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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 오늘 하루 휴가받았다고!"

내가 마주 앉자마자 먼저 와서 나를 기다리고 있던 친구가 활짝 웃으면서 말했습니다.

"휴가?"
"엉, 휴가!"

친구의 남편은 지난해 중풍으로 쓰러져서 몸이 아주 부자유스럽습니다. 아내가 잠시라도 없으면 아무것도 할 수 없는 환자입니다. 내가 어리둥절해 하자 친구가 재빨리 말했습니다.

"글쎄, 오늘 아침에 아들 며느리가 장을 잔뜩 봐 와서 아버지 병수발은 물론 빨래, 집안일까지 자기들이 할 테니까 '어머니 마음대로 하루 보내세요'라지 뭐야!"

파마도 하고 예쁜 옷도 입었지만...

친구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
 친구의 얼굴은 지쳐 보였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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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서 친구는 두말하지 않고 그 길로 집을 나서서 동네 미장원 문을 밀고 들어갔다고 합니다. 남편이 병원에 입원해 있을 때도 그랬지만 병수발 드느라고 파마를 할 시간이 없어서 늘 한 가닥으로 질끈 묶고만 다니던 머리를 잘랐답니다. 그리고 기분 좋게 파마를 하고 나니 오래전에 잃어버린 소중한 뭔가를 찾은 기분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곱게 새로 파마를 하고 얼마 전에 딸이 사준 감색 코트를 입었지만 친구의 얼굴은 오랜 병수발에 지칠 대로 지친 안쓰러운 모습입니다. 이마에 깊은 주름이 전보다 더 뚜렷했고 몇 개 안 되던 기미도 많이 늘었습니다. 전에는 기미가 한 개씩 늘 때마다 친구는 '아이고, 어쩌지?' 하면서 부지런히 마사지를 받으러 다녔는데, 이제는 포기하고 지내는 모양입니다. 화장기도 전혀 없습니다.

"그럼 모처럼 찜질방에라도 가서 푹 쉬지 뭣하러 날 불러냈어?"
"나랑 찜질방 같이 가자. 오래간만에 수다 떨면서 푹 쉬어보자고." 

주문한 비빔밥이 오자 된장국물부터 떠먹는 친구의 눈이 유별나게 반짝입니다. 훌훌 털고 뛰쳐나온 해방감이 보입니다.

"남편이 침을 안 맞으려고 하지 뭐야. 효과를 보면서도 말야. 병원에만 다니겠다는 거야. 할 수 없이 침을 끊었지. 속상해서 죽겠어."  

친구 남편은 침을 맞으러 일주일에 두세 번 한의원에 가곤 했습니다. 한의원에 가는 일은 친구에게도 환자인 남편에게도 번거롭고 힘든 행사입니다. 큰 체구의 남편을 자리에서 일으켜 휠체어에 태워 엘리베이터를 타고 1층으로 내려와 다시 조심조심 휠체어에서 내려 승용차에 태워 가는 것입니다.

친구가 아무리 건강하고 운전이 노련하다 해도 칠순이 넘었습니다. 남편도 칠순이 넘었습니다. 남편의 눈에는 칠순이 넘은 아내의 그런 모습이 안 돼 보이다 못해 가슴이 아팠을 겁니다. 어쩌면 그래서 침을 안 맞겠다고 고집을 부렸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언제나 똑같은 일상 그리고 반복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일상은 병수발로 점철됐다.
 매일 똑같이 반복되는 일상. 일상은 병수발로 점철됐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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친구는 오래전부터 내게 속상한 사정들을 털어놓곤 했습니다. 대개 집안 이야기들입니다. 살다 보면 아들 며느리와도, 시집 간 딸아이와도 별일 아닌 일로 서로 감정이 상할 때가 있습니다.

집안에 어른 노릇을 하려면 그런 감정들을 이해해 주기도 하고 꾹 참기도 하면서 살아야 합니다. 나는 친구의 그런 이야기들을 진지하게 끝까지 잘 들어주곤 했습니다. 한 번도 이야기를 자른 적이 없습니다. 조용히 그냥 들어주기만 했을 뿐인데도 이야기를 털어놓고 난 친구는 고해성사라도 본 듯이 아주 시원해하곤 했습니다. 이번엔 아들 며느리 덕분에 자유시간을 맘껏 누리려고 단짝인 나를 불러낸 모양입니다. 

친구의 일상은 언제나 똑같습니다. 남편을 아기 다루듯 씻기고, 양치해주고, 몸에 좋다는 이것저것을 만들어 세끼 밥 먹이고, 기저귀 바꿔주고, 자주자주 몸을 뒤척여 주고, 안마도 해주고, TV도 같이 봅니다. TV를 볼 때는 일부러 크게 웃고 떠들면서 착한 말동무가 돼 준답니다.

"말이 좀 느셨어?"
"조금 늘었어. 어눌한 것도 많이 좋아졌고. 근데 미안하다는 말을 자꾸 하는 거야. 그 소리가 듣기 싫어."
"그럼 그만하시라고 하면 되잖아."
"그만하라는 말은 내가 용서해 준다는 뜻이잖아. 난 용서 못 해!"

친구의 남편은 젊어서부터 술을 좋아해서 친구의 속을 얼마나 썩여왔는지 모릅니다. 그 긴 세월 동안 월급이 온전히 입금된 적보다 친구들과 먹은 만만치 않은 술값들을 제하고 입금된 적이 더 많았다는 겁니다. 그래서 친구는 젊은 시절 내내 인척이 운영하는 식당에서 주방일을 해야 했습니다. 

"너도 알다시피 남편 퇴직금은 아들 딸 결혼비용으로 없어졌고 내가 식당에서 탄 월급을 쪼개서 적금 부은 거, 막말로 안 먹고 안 입고 악착같이 적금 부은 거, 그건 순전히 노후에 나 자신을 위해서 쓰려고 했던 건데…. 남편 치료비로 다 써버리는 중이잖아. 그게 미안하다는 건데, 아, 난 용서 못 해! 절대 못 해!"

친구의 눈에 눈물이 고였습니다. 늙어서나마 자신의 꿈을 위해 쓰려고 했던 그 돈만 생각하면 억울하고 분하고 덧없고 눈물이 막 쏟아지는 것입니다.

나는 자판기 커피를 뽑아 왔습니다. 친구는 창밖에 청명한 하늘을 바라보면서 커피 한 모금을 마십니다. 진정이 됐는지 친구는 혼잣말처럼 말했습니다.

"하늘이 이쁘네…."
"그러게 어쩜 저리 청명할까."

"날 얼마나 기다릴까!"... 친구는 황급히 뛰어갔다

친구가 일어날 채비를 합니다. 풀어놨던 머플러를 다시 목에 두릅니다. 나도 얼른 찜질방에 가고 싶습니다. 요즘 강추위에 집에만 있어서 그런지 몸이 찌뿌둥합니다. 그런데 친구가 머플러를 두르다 말고 조그맣게 부르짖는 것이었습니다. 

"아이구, 쌌겄네! 쌌어! "  
"저런! 어서 가봐, 어서!"
"기저귀는 내가 갈아줘야 해. 날 얼마나 기다리고 있을까!"

친구는 허겁지겁 핸드백을 집어 들고 식당 문을 박차듯이 밀고 밖으로 나갑니다. 친구의 눈에는 아무것도 안 보입니다. 오줌 싼 것을 아들이 알아채고 기저귀를 갈아주겠다고 할 까봐 겁을 잔뜩 먹은 남편의 딱한 모습만이 보일 뿐입니다.

남편의 치부를 아들에게 보이고 싶지 않은 그 심정을 나도 느낀 적이 있습니다. 오래전 내가 남편 병수발을 할 때의 일입니다. 남편은 아들이 옆에 있으면 이불깃을 꽉 잡고 나를 원망스러운 눈으로 바라봤습니다. 아들을 내보내면 이불깃을 놨습니다. 푹 젖은 기저귀를 바꿔 주면서 '미안해요' 하면 남편은 그냥 조용히 웃었습니다.

친구의 남편 역시 이불깃을 자유로운 한쪽 손으로 꽉 잡고는 아내가 돌아오기만을 애타게 기다리고 있을 것입니다. 창밖 멀리로 청명한 하늘을 이고 뛰다시피 종종걸음을 치는 친구의 뒷모습이 보입니다. 아까 그 푸념들은 어디에도 묻어있지 않습니다. 친구의 남편이 오래지 않아서 자리를 툭 털고 일어나게 될 거라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태그:#푸념, #기저귀, #남편의 치부, #효자 아들며느리, #휴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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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 기획편집부 기자입니다. 조용한 걸 좋아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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