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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시다. 안 오나?"

정각 오후 2시. 부처님 오신 날인 지난 5월 25일 어머니는 내게 전화를 거셨다. 급히 챙겨 입고 어머니 집으로 나갔다. 어머니는 작은 배낭이 불룩하도록 챙겨 넣었다. 한낮의 햇살은 뜨거웠다. 어머니가 권하는 미지근한 더치 커피가 시원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뜨거운 햇살과 달리 하늘은 파랗지 않았다. 땅은 온통 주황빛이다. 경남 하동군 북천면 꽃양귀비 축제장이다. 어머니는 걸음이 느린 자신 때문에 내가 빨리 걷지 못하는 게 못내 아쉬운 모양이다. 꽃밭 사이를 가면서 미안해하신다. 씨익 웃었다.

5월 23일부터 6월 7일까지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서 열리는 꽃양귀비 축제장.
 5월 23일부터 6월 7일까지 경남 하동군 북천면에서 열리는 꽃양귀비 축제장.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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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분에 천천히 꽃도 구경하고 사진도 찍지~"

가을에 한들한들 코스모스축제가 멋있는 이곳이 늦봄에는 꽃양귀비로 사람들을 불러 모을 심산이다. 올해 첫 꽃양귀비축제란다. 가기 싫다는 아이들 집에 두고와서 홀가분했다. 조카를 돌보는 어머니도 평안해 보였다. 어머니와 내가 이렇게 단둘이만 함께한 게 몇 번인지 기억이 나지 않는다. 아마도 처음인 셈이다. 결혼 전에는 시집간 누나를 제외하고 형제와 꽃양귀비 같은 붉은 주황빛의 티셔츠도 맞춰 입고 동해안을 시작해서 전국을 돌아다녔다. 어머니는 그때를 아직도 좋다고 하신다.

하얀 사스타테이지가 꽃양귀비 사이에 빛나고 그 아래로 분홍낮달맞이 꽃이 빛난다. 사람들은 너나없이 꽃 속에서 기념사진을 남긴다. 그러나 우리 모자(母子)는 기념사진이 없다. 나도 어머니를 꽃 사이에 세워 사진을 찍지 않았다. 어머니께서 사진 찍어줄까 하는 말씀에도 그저 웃었다.

올해 일흔일곱의 어머니는 자신의 사진이 남는 것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다. "다 부질없다" 하시는 말씀 속에는 인생의 막바지를 앞두고 나름 정리하시는 모양이다. '아직 100세까지는 20여 년이 더 남았는데...'란 말이 입가에 맴돌지만, 장수가 축복이 아닌 시대라 입을 다물었다.

경남 하동 화개장터
 경남 하동 화개장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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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늘막 아래 앉았다. 어머니께서 싸온 고구마를 먹었다. 그늘이라 바람이 시원하게 어루만져준다. 10여 분 앉은 뒤 꽃밭 사이를 돌아 여느 축제장과 같이 노래자랑이 열리는 곳으로 향했다. 고등학교 1, 2학년쯤 된 출연자가 "오빠 말만 믿어봐~"라고 귀엽게 노래 부른다.

노래자랑을 구경하고 화개장터로 차를 몰았다. 북천면에서 화개장터까지는 차로 40여 분. 그런데도 그 시간은 지루하지 않았다. 조수석에 앉아 안전띠 매는 게 불편한 어머니는 뒤에 앉았다. 요즘 어머니와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눈 게 얼마 만인가. 좁은 차 안이 그래서 더 좋다.

부처님 오신 날의 하동 쌍계사
 부처님 오신 날의 하동 쌍계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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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번에 걸친 화재를 딛고 일어선 화개장터. 오래간만에 찾은 까닭인지 낯설다. 그런데도 어머니는 이곳에서의 추억을 더듬는다. 어머니는 내가 차를 운전해 도토리묵에, 막걸리 한 사발 들이킬 수 없어 아쉬워하신다. 연신 이 음식점에서, 저 음식점에서 먹고 가자고 권한다. 아직 밥을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다. 어머니와 화개장터에서 다리 하나 건너 이제는 옛 장터가 되어버린 동네까지 걸었다.

"부처님 오신 날인데 근처 쌍계사라도 가보실래요?"

어머니가 좋지 하는 표정이다. 그래 우리 어머니는 돌아다니시길 좋아하시지.

"내는 멀미도 안 해 괜찮다. 차를 타고 돌아다닐 수 있어 좋다."

멀미하지 않는 어머니 모시고 벚꽃 대신에 벚나무 터널이 아름다운 쌍계사 벚꽃길을 달렸다. 허리 꾸부정한 어머니. 웬걸 여기까지 왔으니 대웅전까지 가보잖다. 차로 근처까지 와서 그냥 갈 생각이었는데. 차를 세우고 어머니를 따라나섰다.

“내 언제 다시 여기 와보겠노”하시며 꾸부정 허리로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대웅전을 오르는 어머니.
 “내 언제 다시 여기 와보겠노”하시며 꾸부정 허리로 한 계단 한 계단 밟고 대웅전을 오르는 어머니.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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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주문에 연등이 내 걸렸다. 그런데 어머니는 계단 길이 싫다며 옆으로 돌아가신다. 정작 대웅전 앞의 기다란 계단에서는 꾸부정 어머니는 계단을 밟고 밟아 올라가신다.

"내 언제 다시 여기 와보겠노."

나는 말없이 그저 따라 올랐다. 사진을 틈틈이 찍는 나를 힐끔 쳐다보고는 앞으로 먼저 걸어가신다. 나에게 짐이 되기 싫은 지 저만큼 힘겹게 걸음걸음 옮기시는 어머니 뒷모습. 대웅전 뒤 부도를 보고 돌아섰다. 돌아가는 길은 올라온 길보다 빠르고 한결 가벼운 걸음이었다. 사진 찍느라 늦는 나를 놔두고 몇 걸음 앞에서 걷는다.

하동 재첩국
 하동 재첩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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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동읍 내 재첩국집에 들러 재첩국 정식을 먹었다. 늦은 시간이라 식당에는 우리 둘뿐이었다. 몇 해 전 여름 온 가족 여름 휴가 와서 점심 때 재첩국 먹은 이야기며 형제들과 나들이 와서 먹은 이야기가 재첩국 속 재첩보다 더 많이 담겼다. 맛의 절반은 추억이었다.

귀찮다고 틀니를 끼지 않는 어머니는 자신의 재첩국에서 국물만 마신 뒤 남은 재첩을 내게 밀어주셨다. 어머니가 권하는 재첩을 꾸역꾸역 먹었다. 엄마가 보실까 봐 재첩국 사발을 들어 내 얼굴을 가리고 훌훌 털어먹었다.

저녁 9시 가까이 되어서야 집에 도착했다. 다음날 어머니는 형제들과 함께 통영으로 놀러 가셨다. 어머니는 얼마 만에 아이며 집안일에서 벗어나 홀가분하게 떠나시는지 모른다. 소풍을 앞둔 아이처럼 좋다고 하면서. 어머니는 놀러 가시고 생일을 맞은 연차휴가로 쉬는 마눌님 순심과 집 대청소를 했다. 땀이 송골송골.

면을 드시고 싶다는 장모님을 모시고 경남 함양 읍내에서 냉면을 먹었다.
 면을 드시고 싶다는 장모님을 모시고 경남 함양 읍내에서 냉면을 먹었다.
ⓒ 김종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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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둔다고 서둘렀는데 오전 10시를 넘겼다.

"12시쯤 도착할 거야. 점심 먹지 말고 어디 바람이라 쐬러 가자고. 멀미약 사 갈까?"

아내는 장모님께 전화를 걸었다. 진주에서 처가 함양까지 차를 몰았다. 시원시원하게 뚫린 4차선 국도만큼이나 아내와 도란도란 이야기 나누는 여유가 좋다. 차 안에서 마시는 캔커피의 달싸름한 맛이 정겹다.

"면을 먹을까~"

어머님을 모시고 읍내 냉면집에서 냉면을 먹었다. 차가운 육수가 한낮의 뜨거운 열기를 식힌다. 착실한 불교 신자인 어머님께 합천 해인사로 바람 쐬자고 권했다. 어머님도 좋아라 하신다. 꼬부랑 88고속도로. 거창 휴게소에서 잠시 쉬었다. 나는 원두커피를 마시고 아내와 어머님께는 아이스크림을 사드렸다.

합천 해인사 일주문으로 가는 길 옆으로 나무 사이로 햇살이 곱게 들어온다.
 합천 해인사 일주문으로 가는 길 옆으로 나무 사이로 햇살이 곱게 들어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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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은 컵 속의 아이스크림을 베어 물면서 "김 서방 덕분에 맛난거 먹네~"하시는 말씀에 "어머니 덕분에 마눌님 얻었다 아입니꺼. 울 마눌님 생일 주인공은 어머닌 끼라요~".

당연한 말이지만 어머니는 사위의 넉살에 허허 웃으신다. 성보박물관을 지나 1Km가량 해인사로 걸었다. 흙길이 아니라 시멘트 포장길이라 짜증이 났다. 그러나 걸음 불편한 어머님 손을 잡고 함께 걸어가는 아내의 모습을 보고 짜증은 이내 가라앉았다. 이 시멘트 길이 걸음 불편한 이들에게는 절로 갈 수 있는 편안한 길이라 싶었기 때문이다.

나무 사이로 드러난 햇살이 곱다. 고운 햇살마저도 나뭇잎 한 겹 두 겹으로 막아 그늘을 드리워 좋았다. 사이사이 넓은 돌과 의자에 앉았다. 부처님 오신 뒷날이라 오고 가는 이가 적어 걸어가는 길이 넉넉했다. 나뭇잎 사이로 고개 내미는 햇살 구경하는 데 저 앞에서 갑자기 아내가 어머니더러 "벗어"란다. 아무리 사람 없는 한적한 길이라지만 여기서 무슨. 땀을 흘리는 어머니는 혹시나 싶어 입은 내복을 입으셨다. 아내의 바람막이를 건네받아 어머니 상체를 가렸다.

생일을 맞은 딸과 합천 해인사를 찾은 장모님.
 생일을 맞은 딸과 합천 해인사를 찾은 장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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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이~ 봐도 안 본 기고 지는 눈을 저만치 띄웁미더..."

민망해하실까 딴청부리는데 어머니는 "봐도 괜찮다"며 껄껄 웃으신다. 오가는 사람을 피해 급하게 내복 상의를 벗은 어머니. 나중에 화장실에 들러 하의도 벗었다. 내복은 내 카메라 가방에 넣어 처가로 돌아갈 때까지 함께했다.

한 손에는 지팡이를 짚고 한 손에는 딸의 손을 잡은 어머니. 어제 나를 낳아준 어머니보다 더 꾸부정한 허리를 가지셨다. 걸음도 천천히. 화엄종의 본존불인 비로자나불을 모신 대적광전으로 올라가는 높다란 계단은 포기하지 않으셨다. 아내가 옆에서 당겨가며 올라간다.

오랜만에 찾은 까닭인지 포기 없이 높다란 계단을 꾸부정한 허리로 올라가는 장모님.
 오랜만에 찾은 까닭인지 포기 없이 높다란 계단을 꾸부정한 허리로 올라가는 장모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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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처님 앞에서 자신을 온전히 바닥에 엎드려 공손히 손을 위로 올리며 절을 드리는 올리는 어머니 곁에 아내는 그저 앉아 있다. 어머니는 부처님 좌우 보살님께도 예를 올린다. 어머니는 예전부터 대구 갓바위를 가보고 하셨다. 하나의 소원을 들어주신다는 갓바위에서 어머니는 어떤 소원 하나를 빌려는지 궁금했다.

근처 해인 카페에서 팥빙수와 과일주스를 먹었다. 어머니는 시리다고 얼음 몇 숟가락 드시고는 주스만 드셨다.

"어머이, 이제 밥 차려줄 영감도 없으니 다음에는 양산 통도사라 갑시더. 어머니 멀미도 안 하시고 이제는 멀리 다녀도 되겠는데요."

홀쭉한 입으로 "그래, 자네가 고생이지" 하면서도 살포시 웃는 모습이 정겹다.

“어머니, 고맙습니데이~. 여보 마눌님 사랑해~”
 “어머니, 고맙습니데이~. 여보 마눌님 사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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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아 나오는 길 성보박물관 앞에 서 있는 탑은 연륜이 경내보다 짧은 듯 세월의 때가 없었다.

"저 탑 참 싱싱하네~"

어머니의 말씀에 크게 소리 내어 아내도, 나도, 어머니도 웃었다. 오늘은 시간을 거슬러 올라가 모두가 싱싱한 날이었다.

두 분 어머니 덕분에 부처님께 공덕 많이 쌓은 날이다. 세 여자 사이에서 행복한 데이트를 즐긴 나날이다.

"어머니, 어머님 고맙습니데이~. 여보 마눌님 사랑해~"

덧붙이는 글 | 해찬솔일기



태그:#하동 쌍계사, #합천 해인사, #데이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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