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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청춘> 노랫말 중에서)

코끝이 싸아 해지고 눈앞이 뿌옇게 흐려진다.

요즘 나는 이 노래를 하루에도 수십 번씩 듣는다. 그럴 때마다 가슴이 먹먹해져서 툭하면 눈시울이 빨개지곤 해서 남편이나 아이들을 당황하게 만들곤 한다. 특히 남편은 내가 감정에 치우친다며 이 노래를 듣지 못하게 은근한 압력을 주기도 한다.

곰곰이 생각해본다. 왜 이렇게 가슴이 먹먹해지는지,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나도 나이 들었다는 것을, 지나가버린 내 청춘을 그리워하고 있다는 것을, 그 청춘이 눈부시게 아름다웠다는 것도….

1980년대는 나의 20대가 오롯이 담겨있는 때였다. 여기에 나의 사랑이 더해져 정말이지 아름다운 시절이었다.

콧대 높던 나... 사랑은 아마추어였다

나는 얼굴을 보지도 않고 데려간다는 셋째딸로, 우리 동네에서는 요즘 말로 '얼짱'으로 콧대 높은 아가씨였다. 덕분에 집으로 오는 길은 늘 누군가 따왔고 오빠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뿐인가? 좌석버스 운전기사의 남다른 배려로 버스요금을 내지 않고 타고 다녔다. 반면 나는 높아진 콧대만큼 그 누구에게도 눈길을 주지 않아 사랑에 대해서는 아마추어였다. 그러다가 대학교 4학년 때 친구의 소개로 지금의 남편을 만났고, 5년 동안 지독한 사랑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남편을 만났던 곳이 신사동 사거리에 있는 '난다랑'이었다. 당시에 난다랑은 커피 전문점으로 호텔의 커피숍이나 일반 다방과는 차별적으로 젊은이들에게 인기 있었다. 길가 건물 2층에 자리 잡고 있는 난다랑은 남편의 직장에 가까웠고 퇴근 시간이 일정하지 않아 늘 내가 먼저 기다려야 했다. 

젊다는 것 하나만으로도 가진 것은 없어도 마냥 즐거웠던 그때, 남편을 만나는 일은 내게 전부가 돼버렸다. 1시간이고, 2시간이고 마냥 기다리면서고 남편이 내 손을 꼭 잡아주면 기다리느라 지루했던 시간들은 모두 잊어버리고 말았다.

기다렸던 결혼 승낙, 되레 눈물이

그렇게 바라던 결혼 승낙이었는데, 눈물이...
 그렇게 바라던 결혼 승낙이었는데, 눈물이...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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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게 5년 넘게 남편을 만나면서 결혼하기까지 정말 힘들었던 시간도 많았었다. 유난히 어머님께 효자 노릇을 하던 남편은 며느리감으로 나를 반대하시던 어머님께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고, 그런 남편을 보며 원망도 많이 했었다. 결국 나 혼자 어머님께 찾아가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눈길 한 번 주시지 않는 어머님께 잘못했다는 말을 수없이 되풀이해야 했다. 다리가 저려서 휘청거리며 집을 나서면 마당에는 하얀 목련꽃이 피어 있었다. 눈이 부시게 하얀 목련꽃을 보며 울기도 참 많이 울었었는데….

그런 날이면 나는 으레 난다랑에 들러 마음을 추스르곤 했다. 빨개진 눈시울로 엄마를 마주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전에는 아버지·엄마도 지금의 남편을 썩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셨지만, 나를 믿으신다며 넘어갔는데 상대방의 집에서 나를 극구 반대한다는 사실을 알고 나서는 참았던 서운함을 나타내곤 하셨다.

그럴수록 나는 알 수 없는 오기까지 생겨 꼭 결혼 허락을 받겠다는 치기어린 결심으로 남편의 집인 청담동으로 향했다. 반면 시어머님께서는 남편과 내가 본은 다르지만 성이 같아 문중에서 허락을 해주지 않는다는 이유를 내세웠지만 그보다는 며느리 감으로, 사돈댁으로 만족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하루, 이틀, 사흘…, 일주일이 지나고…. 그렇게 시간이 흐르면서 나는 점점 더 지쳐갔고 남편의 조바심은 커져만 갔다.

"오늘 저녁때 큰 형이 보자고 해서 8시에 만나기로 했어. 난다랑으로 와. 그리고 오늘은 엄마한테 가지 말고. 그동안 수고했어."

거의 한 달이 되어갈 무렵 걸려온 수화기 속의 남편 목소리는 살짝 떨리고 있었다. 그날은 왜 그렇게 시간이 더디게 가는지, 또 왜 그렇게 버스는 자주 오는지, 그리고 난다랑으로 올라가는 계단은 다른 때보다 더 많게만 느껴지는지….

"막내한테 이야기 들었어요. 어머니한테도 집에 온다는 말도 들었고. 그렇다고 언제까지 이렇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고. 해서 말인데 이제 그만 와도 될 것 같아요. 내가 어머니를 이해시킬 테니. 대신 두 사람 결혼하면 끝까지 잘 사는 모습 보여줘야 해요."

갑자기 눈물이 쏟아졌다. 그동안 결혼 승낙을 받게 되면 기쁨의 웃음을 지으리라 생각했었는데 나는 울고 있었다. 기쁨보다는 알 수 없는 회한과 설움으로….

지금 그 자리에 그 카페는 없지만...

1988년 봄, 나는 꿈에 그리던 결혼식을 올렸다.

강산이 두 번 바뀔 만큼의 세월이 흐른 지금, 나는 쉰을 훌쩍 넘긴 나이로 살아가고 있다. 만만치 않은 세상살이를 하다 보니 그동안 내 삶을 돌아볼 여유조차 갖기 못한 채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내 의지대로 살아온 날보다는 내 의지와는 상관없이 살아지는 날을 보내는 요즘, 문득문득 그 때를 떠올리게 된다.

언젠가 신사동을 지나다가 난다랑이 있던 자리를 보니 다른 식당으로 바뀌어 있었다. 그게 당연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으면서도 한참동안 눈길을 거두지 못한 것은 아쉬움이나 미련과는 상관없이 그때의 기억을 되짚어보며 그때의 나를 만나는 소중함 때문이었다.

그리고 깨닫게 된다. 난다랑이 그 자리에 없어도 내 가슴 속에 자리 잡고 있는 것처럼 내 청춘은 사라진 게 아니라 내 가슴 속에서 살아 숨 쉬고 있다는 것을, 내가 부르면 언제라도 응답해준다는 것도….

유난히 힘들었던 한 해를 보내면서 지쳐버린 몸과 마음을 다독여본다. 향긋한 커피 내음에 묻어나는, 눈이 부시게 아름다운 내 청춘을 마주하며….

"언젠간 가겠지. 푸르른 이 청춘, 지고 또 피는 꽃잎처럼…."

덧붙이는 글 | 응답하라 1988 응모글



태그:#응답하라 19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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