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2015년 여름, 유다정과 양수빈은 인턴으로 평화네트워크의 식구가 되었습니다. 대학 졸업을 앞둔 둘은 대표님의 우연한 제안으로 '해방·평화 70년 기념 평화 기행'에 합류하게되었습니다. 2015 평화기행은 참여연대, 역사문제연구소, 인권재단 사람, 한반도 문제를 걱정하는 학자 모임 ASCK (Alliance of Scholars Concerned about Korea)등의 시민단체, 학술단체가 주최했습니다. 8월 8일 학술행사를 시작으로, 총 3일 간 안산, 서울, 철원, 양주 등지를 돌며 한반도의 해방과 분단 이후 70년, 질곡의 역사를 되돌아보는 시간을 가졌습니다. 이번 평화기행은 두 새내기 인턴들이 평화에 대해 생각해 보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또한 앞으로 이어질 2편의 기사를 통해 다른 시민들과 이 경험을 나누고자 합니다.  - 기자말

416 기억전시관 전경
 416 기억전시관 전경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416 기억전시관 입구의, 희생자 아이이들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는 공간
 416 기억전시관 입구의, 희생자 아이이들에게 편지를 전할 수 있는 공간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이전 기사 : 분단 70주년, 한반도의 현재와 미래를 말하다)

지난 9일, '해방·분단 70년 기념 평화 기행'의 첫 목적지는 안산의 416 기억 전시관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는 길에, <뉴스타파>가 제작한 세월호 1주기 다큐멘터리 '참혹한 세월, 국가의 거짓말'을 보았다. 여느 때보다 일찍 일어난 터라 피곤했지만, 그냥 잘 수만은 없어 보다가, 잠이 들었다. 다큐멘터리를 보는 내내, 세월호 참사 관련한 미안함, 수치심, 무력감, 분노, 답답함, 등등이 다시 느껴졌고, 사실 이 감정들이 두려웠다.

그렇게 1시간 30분을 달려 안산의 416 기억전시관에 도착했다. 416 기억저장소는 흰색의 다세대 주택들 사이에 있었다. 지하엔 교회가 있고, 2층엔 PC방이 있고, 간판들로 덕지덕지 한 흔한 상가 건물. 그 안에 기억 전시관이 있었다.

참으로 사소한 유품들 그래서 울컥하는 마음

416 기억전시관에서는 <내가 이웃이 될때> 라는 주제로 찰흙집 짓기, 옷 천연 염색 등의 워크샵 및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416 기억전시관에서는 <내가 이웃이 될때> 라는 주제로 찰흙집 짓기, 옷 천연 염색 등의 워크샵 및 전시가 진행중이었다.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전시관 천장의 고 김운기군의 페인트 통에는, 그가 쓰지 못했던 인감도장이 들어있다.
 전시관 천장의 고 김운기군의 페인트 통에는, 그가 쓰지 못했던 인감도장이 들어있다.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고 범수 군의 쓰지 못했던 노잣돈 1만 원.
 고 범수 군의 쓰지 못했던 노잣돈 1만 원.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기억 전시관 천장에는 바닥이 뚫린 페인트 통에는 유족들이 보내준 단원고 희생자들의 유품이 담겨있었다. 고 김운기군의 페인트 통에는 받지 못했던 인감도장이, 그리고 고 김범수군의 페인트 통에는 다 쓰지 못한 노잣돈 1만 원이 담겨 있었다. 슬픔보다는, 낯설고 이해하기 어렵다는 생각이 들었다. 왜 저 돈이, 저 인감도장이 저기 들어있어야 할까. 여느 고등학생의 것이 분명해 보이는 까만 뿔테 안경, 해맑은 표정의 사진 등 사물함이나 서랍에 들어가 있어야 할 저 물건들이 '유품'이 되다니.

게다가 매니큐어나 아이라이너 등 화장품이 들어있던 통을 보면서, 우리가 20살이 되어 겪었던 많은 일이 스쳐 지나갔다. 그동안 색별로 많은 아이라이너, 아이 섀도, 혹은 립스틱을 친구들과 서로 발라주며 웃던 기억들…. '이런 사소한 것들조차 겪지 못하고 가버렸구나!'하는 생각이 들었다. 울컥했다. 평화네트워크의 인턴으로서, 나름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라는 타이틀을 달고 기사를 써보겠다며 굳게 먹었던 마음이 희생자들을 생각하니 왠지 와르르 무너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리고는 건물을 나와, 옆에 나란히 서 있는 가로숫길을 직진하다가 좌회전, 총 5분의 거리를 걸은 후에 단원고에 도착했다. 햇살이 아주 뜨거웠다. 방학을 맞은 학교는 조용했고, 3학년이 되어야 했을 2학년 1반부터 10반 아이들의 예전 교실들은 더더욱 적막했다. 김종천 기억저장소 사무국장님이 반마다 돌아다니며 희생자 수, 생존자 수, 그리고 4월 16일 구조의 상황, 생존자 아이들의 현황에 대해 상세히 말씀해 주셨다.

단원고 실내.
 단원고 실내.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각지에서 보낸 단원고 희생자들을 위한 위로와 애도, 다짐의 메시지들.
 각지에서 보낸 단원고 희생자들을 위한 위로와 애도, 다짐의 메시지들.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단원고 희생자 교실 모습. 화환, 방명록 등으로 가득하다.
 단원고 희생자 교실 모습. 화환, 방명록 등으로 가득하다.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우리의 투어에 와주신 2학년 5반 고 김초원 선생님의 아버지 김성욱님을 통해 기간제 교사였기에 순직을 인정받지 못하는 김초원 선생님의 답답하고 억울한 상황 또한 들을 수 있었다. 국적에 상관없이 교실 하나하나를 돌아보는 참가자들의 눈시울은 이내 붉어졌다.

2014년 4월 16일, 우리는 304명의 생명이 고의인지 무능인지 혹은 두 개 다인지 알 수 없는 이유로 목숨을 잃는 것, 구조하지 못하는 것을 생중계로 지켜보았다. 선장, 해경, 정부, 언론 모두가 국민에게 총체적 실망을 안겨준 하루였다. 세계 경제 규모 11위라는 대한민국에서 일어날 수 있는 일인가, 모두가 자기 일처럼 분노하고 슬퍼했다. 거의 2달 만에 국민에게서 세월호 진상 규명을 위해 350만의 서명을 받았다. 그 후로 몇 개월 동안은, 정말 온 국민과 온 매체는 SNS의 노란 리본 프로필 사진으로, 세월호를 기억하고 세월호 이야기만 하면 울었다.

그러나 어느샌가 세월호 유가족들은 아이들 죽음을 빌미로 보상금과 대학 입시 특혜를 요구하는 사람들로 왜곡됐다. 세월로 특별법은 유가족이 요구했던 내용으로 제정되지 않았고, 세월호 특별 조사위원회는 독립적인 수사권과 기소권이 없어 정부의 제한을 받게 되었다. 이런 식으로 1년이 지났고, 아무것도 밝혀지지도, 개선되지도 않았다.

세월호 1년, 바뀌지 않고 반복되는 참사의 역사

기간제 교사로 2학년 5반의 담임을 맡았던 고 김초원 선생님의 교무실 자리. 김초원 선생님은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순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기간제 교사로 2학년 5반의 담임을 맡았던 고 김초원 선생님의 교무실 자리. 김초원 선생님은 기간제 교사라는 이유로 순직 인정을 받지 못하고 있다.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안산 합동 분향소 전경
 세월호 참사 희생자들을 위한 안산 합동 분향소 전경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300여 명이 죽는 것을 생중계로 보고, 그 이후의 과정들을 지켜보며 우리는 무기력증과 신경증을 앓았던 것 같다. 누군가가 죽어가고 구조되지 못하고 있는데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는 무력감과 농성과 시위가 이어졌지만 개선되는 것이 없는 것을 보며 느끼는 허무함. 이것은 일상의 피로와 합쳐져 지겨움과 짜증이 되었다. 세월호 참사의 아픔을 기억 못 하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상기시키는 나의 무력함과 게으름을 마주하기 싫을 뿐. 단원고와 합동 분향소를 돌며, 안산으로 향하며 들었던 착잡한 마음이 좀 정리되는 듯했다.

이 날 안산 투어를 마지막으로 안산 합동 분향소에서 추모한 후, 고 박성호군의 어머니 정혜숙님, 그리고 고 유예은 양의 아버지 유경근님의 설명을 통해, 세월호 참사가 어떻게 진행되고 있는지 들었다. 유가족들이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해 발이 휘고, 시력이 급속도로 안 좋아지고, 이가 빠진다는 등의 이야기들, 그리고 생존자 학생 중 벌써 3명이 자살시도를 했다는 등의 이야기를 들었다. 아이들의 죽음을 개인적 비극을 벗어나 사회의 문제로 받아들이고 그것의 해결을 위해 애쓰시는 세월호 유족 가족들의 모습에 깊은 인상을 받았다.

의릉 전 중앙정보부 강당 앞 팻말.
 의릉 전 중앙정보부 강당 앞 팻말.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의릉 전 중앙 정보부 강당 모습. 이 곳에서 7.4 남북한 공동 성명이 있었다.
 의릉 전 중앙 정보부 강당 모습. 이 곳에서 7.4 남북한 공동 성명이 있었다.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그 후 다시 서울로 이동했다. 의릉 전 중앙정보부 강당이 있었던 그곳을 방문하고, 서대문 형무소를 돌았다. 일제 강점기 때는 독립 운동가들을 투옥하고, 1987년까지 독재 정권 시에는 민주화 운동가들이 투옥되었던 그곳.

해방과 분단 이후 70년. 긴 역사를 놓고 보면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시간이다. 첫날 기행을 보며, 한반도 역사에 있었던 큰 의제들을 놓고 몸과 마음을 던져 씨름하고 아파했던 사람들의 흔적을 보았다. 20세기 초 한국의 독립을 위해 싸웠던 독립투사들, 민주화를 위해 싸웠던 분들, 그리고 사회의 황금만능주의, 안전불감증 등의 병폐로 인해 희생된 아이들을 잊지 않으며 진상 규명을 통해 더 안전한 사회를 만들려는 세월호 참사 유가족분들까지.

우리의 평화가 수많은 사람의 노고에 빚지고 있다는 생각에, 숙연해지는 하루였다.

서대문 형무소 박물관 전경.
 서대문 형무소 박물관 전경.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서대문 형무소 박물관 내 전시물.
 서대문 형무소 박물관 내 전시물.
ⓒ 평화네트워크

관련사진보기


덧붙이는 글 | 양수빈·유다정 시민기자는 평화네트워크의 인턴으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태그:#광복70년, #광복70주년, #서대문형무소, #세월호, #중앙정보부
댓글

평화네트워크는 '평화를 만드는 작지만 큰 힘'이 되겠다는 목표를 가지고 반전, 반핵, 군축, 통일 위한 적극적인 평화를 실현하기 위한 평화운동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