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ㅇ
▲ <햇빛샤워> 두 주인공 '광자'와 '동교' ㅇ
ⓒ 극단 이와삼

관련사진보기


"광자는 쌍년입니다."

'광자'라는 이름, '쌍년'이란 욕설이 난무한다. 심지어 포스터에서 메인 카피로 사용됐다. 조금은 낯설다. 이렇게 대놓고 말할 수 있을까. 극 중 여주인공 '광자'는 세상의 밑바닥에서 발버둥친다. 무엇을 위해서 그렇게 할까. 그녀는 폭력으로 전과가 있고, 백화점에서 옷을 빼돌려 돈을 모은다. 원하는 것을 위해서 남자를 유혹한다. 심지어 매니저가 되기 위해서 몸을 파는 것도 서슴지 않는다. 이쯤이면 광자가 쌍년인 이유는 명백하다. 원래는 '光(빛광)'를 쓰지만 '아름다운 꽃봉오리'의 아영(妸英)이 되고 싶어한다. 그녀에게 개명은 인생을 바꾸는 것이다.

"여기서 누구랑 같이 자면 어때요. 춤 좀 추면 어때요. 그걸로 누나의 구멍난 인생을 떼울 수 있다면... 누나의 구멍난 돈을 떼울 수 있다면 그런 건 아무 상관없어요. 그건 누나가 원해서 그런 게 아니잖아요. 원하지도 않았는데, 원하지도 않는 방향으로 계속 그렇게 되고... 전 그렇게는 못하겠더라구요. 이제야 알았어요. 누나 말. 소중한 걸 알게 해줘서 고마웠어요. 누나 고마워요. 누나는 내 햇빛이에요. 내게 비타민을 줬어요."

또 다른 주인공 '동교'는 광자와는 정 반대의 인물상을 보여주는 19살 소년이다. 셈도 흐리고 말투도 어눌하다. 광자가 보기에는 한참이나 모자라 보일 뿐이다. 타인과의 '관계'를 통해 자신의 목적을 갈망하는 광자와 달리 동교는 아무런 조건이 없다. 아니 오히려 광자가 얽혀있는 '관계'를 거부한다.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에게도 모든 것을 다 내준다. 극의 후반부, 동교는 갑작스러운 죽음을 맞는다. 동교의 죽음은 그동안 광자를 지탱했던 그 무언가를 돌아서게 만들었다. 그토록 원했던 '아영'을 내려놓고 '나는 광자다!'를 외치며 모든 것을 내려 놓는다.

남산예술센터 2015시즌프로그램 <햇빛샤워> 포스터
▲ <햇빛샤워> 포스터 남산예술센터 2015시즌프로그램 <햇빛샤워> 포스터
ⓒ 극단 이와삼

관련사진보기


최근 연극계에서 가장 주목받는 연출가. 혹자는 그를 '제2의 전성기'라 부른다. 제1의 전성기는 10년 전이다. 대학로에서 촉망받던 신예 연출가는 영화로 잠시 외도를 했고, 다시 연극판으로 돌아왔다. <환도열차>(2014 동아연극상 희곡상), <여기가 집이다>(2013 대한민국 연극대상 대상), <미국 아버지>(2013 창작산실 대본공모 최우수작)에 이르기까지 그를 전성기라 부르는 이유가 여기 있다. 다루는 작품마다 사회 부조리와 다양한 인간 군상을 섬세한 텍스트로 위트있게 풀어냈다. 화제의 주인공은 극작가 겸 연출가인 장우재(44)다.

장우재의 작품은 우리 사회에 대한 사유와 성찰을 이끌어낸다. 전작에 비해 다소 소소한(?) 일상 생활사를 소재로 다룬 연극 <햇빛샤워>가 남산예술센터 2015 시즌 프로그램으로 무대에 오른다. '쌍년'이지만 따듯한 인간미를 숨길 수 없는 '광자'와 다소 비현실적이라 할만큼 순진한  '동교'의 이야기다. 연극 말미에 부르짖는 동교의 대사는 두 주인공이 이 부조리한 사회를 살아가는 방식이 얼마나 극명하게 다른지를 오롯이 보여준다. 연출가 장우재는 그 다름의 원인을 '관계'라는 단어로 지목했다.

"이것은 두 남녀의 이야기가 아니다. 험난한 사회를 살아가는 대응방식의 차이가 그 둘을 둘러싸고 있는 주변 사람들과 만나고 대립하면서 파편들이 나온다. 바로 그 점을 들려주고 싶다"

<햇빛샤워>는 지난해 남산예술센터의 낭독극 '남산희곡페스티벌, 네 번째'에서 출발했다. '남산희곡페스티벌'은 '초고를 부탁해'라는 상시투고시스템을 통해 발굴된 신진작가의 희곡을 낭독공연으로 선보이는 사업이다. 지난 2014년, 남산예술센터는 공모를 통해 접수된 32편의 희곡 작품을 심사해 <햇빛샤워>를 선정했다. 이렇게 만들어진 <햇빛샤워>는 남산예술센터가 선발하고 육성한 첫 번째 사례로 기록된 작품이다.

초고에서 시작해 낭독공연으로...다시  무대공연에 이르기까지 일 년이 걸렸다. 두 명의 드라마터그와 연습실, 제작 극장 시스템과 스태프 인력까지 모두가 힘을 모았다. 산고의 고통으로 만들어진 <햇빛샤워>는 남산예술센터가 지향하는 세 가지...  '창작 초연', '동시대성', '중규모'를 가장 잘 실현했한 작품으로 호평 받는다.

"2014년 <남산희곡페스티벌>에서 낭송되었을 당시 <햇빛샤워>에는 광자의 죽음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의 진술 장면이 없었다. 새롭게 희곡을 수정하면서 작가 장우재는 광자의 죽음에 대한, 아니 광자의 삶과 죽음에 대한 연극을 본 우리의 진술을 무대화하기를 원한다. 그러므로 그 진술은 연극 안의 진술이면서 연극 밖의 진술이다. 극 중 인물의 진술이기도 하고 관객의 진술이기도 하다." (연극평론가 조만수)

ⓒ 극단 이와삼

사회 부조리 인간적으로 풀어내

<햇빛샤워>는 '남산희곡페스티벌' 이후 끊임없는 수정 보완을 거쳐 탄생됐다. 이번에 선보이는 본 공연은 당초 낭독공연과는 다르게 광자와 동교의 틀 안에서 이들을 바라보는 주변인들의 시선을 덧붙였다. 장우재 연출가는 "지금 이 시대는 어떤 강력한 선형적인 이야기만으로는 담을 수 없을 만큼 분화되고 파편화됐다"며, "힘 있는 드라마를 밀고가기 보다는 이를 둘러싼 입장이나 관계, 그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파편들이 오히려 현재를 잘 드러낸다"고 말했다. 지난 3월, 장 연출가는 마침내 대본을 완성하고 작가노트에서 이렇게 회상한다.

"이 이야기는 어떻게 해서 그녀가 죽게 되었는가를 보여주는 얘긴가... 그녀가 성공했다 어느 순간 사라져버리게 되는 것을 우리가 같이 겪게 되는 얘긴가"

"나이가 어리지만 조금 덜 쓰고 나눠서 가난을 벗어나려는 다소 허황된 청년이 어떤 일을 겪으면서 서로 가난에 대해 얘기하는...경제적 가난이 다시 마음의 결핍을 낳고 그 결핍이 다시 마음의 가난까지 낳는 이 악순환 구조를 말하고 싶다"

<햇빛샤워>는 장우재 특유의 유머스러운 설정과 직설적인 화법으로 사회의 부조리를 인간적으로 풀어냈다. 필자는 연극속에서 광자가 동교에게 벗어준 브래지어에 주목했다. 광자는 '아무 관계없는 사람들에게 자신의 모든 것을 내주는' 동교를 마뜩잖아 했다. 진정 쌍년일 수 없는 광자는 아무 관계없는 동교에게 자신이 모든 것인 입던 브래지어를 벗어준다.

과장 : 그리고 우리도 그만 만나야겠다.
광자 : (웃으며) 왜?
과장 : 다 안 좋아. 상황이. 안팎으로. 미안하다.
광자 : 같이 죽재매. 댄싱 인 더 다크 틀어놓고.
과장 : 아직 그 노래 틀 때 안됐나 보다.
광자 : 아 개새끼야.
과장 : 또 오바한다. 너 선을 지켜. 선을 넘지 말라고, 알아들어?
광자 : ...

광자는 동교에게 브래지어를 내어주면서 과장이 말했던 '넘지말아야 할 선'을 넘어섰다. 아영을 꿈꾸는 광자는 진정 자신이 찾던 이름이 '광자'였음을 죽는 순간에 느꼈다. 연극에서 말하는 햇빛을 만나는 순간이다. 광자가 찾던 햇빛은 미칠 광(狂)이 아니라 빛광(光)이었던 것을.

ⓒ 서울문화재단

덧붙이는 글 | <햇빛샤워>는 오는 9일부터 26일까지 남산예술센터 드라마센터에서 공연한다. 남산예술센터와 극단 이와삼이 공동 제작했으며, 17세 이상 관람이 가능하다. 1만 8천원~3만원. 문의 02-758-2150



태그:#햇빛샤워, #남산예술센터, #장우재, #남산희곡페스티벌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정치는 빼고 문화만 씁니다." 매주 금요일마다 한겨레신문에 예술가를 만나 이야기를 들어보는 '사람in예술' 코너에 글을 쓰고 있습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