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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 대선에서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74세 할아버지 정치인 버니 샌더스는 상당히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그는 대놓고 자신을 '사회주의자'라고 지칭한다. 그의 정치적 텃밭은 미국에서 상대적으로 보수 성향이 강한 버몬트 주다. 인종차별 철폐운동과 시민운동을 거쳐 정치에 입문한 이래 지금까지 일관되게 '풀뿌리 정치혁명'을 주장해왔다.

1972년 첫 번째로 출마한 상원의원 선거에서 2.2%의 득표율로 낙선했으나, 그로부터 40년 후 2012년 상원의원 선거에서 무려 71%의 득표율로 당선됐다. 정계에 입문한 이래 벌링턴 시장 4선, 연방 하원의원 8선, 연방 상원의원 2선을 거치는 내내 그는 '무소속'이었다.

사회주의자, 40년 넘게 한 지역에서만 붙박이 정치활동, 무소속, 대선 후보, 74세라는 나이까지, 버니 샌더스는 한국사회 통념으로는 도무지 해석이 안 되는 인물이다. 무소속인데 게다가 사회주의자? 한국사회였다면 여의도 땅을 밟아보지도 못하고 좌절당했을 것이다.

일시적으로 신선한 바람을 일으킬수는 있겠지만, 그것을 무려 40년 이상 지속하며 한 지역에서 정치인으로 승승장구하다니 놀랍지 않은가. 

'샌더스 돌풍'에서 무엇을 배울 것인가

2015년 10월 14일, 미국 민주당 대선 TV토론 장면. 왼쪽이 버니 샌더스.
 2015년 10월 14일, 미국 민주당 대선 TV토론 장면. 왼쪽이 버니 샌더스.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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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엇이 이것을 가능하게 했을까. 그의 정치 인생을 들여다 볼 수 있는 자서전 <버니 샌더스의 정치 혁명>에서 우리는 '샌더스 식 정치'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

대선 출마 선언 직전 여론조사에서 힐러리 클린턴의 지지율 61.6%에 한참 뒤진 8.7%로 시작했으나 지금은 클린턴에 맞서는 가장 강력한 대항마로 부상한 74세의 민주사회주의자. 무엇보다 오늘 버니 샌더스를 이야기하는 것은 '절망의 언어'가 되어버린 한국 정치가 '희망의 언어'를 되찾기 위해 작은 실마리 하나 발견하고픈 마음 때문이다.

"민주사회주의랑 주당 40시간 이상 일하는 국민이라면 누구나 빈곤에서 벗어나야 한다고 주장하는 것입니다. 최고 부유층 15명이 하위 40퍼센트 국민보다 많은 부를 소유한 체제는 뭔가 잘못되었다고 외치는 것이며, 아이들의 급식과 빈곤층에 대한 지원을 줄이면서 부자들의 세금을 깎아주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라고 말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나라의 정부는 중산층과 빈곤층을 위해 훨씬 더 많은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이 바로 민주사회주의입니다." (9쪽)

샌더스는 항상 선거에서의 승리, 그 이상을 원했다. 정치인이라면 선거에서의 승리 이상의 무엇인가를 정치 활동의 목표로 삼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공개적으로 표방한 자신의 정치노선인 '민주사회주의'를 일관되게 고수해왔다.

정치노선을 보면 그 정치인이 정치 활동의 목적을 무엇에 두는가, 대중에게 보여주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가를 알 수 있다. 자서전을 보면 샌더스가 정치의 본질과 역할에 대해 대단히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음을 알 수 있다.

자신의 정치를 '투쟁의 정치'라고 밝힌 샌더스는 "정치란 가치와 비전, 그리고 무엇보다 신뢰에 뿌리를 둔다"고 했다. 그는 "권력의 전당 바깥에 존재하는 시민을 위해 싸워줄 누군가가 권력의 전당 내부에 존재함을 말해주는 일"이야말로 정치의 사명이라고 봤다.

시민들은 누군가 자신을 위해 싸우고 있다고 인식할 때 고무되며 더 큰 요구를 하고 행동에 나선다. 그랬을 때 선거에서 이기는 일 이상의 '정치 세력'을 형성한다. 시민들이 정치 세력을 형성했을 때 자신의 삶터와 국가, 나아가 세계를 변화시킬 수 있다.

샌더스는 "정치혁명은 억만 장자나 정치 권력층이 일으키는 게 아니다. 일자리를 위협받는 노동자들, 빚에 허덕이는 학생들, 고정된 수입으로 쪼들리는 은퇴자들, 더 이상 참지 못하겠다고 외치는 아웃사이더들, 그리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조직화하고 선거운동을 하고 투표에 참여해야 한다는 사실을 깨닫는 사람들이 일으킨다"(27쪽)고 했다.

그는 "진보진영의 행동강령을 최대한 간단히 말하자면, 우리는 모든 미국인이 적정한 보상을 받는 일자리를 갖기 전까지는 이 나라가 우리가 기대하는 모습을 달성했다며 만족할 수 없다"(347쪽)고 했다.

샌더스가 보기에 미국의 민주주의는 위기다. 민주주의 절차에 대한 냉소주의가 팽배하고 민주적인 변화 가능성에 대한 믿음이 그 어느때보다 위협받고 있다. 샌더스는 "미국의 민주주의가 '과두체제'가 될 위험에 처했다"고(337쪽) 진단한다.

빈곤층은 정치에서 소외되고 민주주의 밖으로 밀려나고 있다. 청년들은 정치에 대한 희망을 버렸고 자신의 미래와 정치는 관련이 없다고 여긴다. '1인 1표'의 개념은 거대 자본의 영향력에 뿌리 뽑혔고 돈은 곧 권력이 된다. 시민들이 정치를 외면하는 만큼 권력은 소수에게 집중된다.

한국의 상황은 더 하다. '헬조선'의 현실은 나아질 기미가 없다. 정치는 절망의 언어가 되었다. 대통령과 집권여당의 연이은 실정에도 불구하고 지지율은 철옹성인데, 반대편에서 싸워야 할 야당은 '자중지란'에 빠져 지리멸렬하고 무기력한 모습으로 일관한다.

진영 논리에 갇힌 공허한 담론과 추상적 이념의 언어만이 난무한 가운데 정치 혐오와 냉소주의가 팽배해져간다. 정치가 대변해야 할 노동자, 서민들은 정치의 바깥으로 밀려나고 하층배제적이고 상층편향적인 구조가 고착된다.

대의 민주주의에서 시민은 정치적 대표를 통해 자신의 요구를 표현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민주주의 실체적인 성과는 정치적 리더십이 좌우한다. 설사 '아웃사이더'라는 소리를 듣는다 하더라도 샌더스처럼 정치적 신념을 일관되게 지키는 정치인을 찾아보기 힘들다는 것이야말로 한국 정치의 큰 불행이다.

불안정 노동과 해고 위협에 시달리는 노동자들과 고생해서 지은 농산물을 갈아엎어야 하는 농민, 물고 태어난 수저 색깔에 따라 등급이 매겨지는 현실에서 고통받는 청년들, 사회경제적 삶을 위협받는 대다수 시민들이 바로 정치가 외면한 '아웃사이더'들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진보적이고 민주적인 미래로 나아가 수천만 명의 미국인이 적극적으로 정치적 절차에 관여하고 그들의 권리와 그들 자녀의 권리를 당당히 주장하는 날이 오면, 의회 의원 대다수는 비로소 부유층이 아니라 보통 사람의 이익을 대변하게 된다는 희망이 나를 지탱한다. 그런 날이 오면 나 역시 더 이상 하원의 아웃사이더 취급을 받지 않게 될 것이다. (361쪽)

한국 정치, '여의도' 밖으로 행군하라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 표지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 표지
ⓒ 원더박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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샌더스는 벌링턴 시장을 거쳐 미 의회에 진출했을 때에도 지역에서의 활동을 소홀히 하지 않았다. 그는 의정 활동 대부분을 지역구에서 발품 파는 것으로 보냈다. 샌더스는 버몬트 주 지역사회를 돌며 한 가지 사안을 집중 토론하는 마을 주민회의 열고 다양한 의제들에 대해 시민들과 토론을 벌였다.

샌더스는 청중과의 격식없는 토론을 선호했고 시민들과 함께 대안을 모색했다. 이런 토론은 장기적이고 집중적이었으며 교육적 효과도 탁월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버몬트 주민들은 샌더스 하면 '복잡한 문제에 대한 진지한 토론'을 떠올리게 되었다고 한다.(374쪽) 이것이 공화당의 아성인 버몬트 주를 진보의 요새로 탈바꿈시킨 비결이다.

많은 정치인들이 풀뿌리 민주주의의 중요성을 역설하지만 실제로는 '여의도 정치'에 올인하는 이중적인 행태를 보인다. 선거에 당선되고 나서는 지역 주민에게 내세웠던 공약을 '나몰라라' 한다.

큰 행사에 초청하지 않으면 국회의원 얼굴 한번 보기 힘든 풍토에 유권자들은 배신감을 느낀다. 유지 비용이 많이 들고 부패의 온상이 될 수 있다는 이유로 지구당을 해체해버리는 한국의 정치 현실에서 풀뿌리 정치가 꽃 피길 기대하기는 힘들다. 

샌더스는 '풀뿌리 정치혁명'을 꿈 꿨다. 그는 "혁신적인 미래를 건설하려면 혁신적인 운동을 구축해야 한다"(360쪽)고 했다. 풀뿌리 현장은 혁신적인 운동의 진원지이자 지속가능한 정치혁명을 추동하는 '화수분'이다.

민주주의를 복원하고 대안이 되고자 하는 정치인이라면 마땅히 여의도 울타리 밖으로 눈을 돌려야 한다. 그곳에 정치가 대변해야 할, 간절하게 '좋은 정치'를 원하는 대다수 민중이 있다.

나는 버니 샌더스처럼 우리 정치를 구원할 '아웃사이더'들이 분명히 있다고 믿는다. 샌더스를 보라. 변방은 주류를 전복한다. 희망은 여의도 밖에 있다.

○ 편집ㅣ최은경 기자

덧붙이는 글 | <버니 샌더스의 정치혁명> (버니 샌더스 지음 / 원더박스 펴냄 / 2015.12. / 1만8000원)

이 기사는 이민희 시민기자의 개인 블로그(http://blog.yes24.com/xfile340)에도 함께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본인이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버니 샌더스의 정치 혁명 - 버니 샌더스 공식 정치 자서전

버니 샌더스 지음, 홍지수 옮김, 원더박스(2015)


태그:#버니 샌더스, #미국 대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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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시골 농촌에서 하루 하루 잘 살기 위해.

오마이뉴스 편집기자. 시민기자 필독서 <아직은 좋아서 하는 편집> 저자, <이런 질문, 해도 되나요?> 공저, 그림책 에세이 <짬짬이 육아>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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