재되었습니다.



태그:#타박타박, #아홉걸음, #배낭여행, #세계일주, #이스탄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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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자란 저에게 아이들이 "선생님"이라고 불러줍니다. 아이들에게 좋은 선생님이 되고 싶습니다. 그러기 위해서 지금은 성실한 여행자가 되어야겠습니다.

행복의 무지개가 가득한 세상을 그립니다. 오마이뉴스 박혜경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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