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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이 하사한 '어사옥비'란 무엇일까?

누가 어떤 이유로 임금이 옥으로 만든 비석을 하사했을까? 궁금한 것들을 인터넷으로 정보를 찾는 것보다 구석구석 직접 찾아가 찍어보고 눈으로 확인해 보는 것이 역사를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된다. 언제나 낯선 길은 설렌다.

창원시 의창구 북면 오체향마을로 향했다. 오체향마을은 창원시 녹색농촌 체험마을로 지정돼 봄에는 주말농장을 이용하는 사람들로 북적인다.

마을 앞 어귀에 천하대장군 지하여장군의 장승이 왠지 그리운 고향의 어미처럼 반겨줄 인상이다. 마을은 옛집들이 사라지고 전원주택으로 바뀐 것들이 많다. 카메라와 메모지를 챙겨 어사옥비로 향했다.

문화재자료 제166호 어사옥비 안내 표지판
▲ 어사옥비 안내 표지판 문화재자료 제166호 어사옥비 안내 표지판
ⓒ 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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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손들이 세운 어사옥비각의 안내석이 처음 보인다. 계단은 오랜 세월을 견디지 못해 깨지거나 금이 간 곳이 많았다. 우연히 이웃 아저씨의 이야기를 들어봤다.

"여름과 가을에는 어린이집이나 유치원에서 많이 견학을 오는데 계단에 칡넝쿨이나 풀이 계단에 덮여 올라가지 못해 견학 온 아이들은 돌아갈 수밖에 없어요." 

보수와 관리가 시급함을 알려준 것이다. 이 글을 보고 문화재 관리과에서 신경 써 주시면 좋겠다. 계단 중간에 두 개의 고목이 우뚝 서 있는 모습이 당차 보인다. 팽나무는 정우당 조치우선생이 직접 심었다고 한다. 잠시 나무를 바라보니 선생의 올곧은 마음을 심어놓을 듯 위풍당당하다.

어사옥비각 입구라고 쓰인 안내석
▲ 어사옥비각 입구 어사옥비각 입구라고 쓰인 안내석
ⓒ 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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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옥비각 입구에 있는 계단과 고목의 위용
▲ 어사옥비각 입구에 있는 계단 어사옥비각 입구에 있는 계단과 고목의 위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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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선재로 들어가는 문이 낡아 떨어지고 기왓장도 일부 깨진 것들이 있다. 대문을 들어가기가 민망할 정도다. 마당에는 잡초만 무성하게 자라 음침하다. 대나무에서 실려온 바람결에 낯선 사람이 온 것임을 알리는 모양이다. 모선재 옆 현대적으로 잘 꾸며진 것이 어사옥비각이다. 사뭇 다른 느낌이다.

어사옥비각으로 들어가는 문
 어사옥비각으로 들어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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창녕조씨 문중의 묘실인 모선재
 창녕조씨 문중의 묘실인 모선재
ⓒ 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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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옥비각 안내 표지판을 자세히 들여다봤다. 스마트폰으로 검색해 보니 문화재자료 제166호로 지정된 어사옥비(御賜玉碑)는 임금이 내린 옥으로 만든 비석이라는 설명이 적혀 있다.

어사옥비의 안내문
 어사옥비의 안내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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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그렇다면 임금이 누구에게 왜 내렸는지 알아봐야 한다. 내용인즉 이 옥비는 청백리로 추천되어 관리로 뽑힌 조선 중종 때 문신 정우당 조치우(曺致虞) 선생에게 중종이 내린 옥비.

조치우 선생은 대구부사, 예천군수 등을 지냈는데 재임하는 동안 청렴결백하고 선정을 베푼 목민의 치적이 뛰어난 청백리의 관료로 기록될 만큼 깨끗하고 근검한 선비였다. 늙은 어머니를 모시는 효심 또한 지극하여 임금이 소학(小學)을 내렸고 그 뒤에 옥비(玉碑) 두 개을 하사했다고 전해진다.

그 하나는 조치우 선생에게 내린 청옥이며 또 하나는 선생의 부인 숙인 창원박씨에 내린 백옥이다. 임금에게 옥비를 하사받는 일은 드물다. 순백색 반투명의 돌로 조치우의 청렴하고 효심이 지극함이 그의 부인도 내조와 소박한 생활들이 임금을 감동시켰을 것으로 사료된다.

어사옥비각
 어사옥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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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타깝게도 청옥비는 조치우 선생의 묘가 있는 경북 영천군 대창면 대재리 유후재(遺厚齋) 내에 있는 비각에 보존돼 있다. 백옥비는 부인의 묘가 있는 오체향마을에 있다. 부부의 비가 왜 떨어졌을까? 이런 의문이 든다. 이유인 즉, 원래 북면 대한리에 함께 있던 것을 문중에서 파손이나 도난을 우려하여 지금의 장소로 옮겼다. 어사옥비각으로 들어가는 문이 좁다. 고개 숙여 겨우 들어갈 정도다.

갓으로 쓴 지붕 모양의 가첨석과 비문을 새긴 비석의 몸체인 비신을 한 돌로 만든 것이 다른 비석과 다름을 짐작한다.

비석에는 '어사옥비(御賜玉碑)'라는 글자와 '숙인창원박씨지묘(淑人昌原朴氏之墓)'라고 새겨져 있다. 일반 묘비와 높이는 같아도 옥이라는 쓰임새가 달라 일반인도 한눈에 식별이 가능하다. 산기슭에 있는 옥비를 문중에서 모선재 쪽으로 옮겨오던 중 옥비 오른쪽 밑둥이 깨져 약간의 보수한 부분이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 들었다.

어사옥비 중 숙인 창원박씨의 백옥이다.
 어사옥비 중 숙인 창원박씨의 백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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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옥비각에 나와 보니 햇살에 비친 모선재의 추감당이라는 글자가 희미하게 창살에 비친다. 문이 잠겨 들어가지 못 했다.

매년 음력 3월 첫 정일(丁日)에 창녕조씨 문중 사람들이 찾아와 제향을 지낸다고 한다. 봄이 오면 마당에 목련화가 피고 뒷산에는 진달래가 곱게 필 생각에 절로 이곳이 좋아진다.

모선재와 어사옥비각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다.
 모선재와 어사옥비각이 나란히 마주 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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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산에 오르면 숙인 창원박씨 묘가 있다. 그러나, 선생의 묘소는 영천시 대창면에 있다. 보통 부부의 묘는 같이 있는 것이 관례인데 왜 떨어져 있는지? 과거로 되돌아가 한 번 되짚어 보고 싶은 생각이 든다.

문중이 세운 선무원종공신군자감판관 창녕조공위이임지묘단비
 문중이 세운 선무원종공신군자감판관 창녕조공위이임지묘단비
ⓒ 강상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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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사옥비의 감춰진 비밀은 풀었지만, 선생과 그의 부인 간의 옥비는 왜 그렇게 멀리 떨어져 있을까? 이런 의문이 머릿속에 떠나지 않는다.

조치우 선생의 깨끗하고 근검한 생활과 효심이 지극한 마음은 임금도 감동했고 후손들에게도 좋은 가르침을 주었다.

목민으로써 청렴결백하고 선정을 베푼 선생의 청백리 정신은 오늘날 공직자가 지녀야 할 진정한 덕목임을 잊지 말고 되새겨보는 시간은 소중함의 정신적 문화유산이 된다.


태그:#어사옥비, #청옥, #조치우, #창원박씨, #백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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