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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군 위천리 88낙동강교에서 바라본 낙동강 건너 무계마을 쪽 풍경. 무계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대구, 고령, 성주를 오가는 교통 요지이자 군사 요지였다. 손인갑은 낙동강 건너 무계마을 일원에서 의병 중 처음으로 일본군을 대파했다.
 대구 달성군 위천리 88낙동강교에서 바라본 낙동강 건너 무계마을 쪽 풍경. 무계 마을은 임진왜란 당시 대구, 고령, 성주를 오가는 교통 요지이자 군사 요지였다. 손인갑은 낙동강 건너 무계마을 일원에서 의병 중 처음으로 일본군을 대파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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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 5월 2일, '조선의 서울' 한양이 일본군에게 함락당한다. 임진왜란이 시작된 4월 13일로부터 불과 20일만이었다. 부산에 상륙한 일본군은 여행을 다니는 듯한 기세로 거리낌없이 한강을 넘어섰다. 그만큼 조선군은 무기력의 극치를 보였고, 연전연패를 거듭했다.

조선군은 개전 25일 후인 5월 7일에야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승리를 거두었다. 이순신과 원균이 이끈 조선 수군은 (경상남도 거제시) 옥포 해전에서 일본군을 격파했다. 육군이 처음으로 일본군에게 승전한 것은 5월 16일이었다. 조선군 부도원수 신각과 함경도남병사 이혼은 노략질을 벌인 뒤 부대로 돌아가던 일본군 70여 명을 (경기도 양주시 백석읍 연곡리) 해유령에서 모조리 척살했다.

전쟁 발발 20일만에 서울을 빼앗긴 조선

이형석의 <임란전란사>는 4월 28일 벌어진 추풍령 전투를 최초 승전으로 평가한다. 그러나 첫 접전에서는 이겼지만 결국 '산과 들을 메운 적의 깃발과 군사와 말, 그리고 총검의 물결을 어찌할 수 없어 황간을 향하여 서서히 후퇴'한 추풍령 전투를 진정한 승전으로 보기는 어려울 듯하다. 다만 이 전투에서 정기룡은 일본군에게 포로로 잡혔던 방어사 조경을 필마단기로 달려들어 구출해냄으로써 이름을 날리기 시작한다.   

경남 합천 창의사(왼쪽)와 의령 의병박물관
 경남 합천 창의사(왼쪽)와 의령 의병박물관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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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남도 합천군 대병면 성리 539-2에 가면 합천호수를 등진 채 악견산과 마주 보고 있는 합천임란창의기념관(약칭 합천창의사)을 만나게 된다. 또, 경상남도 의령군 의령읍 충익로 1-25에서는 남천과 남산을 앞뒤로 거느리고 있는 의령의병박물관을 관람할 수 있다. 두 곳은 각각 정인홍 중심의 합천의병들과 곽재우 중심의 의령의병들을 기려 세워진 현창 시설이다.

정인홍, 곽재우와 더불어 '경상도 3대 의병장'으로 일컬어지는 김면은 경북 고령이 낳은 걸출한 의병장이다. 그 명성에 걸맞게, 경상북도 고령군 쌍림면 칠등길 138에는 김면을 기려 조성된 '김면 장군 유적지'가 있다. 하지만 이곳 유적지의 묘소와 서원 등은 합천창의사, 의령의병박물관과 성격이 다르다. 합천과 의령의 창의 시설은 그 지역 전체 의병들을 기려 건립된 것이지만, 김면 장군 유적지는 개인을 추모하고 숭앙하기 때문이다.

고령에도 합천, 의령과 같은 의병기념관이 있을까

고령에도 합천창의사, 의령의병박물관에 버금가는 임진왜란 의병 현창 시설이 있을까? <선조수정실록> 1592년(선조 25) 6월 1일자는 고령도 상당한 수준의 의병 기념관을 가질 만한 창의 지역임을 증언한다. '전 장령 정인홍이 의병을 일으켜 적을 토벌하다'라는 제목의 기사가 바로 그것이다.

이 기사는 임진왜란 의병들이 어느 싸움에서 '의미 있는' 첫 승전을 기록했는지 말해준다. 기사의 본문은 '평소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로부터 외경의 대상'이었던 정인홍이 '좌랑 김면, 전 현감 박성, 유생 곽준·곽율 등과 함께 향병(鄕兵, 의병)을 모집했는데, 전 첨사 손인갑을 중군(中軍, 핵심 장수)으로 삼았다.'로 시작된다. 손인갑은 '무용이 절륜하여 군진(軍陣, 군대의 주둔)을 달리했지만 정인홍의 명령을 받았다.' 그는 '먼저 (경상북도 고령군 성산면) 무계에 주둔한 적을 공격하여 패배시키고 군량미를 불태우고 돌아왔다.'

무계마을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강 건너편의 비슬산(가운데 흰눈이 쌓인 원경). 왼쪽 아파트 오른쪽에 달성군청이 있다.
 무계마을에서 바라본 낙동강과, 강 건너편의 비슬산(가운데 흰눈이 쌓인 원경). 왼쪽 아파트 오른쪽에 달성군청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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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사의 핵심 인물은 정인홍과 손인갑 두 사람이다. 기사는 '시골의 선비와 주민들이 평소 정인홍을 존경하고 그에게 복종하였다.(素爲鄕郡士民所畏服)'면서 정인홍의 평상시 인격을 소개한 후 손인갑의 무예가 아주 뛰어났다는 점도 기술하고 있다.

기사의 핵심 내용도 두 가지이다. 하나는 정인홍, 김면, 박성, 곽준, 곽율 등이 앞장서서 의병을 일으켰다는 사실이고, 다른 하나는 의병들의 활약 중 가장 먼저 실록에 기록할 만한 전과가 손인갑의 무계 승전이라는 것이다. 무계는 임진왜란 당시 대구, 경북 성주, 고령 사이를 오가려면 반드시 지나야 했던 요충지로, 지금도 (대구 달성군 위천 삼거리) 88낙동강교를 건너면 바로 나오는 지역이다.

당연히 1592년의 일본군도 무계 일원의 군사적 중요성을 일찌감치 깨달았다. 오늘날의 경상북도를 장악하고 있던 일본군 7군 사령관 모리휘원(毛利輝元, 모리 데루모토)은 (경북 고령) 개령현에 본부를 설치한 후 부장 촌상경친(村上景親, 무라카미 가게치카)을 무계로 보냈다. 촌상은 5월 19일 무계를 점령, 진지를 구축한 뒤 군대를 거느리고 주둔했다.

무계는 대구, 성주, 고령을 잇는 땅이자 낙동강 수로의 요충지

일본군이 무계에 그토록 신경을 쓴 것은 낙동강 물길을 이용하여 군수 물자를 원활하게 보급하려는 목적 때문이었다. 국사편찬위원회의 <신편 한국사>도 그 점을 적시하고 있다. '일본군의 주력 부대인 소서행장군이 개전 2개월만에 평양성까지 점령하였지만 (전쟁 중에 임금이 임시로 머무는) 행재소가 위치한 의주를 눈앞에 둔 상황에서 더 이상 북침을 계속할 수 없었'던 것은 '옥포해전 이후 한산도해전에 이르기까지 거듭된 해상 전투의 패배로 인해 조선측에 해상권을 빼앗기면서 보급선이 차단되기 시작했고, (경상, 전라, 충청) 삼남 지방 각지에서 봉기한 의병의 활약으로 후방이 교란당하면서 전후방의 연락망이 단절된 때문'이었다.

지금은 강둑으로 낙동강과 무계마을이 분리되어 있지만, 강둑이 쌓이기 전까지는 강물이 넘칠 때면 마을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지금도 마을의 집들 바로 앞, 동네 한복판에 연못이 남아 그 사실을 증언해준다.
 지금은 강둑으로 낙동강과 무계마을이 분리되어 있지만, 강둑이 쌓이기 전까지는 강물이 넘칠 때면 마을앞까지 물이 들어왔다. 지금도 마을의 집들 바로 앞, 동네 한복판에 연못이 남아 그 사실을 증언해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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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조수정실록>과 <신편 한국사>가 증언하는 내용처럼, 낙동강을 이용하여 군사들과 군수 물품을 실어나르려던 일본군의 계획이 좌절된 것은 무계 전투 이후부터였다. 일본군의 계획을 진작 알아챈 정인홍, 김면, 곽재우 등 경상우도 의병들은 낙동강 일원을 굳게 지켰고, 그 첫 승전이 무계에서 이루어졌던 것이다.

물론 무계에서의 승전은 왜적을 무찔러 승리의 기쁜 소식을 널리 알리고 싶었던 (경남) 합천 의병들의 굳센 의기가 낳은 결과이기도 했다. 중군장 손인갑의 능력을 크게 평가하고 있던 정인홍은 그를 무계 공격의 지휘관으로 투입했다. 그것도 일본군이 쳐들어올 때까지 기다렸다가 대항할 것이 아니라 선제 공격을 하라고 지시했다.

무계마을 유래비. 조선 중엽 오씨와 김씨 등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당시 마을 모양이 닭(鷄)이 춤추는(舞) 것과 흡사하여 무계(舞鷄)라 불렀으며, 그 후 손씨와 이씨 등이 거주하게 되면서 물가(溪)에서 번창하는(茂) 마을이라는 뜻에 무계(茂溪)라는 새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이곳에서 일본군들을 격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무계마을 유래비. 조선 중엽 오씨와 김씨 등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고, 당시 마을 모양이 닭(鷄)이 춤추는(舞) 것과 흡사하여 무계(舞鷄)라 불렀으며, 그 후 손씨와 이씨 등이 거주하게 되면서 물가(溪)에서 번창하는(茂) 마을이라는 뜻에 무계(茂溪)라는 새이름을 가지게 되었다는 등의 내용이 새겨져 있다. 그러나 임진왜란 때 의병들이 이곳에서 일본군들을 격파했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언급이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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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 의병들은 4월 13일 개전 이래 줄곧 패전 소식만 들었다. 4월 14일 부산진 전투(부산진첨사 정발 전사), 4월 15일 동래 전투(동래부사 송상현 전사), 4월 18일 밀양 전투(군관 이대수, 김효우 전사), 4월 19일 김해 전투(4명의 의사 송빈, 이대형, 김득기, 유식 전사), 4월 21일 경주 전투(일본군 무혈 입성), 4월 24일 상주 전투(이일 패주, 종사관 윤섬, 박호, 이경류, 의병장 김준신, 김일 전사), 4월 26일 문경 전투(문경현감 신길원 전사), 4월 28일 충주 전투(신립, 종사관 김여물, 충주목사 이종장, 조방장 변기 전사), 4월 28일 추풍령 전투, 4월 30일 (선조와 조정) 한양을 버리고 북쪽으로 피란, 5월 2일 한양 함락...... 

전쟁 발발 한 달 지나자 아군도 이기기 시작

그러나 5월에 들어서면서 아군이 이기기 시작했다. 5월 7일 옥포 해전, 합포 해전, 5월 8일 적진포 해전, 5월 16일 해유령 전투, 5월 29일 사천 해전, 6월 3일 당포 해전, 6월 5일 당항포 해전...... 왜적을 통쾌하게 무찔렀다는 기쁜 소식이 잇달아 의병들에게 들려왔다. 무계의 일본군과 70리(28km) 떨어진 (경남 합천) 야로에 진을 친 채 서로 맞서고 있던 합천의병의 사기가 하늘로 치솟은 것은 당연했다.

합천의병 중군장 손인갑은 본래부터 장수였다. 임진왜란 의병장들의 상당수가 선비로서 고향 장정들을 규합해 창의한 데 견주면 그는 경력이 남다른 인물이었다. 손인갑은 1544년(중종 39) (경상남도) 밀양부 서면 서가정리에서 태어나 1571년(선조 4) 무과에 급제했다. 그는 부산첨사 등을 역임한 후 1577(선조 10) 관직에 물러났고, 1597년부터 창녕군 대합면 장기리에서 자연을 벗하며 살았다.

임진왜란이 일어나 왜적들이 쳐들어왔다는 소식을 들은 손인갑은 즉시 경상감사 김수에게 달려갔다. 손인갑은 동래현령으로 임명되었지만 이미 동래가 적의 수중에 떨어진 뒤였으므로 부임하지 못하고 감사를 수행했다. (동래는 원래 부였으나 부사 송상현이 전사한 뒤 지역의 위상이 격하되어 현으로 떨어졌다.)

5월 4일, 경상감사 김수를 수행하던 손인갑은 김천역 앞에서 왜군과 마주쳤다. 뛰어난 무술 실력을 갖추고 있던 손인갑은 용맹을 뽐내며 적의 수급 열일곱을 취했고, 왜군들은 물러갔다. 김수는 정인홍에게 합천, (경남 합천) 삼가, 초계, (경북) 성주 등의 군대를 이끌 군사권을 맡기면서 (동래현감 직무 수행이 원천적으로 불가능한) 손인갑을 합천의병군의 중위장(中衛將, 중앙을 지키는 핵심 장수)으로 활약하게 했다.

정인홍 의병군이 본부를 설치했던 경남 합천 야로의 풍경(88고속도로 야로2터널 입구에서 찍은 사진)
 정인홍 의병군이 본부를 설치했던 경남 합천 야로의 풍경(88고속도로 야로2터널 입구에서 찍은 사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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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인홍 의병군은 (경남 합천) 야로 본부에서 적과 싸울 준비에 돌입했다. 당시 정인홍 의병군은 고령의병장 김응성이 이끌고 온 1천여 병사와 성주의병장 이승의 군사 등을 합쳐 3천여 대군으로 성장해 있었다. 정인홍 의병군은 초계의병 전치원, 이대기 부대와 연합하여 낙동강 물속에 목책을 박아 왜선을 격침할 태세도 갖추었다.

정인홍 의병장은 중위장 손인갑 등 지휘부들과 연이어 회의를 가진 끝에 무계를 선제 공격하기로 결정했다. '왜군의 보급로인 낙동강 수로를 차단하고, (왜군들의) 경상도 통치 거점인 성주성을 탈환하기 위한 전초전으로 무계진에 설치된 적의 병참 기지를 격파하기로(<합천임란사 2집>)' 한 것이었다.

무계부터 격파하고 이어서 성주성을 공격하기로 결정

손인갑은 6월 5일 아침부터 3백여 의병을 차근차근 이동시켰다. 이윽고 깊은 어둠이 밀려왔을 즈음, 아군은 적의 진지를 완전히 포위했다. 손인갑은 무기를 잘 다루는 50여 날쌘 병사를 직접 이끌고 적진 내로 깊숙히 들어갔다. 야습을 예상 못한 채 깊은 잠에 빠져 있던 적들은 손인갑 군의 날랜 무예 앞에서 속수무책 신세가 되었다. 아군은 순식간에 30여 적을 베었다. 적들은 황급히 조총을 쏘아댔으나 칠흑같은 어둠 때문에 방향을 제대로 잡을 수 없었으므로 허공만 어지럽혔다.

밖에서 적진을 포위하고 있던 의병들은 일제히 화살을 날리고 불덩이를 집어던졌다. 적들은 불을 끄랴, 총과 활을 챙기랴, 정신이 없었다. 장창을 꼬나쥔 적장 촌상은 여러 명 부하들에 둘러싸인 채 선두에서 전투를 지휘했다. 손인갑이 활을 날려 그 중 한 명을 즉사시켰다. 이에 촌상도 활을 쏘며 반격하기 시작했고, 피차간에 치열한 궁사전(弓射戰, 활을 쏘며 싸우는 전투)이 벌어졌다.

무계마을에서 본 달성군 화원 사문진나루 쪽 풍경
 무계마을에서 본 달성군 화원 사문진나루 쪽 풍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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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10여 발의 화살을 맞은 촌상이 병사들에게 사지가 들린 채 옮겨졌다. 그래도 나무 성채가 아니라 흙벽이었던 적군의 진지에서 불이 꺼지고, 본래 적군의 숫자가 월등히 많았던 탓에 이제부터는 기습 공격이 아니라 보통의 접근전으로 변했다. 적의 조총 부대도 탄환을 난사해댔다. 손인갑은 의병들을 철수시켰다. 소규모 기습 작전으로 수백 명의 적을 참살했으니 이만 하면 야습의 목적은 백배 달성되고도 남았던 까닭이다.

6월 6일 이후 무계의 일본군은 밖으로 나와 활동을 펼칠 엄두도 못 내고 그저 진지를 지키는 데만 전념했다. 적장 촌상도 상처를 치료하느라 한달 내내 병상에 누워서 지냈다. 7월 말 의병장 김준민이 또 다시 무계를 공격했을 때에도 적들은 방어에 몰두할 뿐 '추격하지 못하고 죽지 않은 것만 다행으로 여겼다.(<임란전란사>)' 결국 적들은 9월 11일 스스로 진지를 불태운 뒤 성주성 안으로 물러갔다.

무계마을 입구의 표지석. 임진왜란 의병 첫 승전지라는 데 대한 언급은 없고, '효마을' 세 글자만 맨 위에 강조되어 있다.
 무계마을 입구의 표지석. 임진왜란 의병 첫 승전지라는 데 대한 언급은 없고, '효마을' 세 글자만 맨 위에 강조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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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듯 무계마을은 임진왜란 의병의 첫 '의미 있는' 승전지였다. 단순히 몇 명의 적을 죽인 승리가 아니라 일본군의 낙동강 수로 이용을 차단하여 보급로를 끊음으로써 적들이 일찍 남해안으로 물러가게 만드는 데 기여했다는 점에서 무계는 매우 '의미 있는' 전승지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그러나 마을 입구 표지석 '무계리'와 동네 안 '마을 유래비'에는 이 승전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다.

무계마을 스스로는 의병 첫 전승지 자랑 않아

표지석은 임진왜란 의병 첫 전승지라는 역사적 사실 대신 '효마을' 세 글자를 마을이름 위에 새겨두고 있다. 물론 효마을 또한 당당하게 내세울 만한 마을의 자랑거리이기는 하다. 그러나 성리학을 통치 이념으로 나라를 500년 동안 유지한 조선의 세월을 감안할 때 그것은 너무나 평범하다.

마을 유래비 또한 무계 승전에 대해 아무 말이 없다. 마을의 땅 모양이 춤추는(舞) 닭(溪)처럼 생겼다고 해서 처음에는 무계(舞溪)라 불렀는데 뒷날 물가(溪)에서 번창할(茂) 마을이라는 뜻에서 무계(茂溪)로 바뀌었다는 것이 핵심 내용이다. 그리고 어떤 성씨의 사람들이 언제부터 이 마을에 거주했는지를 덧붙여 설명해줄 뿐이다.

낙동강변의 무계는 뛰어난 경치를 뽐내는 마을이다. 강둑에 오르면 비슬산이 한눈에 들어오고, 거칠 것 없는 강바람이 사람의 가슴을 시원하게 해준다. 합천창의사와 의령의병박물관처럼, 이곳에도 김면 장군을 중심으로 분투한 고령의병의 활동상과 임진왜란 전체의 역사를 보여주는 기념관을 세울 만하다. 그렇게 하면 무계(舞鷄)가 무계(茂溪)로 변한 진정한 참뜻이 확연하게 살아날 것이다.


태그:#손인갑, #김면, #임진왜란, #정인홍, #무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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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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