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법치국가에서 법률은 모든 국가작용의 근거가 된다. 그래서 법률의 제·개정 및 폐지는 국회의 가장 중요하고 본질적인 권한이다. 19대 국회의원들이 지난 2013년 6월까지 발의한 법안 4622건 중 295건만 가결됐다. 철회·폐기된 것을 제외한 나머지 3869건 중 상당수도 충분한 논의가 진행되지 못하고 있다. <오마이뉴스>는 이들 중에서 "제법이네"라는 말이 나올 만큼, 실생활 속의 가려운 곳을 긁어주거나 사회의 불합리한 부분을 바로잡는 '제대로 된 법안'들을 찾아내서 생생한 현장과 인터뷰를 통해 소개한다. [편집자말]
일명 '태완이법'으로 알려진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이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직후 해당 법안을 대표발의한 서영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일명 '태완이법'으로 알려진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를 내용으로 하는 형사소송법 일부개정법률안이 24일 국회 본회의에서 통과된 직후 해당 법안을 대표발의한 서영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이 국회 정론관에서 기자회견을 하고 있다.
ⓒ 남소연

관련사진보기


1999년 5월 대구에 사는 5살 김태완군이 학습지 공부방으로 가는 길이었다. 한 남성이 다가와 태완이 얼굴과 몸에 황산을 쏟아 부었다. 전신 3도 화상을 입은 태완이는 49일 동안 사투를 벌이다 세상을 떠났다. 용의자는 현재까지 찾지 못했다. 태완이의 부모는 자식의 억울함을 풀기 위해 노력했지만, 공소시효(당시 기준 15년)가 만료돼 영구미제 사건으로 남게 됐다. 

태완이가 세상을 떠난 지 16년 만에 제2의 '태완이 사건'을 막을 수 있는 계기가 마련됐다. 살인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형사소송법개정안이 24일 국회 본회의를 통과하면서다.

이번 개정안 통과로 현재 25년으로 규정된 형법상 살인죄 공소시효는 사라진다. 이와 더불어 2003년 '포천 중학생 납치살인사건', 2004년 '화성 대학생 살인사건', 2006년 '서울 노들길 살인사건' 등 영구미제가 될 가능성이 높았던 사건들의 공소시효도 사라져 범인을 끝까지 추적할 수 있게 됐다.

일명 '태완이법'은 2012년 법무부가 발의한 정부안과 지난 2월 서영교 새정치민주연합 의원(국회 법제사법위원회 소속)이 발의한 법안을 병합한 대안이다. 법무부는 장애아동 및 14세 미만 성폭행 범죄의 공소시효가 폐지되자, 법 적용 형평성 차원에서 형법상 살인죄의 공소시효도 배제돼야 한다고 판단했다.

관련 법안을 함께 낸 서 의원은 당시 "태완이와 같은 억울한 피해를 막고 강력범죄를 반드시 처벌해야 한다"라며 "현행 공소시효가 수십 년 전에 만들어진 것이므로, 첨단 수사기법이 발달한 현재에 맞춰 제도를 개선해야 한다"라고 취지를 설명했다.

상당수 선진국들은 강력 범죄의 공소시효 자체가 없거나 점차 폐지하는 추세다. 미국 연방법은 사형으로 처벌되는 사건은 물론 아동성매매와 인신매매 범죄의 공소시효를 규정하지 않고 있다. 영국은 경범죄에만 공소시효를 적용하며, 일본도 2010년 살인 등 중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했다.

'태완이법' 통과됐지만... 정작 태완이는 적용 안 돼

반인륜적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게 국제사회의 흐름이지만, 우리나라에서는 태완이법이 국회 본회를 통과되기까지 시간이 꽤 걸렸다. 법사위 내부에서 반대 여론이 만만치 않았기 때문이다.

법안 통과 약 한 달 전인 지난 6월 17일 법사위 법안심사제1소위 회의 때도 반대 의견이 우세했다. 당시 회의록을 보면, 검사·변호사 출신의 여야 의원들은 법 안정성 등을 이유로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를 반대했다. 검사였던 한 여당 의원은 "국민여론에 휩쓸려서 막 갈 문제가 아니다"라고 반발했고, 변호사인 한 야당 의원은 "2007년에 공소시효가 한 번 연장됐으므로 없애는 것에 신중해야 한다"라고 말했다. 사실상 법안 처리가 불가능한 분위기였다.  

그러나 지난 10일 태완이 사건이 영구미제로 남게 됐다는 소식이 알려지면서 상황이 반전됐다. 태완이 부모는 지난해 7월 재정신청을 냈지만 기각됐고, 올해 3월 재항고했지만 대법원이 최종 기각을 결정해 공소시효가 만료됐다. 국회를 향한 비판 여론이 거세지자, 그때부터 법안 처리 과정에 가속이 붙기 시작한 것이다.

태완이 사건은 공소시효 만료로 개정안 효력을 적용받지 못한다. 서 의원은 "법적 안정성을 거론하며 일부에서 머뭇거리는 사이에 태완이 사건의 공소시효가 만료돼 안타깝다"라며 "시대상황 변화를 고려하지 않고 기계적으로 법조문 해석에만 매몰됐던 것은 아닌가 싶다"라고 아쉬워했다.

서 의원은 "그럼에도 태완이 부모는 하루 빨리 법안이 시행되기를 바라고 있다"라며 오는 28일 국무회의에서 개정안이 최종 처리돼 조속히 공포·시행돼야 한다고 촉구했다.

앞으로의 과제도 남아 있다. 당초 서 의원이 낸 법안은 형법상 살인뿐만 아니라 존속살인, 상해치사, 폭행치사, 유기치사, 촉탁살인, 강간살인 등 모든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배제하도록 규정했다. 그러나 정부안과 병합한 대안이 만들어지는 과정에서 사형으로 처벌할 수 있는 살인죄만 해당되도록 제한했다. 영아살해나 촉탁·승낙 살인죄 등 사형을 구형할 수 없는 살인죄는 제외되는 것이다.

이와 관련해 서 의원은 "용의자를 체포해 구체적인 혐의를 확정하기 전까지는 사실상 모든 살인죄에 해당하는 범죄를 공소시효 없이 수사할 수 있다"라며 "수사 측면에서는 사실상 영구미제 사건이 없어진 셈"이라고 주장했다. 그러면서도 "이후 피의자의 혐의가 사형을 구형할 수 없는 살인죄로 정해진다면 공소시효가 다시 적용될 수도 있다"라며 "공소시효 폐지 범위를 계속 확대해나가야 하는 이유"라고 덧붙였다.

앞으로 서 의원은 반인륜적 또는 아동대상 범죄로 공소시효 폐지가 확대될 수 있도록 입법 활동을 전개할 계획이다. 특히 이번에 포함되지 않은 강간치사, 유기치사 등의 공소시효 폐지를 위한 법 개정을 조만간 추진할 예정이다.

서영교 의원이 태완이법에 앞장 선 이유
서영교 의원이 태완의 억울함과 정면으로 마주한 건 지난해 여름이다. TV 시사프로그램에서 방영한 태완이 사건 보도를 접하면서다.

"너무 슬퍼서 막 울다가 순간 번뜩 생각했어요. '아, 난 평범한 아줌마가 아니라 국회의원이지' 하고요."

그때부터 국회의원으로서 태완이 부모를 도울 수 있는 일들을 찾기 시작했고, 태완이 부모가 공소시효 만료 직전에 검찰의 불기소 처분에 대한 재정신청을 대구고등법원에 냈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직접 국정감사 기간에 대구고법을 찾아가 관련 내용을 질의했다. 그때 현장을 방문한 태완이 엄마를 처음 만났고, 태완이의 억울한 사연을 자세히 듣게 됐다. 서 의원은 "태완이 어머니가 그동안 대구 지역구 국회의원들을 찾아갔는데도 아무도 신경을 안 써줬다고 하더라, 나한테 몇 번이고 고맙다고 했다"라고 전했다.

대구를 다녀온 서 의원은 본격적인 입법 작업에 들어갔다. 법무부가 2012년에 형법상 살인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형법개정안을 발의한 게 있었지만, 전혀 논의가 진척되지 않고 있었다. 서 의원은 직접 법안을 추가로 발의해 논의를 다시 수면으로 끌어올리기로 결심했고, 올 3월 일명 '태완이법'을 발의했다. 대구 지역 엄마들을 포함한 4만 명의 시민이 법안 통과를 촉구하는 청원서를 서울로 직접 가져다주기도 했다.

법안 통과 가능성을 높이기 위한 준비에도 집중했다. 법률상 이의제기를 사전에 차단하기 위해 법사위 전문위원, 법무부 관계자와 수시로 내용을 점검하고 조정했다. 공소시표 폐지 추세인 국외사례도 자세히 조사해두었다. 

"법무부에서 살인죄 공소시효 폐지에 이의를 제기하지 않는데다가, 국외에서 반인륜적 범죄의 공소시효를 폐지하는 추세라고 하니 법사위 의원들이 그때부터 움직이기 시작한 거죠."

서 의원의 노력은 공소시효 폐지에 소극적인 율사 출신 의원들마저 설득시켰고, 최종적으로 본회의 통과로까지 이어졌다. 법사위의 한 관계자는 "서 의원이 비법조인이기 때문에 가능했던 일"이라고 평가했다.

서 의원은 "'또 다른 태완이'들의 억울함을 풀기 위한 활동은 이제 시작"이라며 "'잔혹한 반인륜적 범죄에 영구미제란 없다'라는 원칙을 우리 사회에 세워가고자 계속 노력하겠다"라고 약속했다.



태그:#태완이법, #김태완, #공소시효폐지, #서영교
댓글7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