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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화에서 이어집니다.)

삽시간이다. 긴박했던 상황은 1분도 안 돼 끝난다. 작업현장 책임자 간수는 급보를 알린다.

"본부 긴급, 긴급 상황! 13시 05분 현재 수감자 탈주 발생!"
"뭐라고? 어떤 상황인지 자세히 말해 봐."

"보안 병력 일부 부상, 탈주자 수명 사살!"
"사살? 무슨 일이 일어난 거야?"

"비상 상황 전파 요망, 지원 병력 급파 바람!"
"알았어. 통신선 확보하고, 일단 전원 대기!"

적막하기만 했던 동북수용소가 소란스러워진다. 하지만 도쿠나와 다카시 소장은 침착했다. 상황실장 보고를 받고 나서 인터폰으로 행정실장을 찾는다.

"기요다케 실장, 비상 매뉴얼 지참하고 내 방으로 와."

기요다케는 소장실 문을 박차고 허겁지겁 들어온다.

"왜 이리 정신없이 굴어? 언제나 진중하라고 몇 번 얘기했나?"

도쿠나와의 핀잔에도 기요다케는 더듬대며 말한다.

"여, 여기 비상 매뉴얼 있습니다."

도쿠나와는 한동안 매뉴얼을 살핀 다음 참고할 부분을 표시한 다음 기요다케에게 다시 전한다.

"여기에 있는 대로 관계 기관에 연락해서 비상 상황 전파해. 대응 조치할 수 있도록 유선으로 먼저 연락하고 협조공문 보내. 그리고 수용소 자체 대응 체제도 가동시키고…."
"네, 네, 알겠습니다."

의외로 간단하다. 상당히 비상상황인데도 도쿠나와는 지극히 사무적일뿐이다. 감정이 전혀 묻어나지 않는다. 그렇게 기요다케는 아무런 반론 없이 소장실을 나온다. 기요다케를 수행한 다카하시 과장은 눈치를 본다.

"실장님, 어떻게 할까요?"

기요다케는 눈을 흘기며 면박 준다.

"뭘 어떻게 해? 소장님 말씀 못 들었어? 매뉴얼대로 해!"

다카하시도 말더듬는다.

"네, 네, 알, 알겠습니다."

전쟁 준비한 보람이 있다. 전쟁할 수 있는 나라로 야금야금 변한 일본은 어느새 과거 일제 시대처럼 병영국가 면모를 갖췄다. 전쟁 매뉴얼처럼 동북방면, 남동방면은 물론 모든 도로에 차단방벽이 섰다. 모든 유선통신은 끊겼다. 아직 계엄령이 내려진 것은 아니다. 하지만 무소불위 국가안전보장법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만든다.

마치 정치영화 거장 그리스 출신 감독 코스타 가브라스 1972년 작품 <계엄령(State Of Siege)>처럼 말이다. 우루과이 수도 몬테 비데오가 영화의 배경이다. 여느 독재정권 같이 자신들에게 항거하는 젊은이, 지식인을 불법 연행해 감옥에 보낸다. 그리고 허위로라도 자백을 받아내기 위해 고문이 이어진다. 미국 국적 필립 마이클 산토레(이브 몽땅)는 미국 AID라는 단체에서 파견된 인물이다.

좌파 지하 조직인 '투파마로'에 의해 브라질 영사와 함께 그가 납치된다. 그리고 그에 대한 언론과 여론의 관심이 집중된다. 그의 실제 정체는 무엇이었을까. 투파마로의 심문으로 그의 정체가 파헤쳐진다. 재밌는 사실은 오래전 영화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에서는 엄혹한 군사독재가 끝난, 다시 말해서 1993년 14대 김영삼 대통령이 집권한 다음 문민정부 시대에서야 상영됐다는 것이다. 좌익 혁명가들이 우익을 처단하는 이 영화는 1980년 5.18 광주 민주화운동 시기에 보인 삼엄한 모습과 겹쳐 인상 깊다.

외화 뿐 아니라 우리나라 영화에서도 '계엄군'을 볼 수 있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민중들은 계엄군의 혹독한 진압에 항거하며, 목숨을 건다. 그러나 강한 무력 앞에서 민초들의 모습은 그냥 '시위대'일 뿐 인간으로서 존재감을 잃는 것이 자의적인 계엄령과 계엄군인 것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민초들을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땅에 다시 계엄령이나 계엄군이라는 단어가 언론에 오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영화 <화려한 휴가>에서 불의에 항거하는 민초들을 계엄군이 무자비하게 진압하는 장면이 나온다. 이땅에 다시 계엄령이나 계엄군이라는 단어가 언론에 오르지 않기만을 바랄 뿐이다.
ⓒ 영화 <화려한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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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탄자니아 세렝게티 평원에 사는 초식동물 누(gnu)처럼 탈주자들은 삼삼오오 모여든다. 꾸준하게 운동을 해온 사람들이 아니라 목숨 걸고 도망쳐 뛰어오다 보니 숨이 턱턱 막힌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숨진 혼다와 몇몇 부상자들을 빼놓고 그들 동패들 여남은 명은 온전히 살아남았다는 점이다. 그들 몰골이 말이 아니다. 기실 가진 것도 거의 없다. 걸친 죄수복, 간수들로부터 빼앗은 총 세 자루, 지도, 그 와중에 꼼꼼하게 챙겨온 물 서너 통이 전부다. 먹을 것이라고는 요시다가 속이 좋지 않아 남겨둔 주먹밥 한 개가 전부다.

"어이, 대장. 이제 어떻게 할 거야."

방장이었던 수다쟁이 '1358'이 요시다에게 묻는다. 그는 역시 생존능력이 탁월하다. K를 떠나게 만든 장본인이다. 하지만 스스로 말한 것처럼 끝까지 수용소를 빠져나온 것이다.

"…."

요시다는 무슨 말을 할 수가 없다. 자신조차도 다음에 대해 생각하기는 했다. 트럭을 탈취해서 달아난다는 생각까지였다. 일단 13명이 몰려다닐 수는 없었다. 금세 눈에 띄는 것은 둘째 치고 한꺼번에 모두 잡힌다면, 그들이 탈출한 목적을 이룰 수 없게 되기 때문이다.

하지만 지금 옷차림으로는 탈출할 수 없는 게 더 큰 문제다. 죄수복에 부실한 신발부터 다른 것으로 바꿔야 한다. 동패들을 세 팀으로 나눈 요시다는 북쪽으로 방향을 잡기로 한다. 지도에 표시된 각기 다른 길을 거쳐서 해안 마을에 도착해 만나기로 한다.

쓰나미가 휩쓸고 간 동북 해안에 도착한다고 해도 그들이 도망칠 곳은 한정돼 있다. 빼앗은 트럭은 펑크가 났다. 요행히 배를 구한다면 연안을 따라 도쿄로 가든지, 혼슈 북단으로 나가든지, 아니면 망망대해 태평양으로 방향을 잡든지 해야 한다. 배가 여의치 않으면 쓰나미로 멈춰버린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쪽으로 걷는 것이 유일한 선택이다. 죽음의 땅이다. 택하고 싶지 않은 것이 당연하다. 그러나 역설적이게도 그곳밖에 없다.

"일단 후쿠시마 원자력 발전소 쪽으로 갑시다. 그곳에 폐가가 많습니다. 거기서 옷도 갈아입고, 먹을 것도 챙겨야죠. 그리고 그곳을 빠져나갈 차나 배도 마련하고요."

그 말이 끝나기가 무섭게 방사능을 두려워하는 '1233'은 경기를 일으키는 듯 거부한다.

"나는 안 가. 나는 못 가. 그 방사능이 천지인 곳에 내가 왜 가?"

요시다가 가차 없이 대꾸한다.

"가야 해요. 우리는 동패고, 죽어도 함께 죽자고 피로써 맹세했으니까요."
"안 돼. 나는 남쪽으로 갈 거야."

"무슨 소리에요. 혼다, 그러니까 '3693'이 왜 죽었는지 몰라요?"
"그래도 안 돼. 나는 남쪽으로 갈 테니까. 나를 좀 놔줘."

'1233'은 간절하게 요시다에게 빈다. 옆에 있던 '1358'이 거든다.

"요시다, 이 친구는 그냥 가게 내버려 둬. 사연이 있는 친구야."

요시다는 거부했다. 하지만 '1358'은 완강하고 거칠게 요시다를 밀쳐 낸다.

"너는 지금까지 우리와 행동하지 않은 거야. 잡히더라도 입 꾹 다물면 돼. 알았지? 그리고 꼭 나가사키에 다시 가서 잘 살아라."

그리고 '1233'의 등을 떠민다. 떠나는 그의 뒤를 보면서 '1358'은 혼잣말처럼 얘기한다.

"저 꼬맹이 녀석, 후쿠시마 원전 쪽으로 가면 오히려 죽느니만 못해."

떠나간 '1233'을 제외한 나머지는 세 팀은 세 갈래 길에서 나뉜다. 그리고 말없이 후쿠시마 원전으로 향한다. 아무도 말할 기운이 없다. 말할 분위기도 아니다. 그들은 도망쳐온 길을 세 개의 무리를 이뤄 각각 거슬러 올라갔다. 추적자들을 역으로 따돌린다는 의도에서다.

다만 그 길 그대로 되돌아 올라간 것은 아니다. 되돌아 멀리 돌아갔다. 당연히 그들은 큰 길은 피했다. 2차선 도로라도, 길이 아닌 둑 아랫길이나 경사면을 거쳐 갔다. 언제 어디서든지 군복을 입은 자들이 탈주자들을 발견할 수가 있기 때문이다.

'1358'이 포함된 요시다팀은 두 시간 족히 걸었다. 길에서 있음직한 '방사능구역 통제'라고 쓰인 표지판 같은 것도 안 보인다. 무리들은 가파른 언덕을 힘겹게 오른다. 언덕 정수리에 다다랐다. 모두 입이 바싹 말랐다. 침을 삼키며 숨을 고른다. 멀리 바다가 눈부시게 푸르다. 갯가에 멀찍이 떨어진 산 중턱 마을이 눈에 든다. 아니 정확히 말하자면, 마을이었던 곳이 눈에 들어온다.

올라올 때와 달리 내리막은 가볍다. 뛰다시피 종종걸음으로 마을 어귀에 이른다. 이곳도 마찬가지다. 길에 오가는 차 한 대도 없다. 다시 오르막이다. 멀리서 봤을 때는 도로에서 가까운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꽤 많이 오르고서야 마을에 도착했다. 마치 공포영화 세트장을 만들어놓은 것처럼 적막만 흐른다. 햇빛이 환한데도 음산함이 가득하다. 사람이 살았다는 흔적은 여기저기 흩뿌려져 있다. 그러나 지금 동네에는 사람은 물론 개 한 마리도 볼 수 없는 유령마을이다.

대개 전통 가옥으로 꾸며진 마을에 빨간색 뾰족 지붕 2층 양옥집이 눈에 뛸 수밖에 없다. '1358'이 사냥감을 노리는 듯 그 집안으로 들어가자 나머지도 우르르 그 집으로 몰려간다. 마을 전체의 다른 집처럼 그 집도 쓰나미 피해 지역 밖에 있어서인지 어수선하지 않고 정리돼 있다. 금세 다시 돌아오리라고 믿은 집 주인 생각을 들여다볼 수 있는 것처럼. 누구나 당장이라도 들어와서 사는 데 전혀 지장이 없을 정도다.

'1358'이 신발을 신은 채로 거실로 뛰어 올라간다. 그리고 부엌을 뒤진다. 먹을 거나 마실 거를 찾기 위해서다. 냉장고를 발견하자마자 문을 벌컥 열어젖힌다. 하지만 이내 코를 움켜잡는다. 벌써 수년이 지났지만 품질 좋은 냉장고는 밀폐성을 잘 유지했고, 그 안에서 썩어간 먹거리에서 나온 가득 찬  가스는 악취를 풍겼기 때문이다.

"창문, 창문 좀 모두 열어!"

'1358'이 잠긴 목소리로 외친다. 그렇게나 지독했나보다. 모든 창문이 열렸고, 바다와 산에서 만난 선선한 바람이 악취를 씻는다. 냄새가 사라지자마자 '1358'은 냉장고를 다시 뒤적인다. 아래 칸에 있는 채소나 과일은 썩어문드러진 채 말라 화석이 돼 버렸다. 중간 중간 밀폐 유리 용기에 담긴 음식들은 녹아서 물처럼 돼 있다. 계란들도 상해 터져버렸다. 색채가 바랜 채 그림물감처럼 번져있다.

'먹을 게 아무 것도 없나?'

소득이 없는 것 같다. 아니다. 한쪽에 있는 용기 안에 육포와 치즈, 그리고 소시지 통조림 몇 개가 차곡차곡 쌓여 있다. '1358'은 육포와 치즈를 몇개 자신 호주머니에 잽싸게 넣는다.

"먹을 것을 좀 찾았어."

소시지 통조림 3개, 포장된 육포 5개, 슬라이스 치즈 12개를 내놓는다.

"이건 비상식량으로 챙겨 둡시다."

요시다가 얘기했다. 하지만 '1358'은 말을 듣지 않는다. 육포 봉지 하나를 뜯어 육포를 꺼내 좌악 찢어서 냉큼 입속으로 넣는다.

"내가 발견했으니까, 맛이라도 봐야 할 거 거 아냐?"

요시다는, 웃으며 쥐포를 질겅거리는 '1358'을 바라볼 수 밖에 없다.

"쌀을 찾아보세요. 생쌀이라도 씹어야 최소한 며칠을 견딜 수 있으니까."

'1358'은 그 집을 계속 뒤져보기로 한다. 나머지 요시다와 다른 두 사람은 다른 집에서 먹을거리를 찾기로 하고 그 집을 나온다.

'1358'은 초등학교 소풍 때 보물찾기라도 하듯 집안 이곳저곳을 샅샅이 뒤진다. 1층 냉장고 근처에서 아직 뜯지 않은 5kg짜리 쌀 1포대를 발견했다. 쌀을 먹을 수 있는 지 확인한다. 군내가 나는 것 빼놓고는 먹을 만하다. 1층에는 더 이상 먹거리가 없다. 그래도 1층 구석구석을 빙글빙글 둘러본 '1358'은 호기심어린 눈으로 2층 계단을 어슬렁어슬렁 오른다. 먼지가 덮이기는 했지만 니스 칠해서 반들거리는 계단이 간혹 삐걱거린다.

2층에는 집 주인 침실과 옷방이 있다. 제법 넓은 침대를 발견한 '1358'은 일단 킁킁대며 침대와 주변 냄새를 맡는다. 주인이 떠난 지 오래된 침대에서 별 냄새는 없는 모양이다. 이번에는 침대에 몸을 던져 본다. 먼지만 풀썩일 뿐이다.

재미를 못 느낀 '1358'은 옷방으로 들어간다. 옷장에는 수트, 콤비, 바지가 종류별로 가지런히 정리돼 걸려 있다. 다른 옷장에는 셔츠, 니트, 넥타이, 양말, 속옷, 액세서리가 마찬가지로 정돈돼 있다.

그는 무슨 마음을 먹었는지 감색 수트에 하늘색 셔츠, 그리고 붉은 페이스트리 무늬의 타이를 고른다. 양말과 속옷도 챙긴다. 그리고 씻을 요량으로 욕실에서 물을 틀어 보지만 물이 나올 리가 없다. 씻기를 포기한 '1358'은 그대로 죄수복을 벗는다.

그리고 속옷, 양말부터 셔츠에 정장까지 그야말로 성장을 한다. 행운이라고 할까, 옷이 맞춘 것처럼 꼭 맞는다. 커프스 버튼까지 챙기고는 욕실에 있는 헤어크림을 머리에 바른 다음 빗질까지 가지런히 한다. 그리고 거울에 있는 성장한 자신을 보고는 만족한 표정을 짓는다.

연말연시 단골 영화 <나 홀로 집에>에서 성탄절 연휴 홀로 집에 남겨진 소년 케빈(매컬리 컬킨)은 아버지 흉내를 내면서 면도도 하고, 애프터쉐이브를 바르기도 한다.
 연말연시 단골 영화 <나 홀로 집에>에서 성탄절 연휴 홀로 집에 남겨진 소년 케빈(매컬리 컬킨)은 아버지 흉내를 내면서 면도도 하고, 애프터쉐이브를 바르기도 한다.
ⓒ 영화 <나 홀로 집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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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말연시가 되면 끊임없이 TV에 나오는 영화 <나홀로 집에(Home Alone)>에서 크리스마스 연휴를 맞아 프랑스로 온 가족이 여행을 떠났지만, 집에 남겨진 케빈(맥컬리 컬킨)이 아버지를 흉내 내며, 면도하고 애프터 쉐이브를 바르는 모습과 다름없이 순진하다.

"지금 당장 에리코와 결혼식을 올려도 되겠는 걸."


태그:#영화 계엄령, #영화 화려한 휴가, #비상 매뉴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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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a Bella Vita! 인생은 아름답다며, 글쓰기로 먹고 살기 위해 애쓰는 여러분의 이웃입니다. 세계일보, 머니투데이, 한경비즈니스, 이코노미조선 등에서 기자로 일했습니다. 2019년 '아산문학' 공모전에서 '그는 제바닷타였을까'라는 단편소설로 대상을 받고, 전업작가로 살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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