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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덤에서 삼문 쪽으로 바라본 신문왕릉 경내의 풍경. 신문왕릉은 오릉, 무열왕릉과 더불어 경주의 왕릉 중 출입문을 갖춘 보기 드문 왕릉이다. 이는 삼국 통일 직후 나라를 다스린 신문왕이 그만큼 높은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상징으로 읽힌다.
 무덤에서 삼문 쪽으로 바라본 신문왕릉 경내의 풍경. 신문왕릉은 오릉, 무열왕릉과 더불어 경주의 왕릉 중 출입문을 갖춘 보기 드문 왕릉이다. 이는 삼국 통일 직후 나라를 다스린 신문왕이 그만큼 높은 정치적 위상을 가지고 있다는 사실을 말해주는 상징으로 읽힌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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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 통일 직후 아버지 문무왕의 뒤를 이은 신문왕은 전쟁 과정에서 공을 세운 자들을 상당수 처단한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신문왕 즉위 첫해 8월 소판 김흠돌, 파진찬 홍원, 대아찬 진공 등이 반역을 모의하다가 참형을 당한다. 신문왕은 교서를 내린다.

"나는 작은 몸과 적은 덕으로 숭고한 기업(基業)을 이어받아, 식음을 폐지하고 일찍 일어나고 늦게 자리에 들면서 중신들과 함께 나라를 편안하게 하기를 바랐다. 상중(喪中)에 난리가 서울에서 일어나리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중략) 악인들이 서로 도와 역모를 하려 했다. (중략) 불충한 자들을 없애려 하니 더러는 산골짜기로 도망쳐 숨고, 더러는 대궐의 뜰에 돌아와 항복했다. 그러나 모조리 찾아서 벌써 죽여 없앴다. 사나흘 동안에 죄수의 우두머리는 탕진되었다. 부득이한 일이었지만 선비들을 놀라고 동요하게 했다. 내 어찌 근심스럽고 부끄러운 마음을 아침저녁으로 잊을 수 있겠는가."

신문왕은 교서 발표 12일 후 이찬 군관도 죽인다. '역모의 사실을 알면서도 일찍이 알리지 않았다'는 것이 죄목이었다. 왕의 장인인 김흠돌을 비롯하여 권신들이 두루 처단된 이 사건은 전쟁 과정에서 획득한 군사력과 경제력을 바탕으로 신문왕이 강력한 왕권을 확보했음을 말해주는 대목이다.

송림사 맞은편 도덕산 정상부에 있는 도덕암에는 고려 광종이 물을 마신 어정수가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도 있다.
 송림사 맞은편 도덕산 정상부에 있는 도덕암에는 고려 광종이 물을 마신 어정수가 있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모과나무도 있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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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사냥이 끝나면 사냥개를 잡아먹는' 일이 신라 신문왕 대에만 일어났을까. 고려 광종 역시 통일 과정에 공을 세운 호족들이 왕권에 도전하는 것을 용납하지 않았다. 권력 상층부를 형성하고 있던 준홍, 왕동 등은 물론 개국공신인 박수경, 최지몽 등도 제거했지만, 심지어 이복 형이자 2대, 3대 임금을 역임한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까지 목숨을 빼앗았다.

광종은 호족들의 권력을 제압하기 위한 정책도 펼쳤다. 호족들이 후삼국 전쟁 중에 부당하게 노비로 삼은 경우를 조사하여 풀어주게 하고, 다시 그런 일이 일어나지 못하도록 막는 법을 제정했다. 이를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이라 한다.

광종은 과거도 실시했다. 이 역시 호족 자제들이 높은 벼슬자리에 임의로 오르는 것을 막음으로써 호족들의 세력을 억제하기 위한 장치였다. 광종의 과거 실시는, 실효를 거두지는 못한 신라 원성왕 때의 독서삼품과와 달리, 실력 있는 사람이면 널리 관직에 등용되는 문을 열었다는 점에서 새로운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상징이었다. 물론 광종의 개혁 추진에는 거란과의 대결 과정에서 축적한 군사력이 든든한 뒷받침이 되었다.

광종 유적, 송림사 앞 도덕암의 어정수

대구경북에는 고려 초기 유적이 별로 없다. 왕건이 견훤에게 대패한 지점인 팔공산 아래 지묘동의 신숭겸 유적지, 대구 앞산 정상부 턱밑의 왕굴, 안동 시내 중심가의 삼태사, 의성읍 의성여고 뒤 깊숙한 계곡에 있는 홍술비 등 손가락에 꼽을 정도뿐이다. 물론 왕건이 개성 출신이고, 고려의 서울 역시 개성으로 대구경북과 지리적으로 아주 멀었기 때문에 당연한 일이다.

사진 왼쪽부터, 국가 지정 보물인 송림사 전탑, 고려 광종이 마시고 병을 이겼다는 도덕암의 약수(어정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800년의 도덕암 모과나무. 노랗게 모과가 익은 사진이 없어 아쉽다.
 사진 왼쪽부터, 국가 지정 보물인 송림사 전탑, 고려 광종이 마시고 병을 이겼다는 도덕암의 약수(어정수),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800년의 도덕암 모과나무. 노랗게 모과가 익은 사진이 없어 아쉽다.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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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앞에 거론한 것들은 모두 후삼국 통일 이전의 사건들과 관련되는 유적들이다. 후삼국 통일 이후의 사건과 관련이 있는 유적은 어디에 있을까? 칠곡 송림사 앞 도덕암으로 가야 한다. 도덕암에 가면 일반에 별로 알려지지 않았을 뿐더러, 후삼국 통일 이후의 고려 초기 유적이 남아 있어 눈길을 끈다. 송림사는 보물 189호 전탑과 전국 최대 목불(木佛), 그리고 숙종의 어필(御筆)로 여겨지는 현판을 가지고 있어 이미 이름이 널리 알려진 사찰이지만, 도덕암은 아무래도 이름이 생소하다.

왕건이 대구 북구의 한 마을을 지날 때 선비들의 경전 공부하는 소리가 대단했다. 왕건이 "경전 공부하는 선비들이 사는 마을이군"하고 말했고, 그 이후 사람들은 이 마을을 연경(硏經)마을이라 불렀다.

덩달아 연경동 뒷산에도 새 이름이 생겨났다. 유학자가 많이 살아 도덕심이 높은 마을의 뒷산이라는 이유로 산도 "도덕산"으로 불려지기 시작한 것이다. 그 후 도덕산에 절이 생기자 절의 이름도 불교식 사찰명과는 거리가 먼, 유교식의 도덕암이 되었다.

도덕암의 법당 뒤에는 광종이 직접 찾아와 마신 후 병이 나았다는 어정수(御井水)가 있다.  법당과 종각 사이에는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수령 800년의 모과나무도 있다. 지금부터 800년 전이라면 대략 고려 말기인 1215년 무렵이다. 고려 시대 때부터 이곳에 서서 멀리 금호강을 내려보았을 이곳 도덕암의 모과나무... 인간의 한 생애가 참으로 짧다는 사실을 실감나게 해준다.

도덕암을 답사하기에 가장 좋은 날은 언제일까? 물론 모과가 노랗게 익는 가을철이다. 그때 도덕암을 찾으면 스님이 나무에 올라 모과를 따는 진기한 풍경을 엿볼 수 있다.


태그:#광종, #노비안검법, #송림사, #신문왕, #도덕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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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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