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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기사는 오마이뉴스 청소년 특별면 <너, 아니?>에 실렸습니다. <너, 아니?>는 청소년의 글을 가감없이 싣습니다. [편집자말]
퐁네프
 퐁네프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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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리에서 맞은 첫 번째 아침. 창문 밖 저만치 사크레쾨르 성당이 흐릿하게 보인다. 인천에서 프랑크푸르트, 프랑크푸르트에서 샤를 드골 공항, 샤를 드골 공항에서 오페라까지 18시간에 이르렀던 여행을 마치고 지난 밤, 현지 시간으로 저녁 11시쯤 파리 9구의 나탈리네 집에 도착했다.

내가 묵고 있는 나탈리네 집은 전형적인 프랑스인들의 주거공간이다. 간단히 아침을 먹고 학교에 가는 나탈리의 동생 마크와 함께 집을 나섰다. 오페라 위쪽 사거리에서 마크는 메트로로 들어가고 나는 왼쪽으로 꺾어 센 강변 쪽으로 계속해서 걸어갔다. 사실 파리는 생애 처음이었기에, 그리고 불어도 그리 잘하는 편이 아니었기에 걱정이 많았지만, 결국 출발한 지 1시간 만에 퐁네프 앞에 도착할 수 있었다.

파리 최초의 '다리다운 다리' 완공시킨 앙리 4세

'새로운 다리'라는 뜻의 퐁네프는 사실 파리에 현존하는 가장 오래된 다리다. 16세기에 건설된 이 석조다리는 지금까지 오랜 세월의 풍파를 견뎌왔다. 이야기는 500년 전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14세기에서 15세기에 걸친 백년전쟁이 끝나고 황폐해진 사회를 재건해가면서, 프랑스는 본격적으로 중앙집권화된 정치체계를 갖추기 시작했다. 특히 모든 부와 권력의 중심지였던 파리로 프랑스 방방곡곡에서 많은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16세기에 이르자, 파리는 사람들로 넘쳐났고, 노후한 거리와 다리들은 더 이상 제 구실을 하지 못하게 되었다. 센 강을 가로지르는 새로운 다리를 건설하자는 논의가 처음 시작된 것은 앙리 2세 때인 1550년이었지만, 이 계획은 재정 부담이 너무 크다는 이유로 실현되지 못했다. 그로부터 39년이 지난 1589년 앙리 3세 때에 이르러서야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됐다.

그런데 어떻게 이것이 가능했을까? 어떻게 16세기 기술자들은 오늘날까지 널리 사용되는 다리를 만들 수 있었을까? 우리는 그 이유를 센 강에서 찾을 수 있다. 사실 앙리 4세가 다스리던 시절, 파리는 심각한 물 부족 현상을 겪고 있었다. 여름이면 센 강은 바싹 말라 바닥을 드러내곤 했다. 마른 강바닥에 다리를 놓는 것은 훨씬 수월한 일이었기에 공사는 주로 여름에 진행되었다.

그러나 여름 석 달을 제외하고는 센 강에 다시 물이 차올랐기에 공사를 계속 진행할 수는 없었다. 공사는 매우 느리게 진행됐다. 1588년에는 종교전쟁으로 인해 완전히 중단되기도 했는데, 이후 11년이 지나서야 재개될 수 있었다. 결국 다리가 완공된 것은 본격적인 공사가 시작된 지 30여년의 세월이 흐른 앙리 4세 재위 때인 1607년이었다. 그는 이전과 달리 다리 위에 집을 짓지 않을 것을 명령했고, 퐁네프는 최초로 파리에 지어진 '다리다운 다리'가 되었다.

앙리 4세 동상, 그리고 베르갈랑 공원
 앙리 4세 동상, 그리고 베르갈랑 공원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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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잠시 앙리 4세에 대해 생각해보자. 앙리 4세는 프랑스 역사를 통틀어 손에 꼽히는 몇 안 되는 왕 중에 하나이다. '선량왕(le Bon Roi)'이라는 별명을 가지고 있었던 그는, 모든 백성이 일요일이면 닭고기를 먹게 하겠다고 약속할 만큼 가난한 이들을 진심으로 아끼는 군주였다. 그는 왕위에 오른 뒤 종교의 자유를 허락하는 낭트 칙령을 반포하고, 쉴리 백작을 등용하여 프랑스의 재정을 개선시키는 등 많은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그렇지만 한편으로는 수많은 여자들과 염문설을 흩뿌리고 다닌 까닭에 호색한(le Vert-Galant)이라는 불명예스러운 별명을 얻기도 했다.

퐁네프 다리 중간에 있는 계단으로 내려가면 바로 그 앙리 4세의 별명에서 따온 베르갈랑 공원에 이르게 된다. 시테 섬의 뾰족한 끝머리에 자리하고 있는 이곳은 오늘날 파리 시민들이 와인 한 병을 들고 친구들과 함께 소풍을 즐기거나 휴식을 취하는 장소이다. 헤밍웨이의 책, <파리는 날마다 축제>를 보면 헤밍웨이도 파리에서 보낸 7년 동안 이곳을 자주 찾았음을 알 수 있다.

"앙리 4세 동상이 있는 다리 퐁네프 아래 시테 섬 끝자락이 뾰족한 뱃머리로 끝나는 지점 강변에는 커다랗고 아름다운 마로니에 나무들이 서있는 작은 공원이 있다. 그 옆에서 급류를 이루거나 역류를 만들며 유유히 흐르는 센 강변에는 낚시하기에 좋은 장소가 여럿 있었다.

(중략)

날씨가 맑은 날이면 나는 포도주 한 병과 빵 한 조각, 그리고 소시지를 사 들고 강변으로 나가 햇볕을 쬐면서 얼마 전에 산 책을 읽으며 낚시꾼들을 구경하곤 했다." - <파리는 날마다 축제> 본문 중에서

오늘날 베르갈랑 공원에는 더 이상 낚시꾼들이 존재하지 않지만, 여전히 매력적인 장소임에는 틀림없다.

왕비와 사이가 좋지 않았던 왕, 암살 배후 미스터리

도핀 광장
 도핀 광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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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르갈랑 공원에서 다시 올라와 시테 섬 쪽으로 향하면 도핀 광장(Place Dauphine)을 만나게 된다. 앙리 4세가 주도한 도시계획의 일환으로 만들어진 이 광장은 훗날 루이 13세가 될 아기의 탄생을 축하하기 위해 황태자(Dauphine)라고 이름 붙여졌다. 광장의 양 옆에 서로 마주보는 건물들도 그 당시 계획된 것으로 도시계획가로서 앙리 4세가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보여준다.

'1600년 10월 5일, 마리 드 메디시스와 앙리 4세의 결혼을 위한 대리 결혼식'
 '1600년 10월 5일, 마리 드 메디시스와 앙리 4세의 결혼을 위한 대리 결혼식'
ⓒ 임하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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앙리 4세의 인생을 조금 더 알아보기 위해서 루브르 박물관으로 향한다. 유리 피라미드 밑으로 들어가 왼쪽으로 향하면 리슐리외 관에 이르게 된다. 계단을 따라 3층으로 올라가면 메디치 화랑이라 이름 붙여진 큰 방을 만날 수 있다. 이곳에는 루벤스가 그린 21점의 연작, '마리 드 메디치의 생애'가 전시되어 있다. 제목을 보아서도 알 수 있듯이 이 그림의 주인공은 마리 드 메디치이다. 그녀는 이탈리아 피렌체의 메디치 가문 출신으로 1600년, 앙리 4세의 두 번째 왕비가 되었다.

그러나 앙리 4세는 그녀를 그리 좋아하지 않았고, 심지어 결혼식에도 대리인을 보냈다고 한다. 그 이유인즉슨, 앙리 4세에게는 이미 다른 많은 여자들이 있었고, 마리 드 메디치와의 결혼은 파탄에 빠진 나라의 재정 상태를 회복하기 위한 정략결혼이었기 때문이다. 실제로 앙리 4세는 당시 27살이었던 마리와 재혼함으로써 15만 파운드라는, 막대한 지참금을 얻게 되었다. 이 둘의 결혼생활은 그리 순탄하지 않았고, 심지어 종교도 달라서 곧 왕의 곁에는 신교도가, 왕비의 곁에는 구교도가 모여 파벌을 이루었다. 이 두 세력은 서로를 견제하며 권력을 잡으려 치열한 투쟁을 벌이고 있었다.

화살이 꽃힌 뱀은 앙리 4세의 암살자 라바이약을 상징한다
▲ '1610년 5월 14일, 앙리 4세 예찬과 마리 드 메디치의 섭정 선포' 중 일부 화살이 꽃힌 뱀은 앙리 4세의 암살자 라바이약을 상징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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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건이 벌어진 것은 왕이 루브르궁을 나서던 1610년 5월 14일이었다. 독특한 옷차림을 하고 이상한 모자를 쓴 어떤 남자가 불현듯 왕이 탄 마차를 뒤쫓기 시작했다. 그의 이름은 프랑수아 라바이약, 열렬한 가톨릭 교도였다. 좁은 골목길을 지나던 왕의 마차는 중간에 잠시 멈출 수밖에 없었는데. 왜냐하면 그 앞에는 건초를 실은 수레가 쓰러져 있었기 때문이다. 라바이약은 호위병들이 길을 치우는 사이 마차에 접근했고, 창문으로 손을 집어넣어 그대로 왕의 심장을 찔렀다. 라바이약은 그 자리에서 붙잡혔고, 이후 얼마간 모진 심문과 고문을 당했다. 그는 이것이 단독범행이라고 주장했지만, 미심쩍은 점은 한두 가지가 아니었다.

첫째는 바로 왕의 마차 주위에 무장한 사람들이 있었다는 것이다. 그들은 호위병도 아닌데 그 주변에 모여 있다가 라바이약이 왕을 암살한 직후 뿔뿔이 흩어졌다. 두 번째로 수상한 점은 당시 마차에 왕과 함께 타고 있던 에페르농 공작의 행동이었다. 그는 암살 직후 성난 군중들이 라바이약을 죽이지 못하도록 막아주었을 뿐만 아니라, 곧바로 왕궁으로 돌아가 몇 시간 만에 왕비에게 섭정을 요청했다.

전해지는 이야기에 따르면, 라바이약이 파리에 도착했을 때 방을 내어준 것은 바로 에페르농 공작의 부인이었다고 한다. 그러나 라바이약은 끝끝내 공범의 존재를 밝히지 않았고, 센 강변의 그레브 광장에서 말에 묶여 사지가 찢기는 형을 받았다. 그렇지만 말들은 그 맡은 바를 잘 해내지 못했고, 격분한 군중들은 더 힘센 말을 끌고 왔다. 그때 라바이약은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On m'a bien trompé quand on a voulu me persuader que le coup que je ferais serait bien reçu du peuple, puisqu'il fournit lui-même des chevaux pour me déchirer."

직역하면 이쯤 될 것 같다.

"사람들이 고마워할 거라더니, 내가 크게 속은 것이로구나. 이제 사람들이 나를 찢어버릴 말을 끌고왔으니 말이다."

이 모든 것을 종합해볼 때, 앙리 4세의 암살 사건은 단독 범행이 아니었을 가능성이 높다. 그 배후에 구교도가 있었는지, 왕비가 있었는지, 혹은 다른 누군가가 있었는지는 400년이 지난 지금까지 여전히 수수께끼로 남아 있다.

다시 루브르 박물관, 메디치 화랑으로 돌아가 보자. 마리 드 메디치가 루벤스에게 뤽상부르 궁전을 장식하기 위한 24점의 그림을 의뢰한 것은 1622년이었다. 앙리 4세의 갑작스런 죽음 12년이라는 세월이 흘렀고, 아들 루이 13세가 장성함에 따라 그녀의 정치적 입지도 점점 줄어들고 있었다.

앙리 3세와 4세 시절의 신하들을 모두 내쫓고 이탈리아 출신의 재상을 중용했던 그녀는 프랑스의 여러 귀족들과 아들 루이 13세의 불만을 사고 있었다. 바로 이 무렵, 그녀는 루벤스에게 자신의 생애를 담은 그림을 제작할 것을 주문했다. 마리 드 메디치는 오로지 자신만이 주목받기를 원했고, 역사적 사실을 축소하거나 왜곡함으로서 자신의 입맛에 맞는 작품을 만들어냈다. 결국 이 그림에는 선전용 의도가 짙게 깔려있었다.

앙리 4세의 초상화
 앙리 4세의 초상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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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다시 앙리 4세에게로 가 이야기를 끝맺으려 한다. 사람들은 '프랑스의 왕'이라고 하면 십중팔구 루이 14세를 떠올리지만, 개인적으로는 앙리 4세의 인생이 더 기억될만한 가치가 있다고 생각한다. 그는 인생을 즐겼고, 그래서 실수도 많이 했지만, (특히 여자문제에 있어서) 기본적으로 백성을 사랑하는 군주였다. 그들의 삶에 공감할 수 있는 능력과 인품을 가진 왕이었다.

파리에 방문한다면 한번쯤 그가 남긴 흔적을 되짚어보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만약 당신이 절대왕정의 상징 '태양왕'보다 백성을 사랑하고 인간적인 매력을 가진 '선량왕'에 마음이 이끌린다면 말이다.

○ 편집ㅣ곽우신 기자



태그:#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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