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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국제시장> 스틸컷.
 영화 <국제시장> 스틸컷.
ⓒ CJ엔터테인먼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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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상반기 한국 사회를 지배한 화두는 단연 '태극기'였다. 먼저 군불을 지핀 것은 박근혜 대통령이었다. 그가 지난해 12월 '2014 핵심국정과제 점검회의'에서 <국제시장> 한 장면을 언급한 것이 계기였다.

"최근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영화에도 보니까 부부 싸움하다가도 애국가가 들리니까 국기배례를 하고..."

'돌풍'을 일으킨 영화이니 만큼, 본 사람이 많았고, 이들 다수가 대통령 발언에 뜨악한 반응을 보였다. 혹자는 대통령이 <변호인>을 보면 정말 좋아하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이 영화에는 부부 싸움 정도가 아니라, 고문경관이 주인공을 두들겨 패다가 갑자기 부동 자세를 취하며 국기 경례를 하는 명장면이 등장하기 때문이다.

대통령의 '창조적 해석'에 대한 반응이 신통치 않자, 민경욱 청와대 대변인은 '대통령이 직접 영화를 본 것은 아니'라며 수습에 나섰다. 하지만 대통령이 어떻게 이야기해도 찰떡같이 알아듣는 한국 공무원들이 있지 않은가. 이미 지난 2월부터 행정자치부를 선두로 교육부, 미래창조과학부, 국토교통부, 인사혁신처 등 10개 이상의 부처가 '나라사랑 태극기 달기 운동'에 적극 동참하겠다는 의지를 표명했다.

보궐선거가 끝난 후 열기가 좀 가라앉은 느낌이지만, '태극기'는 올해 내내 화두가 될 것이다. 앞으로 6월 현충일, 8월 광복절, 10월 국군의 날이 기다리고 있어서가 아니다. 한국보건복지정보개발원처럼 태극기와 특별히 관련 없어 보이는 기관까지 "태극기 달기에 적극 동참하며 나라 사랑에 앞장서겠다"며, '태극기 미구비 직원에 태극기 보급', '인증 사진 이벤트' 등을 벌이고 있어서도 아니다.

국민이 행복하고 나라가 제 역할을 하고 있다면, '나라를 사랑하지 말라'고 사정을 해도 사랑하지 않을 도리가 없을 것이다. 정부가 '나라 사랑'을 애써 강조하는 이면에는, '나라를 사랑하기 어렵게 만드는' 문제를 더 이상 해결할 수 없다는 인식이 깔려 있다.

'나라 사랑' 열기 속에서 나온 '포기 선언'

경제를 보자. 박근혜 정부는 "일자리 창출을 최우선으로 정책을 수립하고 추진하겠다"고 공언했지만, 집권 3년 차에 들어선 2015년 현재(2월 기준), 한국 청년층(15~24세) 실업률은 사상 최악인 13.5%로 곤두박질쳤으며, 청년(15~29세) 고용률은 1998년 외환 위기 당시(40.6%)와 맞먹는 평균 실적을 냈던 이명박 정부보다도 열악하다.

물론, 어느 사회든 해결하기 어려운 문제가 있다. 중요한 것은 정부가 그 문제를 해결할 역량과 의지를 갖고 있느냐다. 박근혜 대통령은 '태극기 달기 운동이 한창이던 지난 3월, 뜬금없이 청년들에게 '중동 진출'을 주문했다.

"대한민국 청년이 다 어디 갔냐고, 다 중동 갔다고, 텅텅 빌 정도로 한번 해보라."

현 정부에 비판적인 언론은 대통령의 시대착오적인 인식을 꾸짖었고, 호의적 언론은 대통령이 '유머'에 회의장 사람들이 폭소를 터뜨렸다는 사실을 집중 보도했다. 하지만 당사자인 청년들이 대통령의 '유머 감각'을 그리 높이 산 것 같지는 않다. '약 올리나', '니가 가라, 중동'같은 댓글이 줄줄이 달린 것을 보면 말이다. 하지만 그 자리에서 나온 정말 중요한 발언은 별로 주목받지 않았다.

"우리가 인력 미스매치(해소)를 위해서 그동안 많은 노력을 했지만 이렇게 청년들이 원하는 일자리가 절대적으로 부족하고 또 만들어질 수가 없는 이런 구조적인 문제가 있는 환경에서 국내에서 미스매치 해결하려 노력해봤자, 일자리 자체가 없는데, 의미가 없다고 생각한다."

더 이상 한국 사회에서 일자리는 만들어질 수 없으며, 따라서 국내에서 구직난을 해결하려고 노력하는 것은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놀라운 발언이 아닐 수 없다. 정부의 역할은 '구조적 문제'를 '해결하려 노력'하는 데 있기 때문이다. 이 발언은 사실상 정부 역할의 '포기 선언'이었다.

국민 '해코지'에 앞장선 정부

박근혜 정부의 '등록 상표'나 다름 없던 '증세 없는 복지'가 집권 후 어떤 운명에 처했는지 설명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현 정부가 들어선 뒤 사교육비가 2년 연속 폭등했고, 기초수급자 자살률이 최고를 기록했다는 점을 지적하는 것만으로 충분할 것이다.

불행히도, 박근혜 정부의 '포기 영역'이 일자리와 복지로 끝나지 않는다. '삼성의 위기'가 자주 거론되는 데서 알 수 있듯, 한국 재벌은 기존의 사업을 유지하고 미래 사업을 개척하는 데 실패하고 있다. 이들은 국제 제조업 시장에서 경쟁력을 잃자, 서비스업으로 국내 공공 영역을 침식하는 해로운 '수익 모델'을 추구하고 있다.

예컨대 민간 보험으로 국민건강보험의 토대를 흔들고, 영리 병원으로 돈 없는 서민의 건강을 위협하며, 교육을 이윤 추구의 장으로 탈바꿈하는 것이다. '기업가 정신'보다 안전한 돈벌이에 눈이 먼 재벌 3세들은 빵, 치킨, 컵밥까지 진출해 자영업자들의 생존 터전을 잠식해가면서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이럴 때 정부의 역할은 기업의 탐욕으로부터 국민을 보호하는 것이다. 낡아서 위험한 배를 운영할 수 없도록 막고, 정원을 넘겨 태울 수 없도록 규제하고, 안전 점검과 대피 훈련을 강제하는 것처럼 말이다. 이명박 정부가 규제를 풀어 끔찍한 재앙을 불렀듯, 박근혜 정부는 '규제 철폐'라는 명목으로 공공 서비스를 무력화하고 있다. 

박 대통령이 앞장서서 추진해 온 서비스산업발전기본법안, 관광진흥법안, 국제의료사업지원법안, 의료법 개정안 등이 그것이다. 그는 법 통과가 늦어지자, "누구에게 해코지를 하는 것도 아니고 좋은 법인데, 누구를 위해 법을 막고 있느냐"고 불평했다. 물론 누구에게는 '좋은 법'이겠으나, 대다수 국민은 '해코지'하는 법일 수밖에 없다.

'애국' 담론으로 다시 칼자루를 쥐다

한국진보연대와 참여연대, 녹색연합 등 각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살아있는 탄저균이 오산미군기지에 반입된 것에 대해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치사율 95% 미국 탄저균, 반입 규탄한다" 한국진보연대와 참여연대, 녹색연합 등 각계 시민단체 회원들이 지난달 29일 오후 서울 종로구 미대사관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어 살아있는 탄저균이 오산미군기지에 반입된 것에 대해 진상조사를 촉구하고 있다.
ⓒ 유성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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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는 어떨까? 중국의 부상과 일본-미국의 연대, 러시아와 서방의 신냉전에 현 정부는 어떻게 대응해 왔는가. 아마 이명박 정부의 대북정책과 맥을 같이 할 것이다. "기다리는 것도 전략이다" 이른바 아무 것도 안 하는 전략. 

정말 아무 것도 안 하기 위해서는 아무 생각도 없어야 하는데, 박근혜 정부는 이 일을 썩 잘 해냈다. 예컨대 아베가 지난 4월 미국 방문해 '미-일 신밀월'을 예고할 때 박 대통령은 목적도 불분명한 중남미 순방을 떠났다. 또 5월 미군이 한국에 위험천만한 탄저균을 들여온 것이 발각된 후에도 정부는 항의도 하지 않았고, 구체적인 후속 안전 대책도 요구하지 않았다.

현 정부가 이처럼 경제, 사회, 외교 문제에 뚜렷한 돌파구를 마련하지 못할수록 '태극기'와 '애국'에 대한 호소는 늘었다. 실정을 거듭하면서도 손쉽게 정치적 권위를 유지할 수 있는 방법이기 때문이다. 물론, '애국'이 자주 등장할수록 '종북 세력' 때리기도 늘어날 것이다. '아무 생각 없는' 정부라도, 맹목적 애국심이 통하지 않는 국민이 있다는 사실을 알 만큼은 영리하기 때문이다.

박근혜 대통령은 오랫동안 '수첩 공주'라는 별명으로 불렸다. 보고 읽지 않으면 원만한 소통이 어려운 그를 조롱하는 말이었다. 하지만 이 별명은 대통령에 대한 공정한 평가가 아니다. 그는 어눌해 보이지만 매우 뛰어난 정치 감각을 지닌 정치인이다. 수첩 '공주'가 핵심 국면마다 선거의 '여왕'으로 탈바꿈해왔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앞서 말했듯, 올해 화두는 '태극기'였다. 지난해는 무엇이었을까? 말할 것도 없이 '세월호'였다. 불과 한 해 사이에 한국 사회의 관심사가 뒤바뀐 것이다. 이는 단지 화제가 '세월호'에서 '애국'으로 바뀐 것만을 의미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칼끝에 내몰렸던 정부가 칼자루를 쥐게 됐다는 사실이다.

<국제시장>의 국기 '배례(절한다는 뜻)' 장면을 언급해 많은 사람으로부터 조롱받았으나, 결국 그 어설픈 말은 거역할 수 없는 강력한 애국주의의 담론으로 둔갑했다. 대통령의 발언은 자신을 지지하는 사람을 '태극기를 사랑하는 애국자'들로, 비판자를 '태극기를 불태우는 매국(혹은 종북)세력'으로 갈라세우는 효과를 발휘했기 때문이다.

무법과 광기의 애국주의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제19회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박근혜 대통령이 지난 5월 12일 오전 청와대에서 제19회 국무회의를 주재하고 있다.
ⓒ 청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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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근혜 대통령은 '애국'을 임기 내내 화두로 삼으려 할 것이다. 황교안 법무부장관을 국무총리 후보자로 지명한 것도 이러한 맥락에서 볼 수 있다. 그는 '신임 검사 임관식'에서 애국가를 4절까지 완창하지 못한 검사들을 꾸짖으며 "헌법 가치 수호의 출발은 애국가"라고 말한 것으로 유명하다. 그는 태극기와도 인연이 깊다.

태극기 열풍이 정점에 달한 것은 지난 4월이었다. 세월호 1주기 시위에 참여한 청년이 태극기에 불을 붙인 사실이 보도됐기 때문이다. 새누리당 김진태 의원은 "태극기를 불태운 것은 국민을 불태운 것"이라며, "이런 범죄를 보고 방치하면 이런 나라를 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며 공권력을 질타했다.

당시 황교안 법무부장관은 "국기모독죄가 될 것 같다"며, "상응하는 처벌이 이뤄지도록 하겠다"고 화답했다. 그 말은 현실이 됐다. 지난달 29일 서울지방경찰청은 광화문 광장 폐쇄(CC)TV 분석 등을 통해 20대 청년을 체포했다. 경찰은 구속 영장 신청을 검토하고 있으며, 국기모독죄뿐 아니라 해산명령 불응 등 혐의까지 추가를 고려하고 있다.

태극기 훼손을 처벌하는 근거는 형법 제105조, "대한민국을 모욕할 목적으로 국기 또는 국장을 손상, 제거 또는 오욕한 자는 5년 이하의 징역이나 금고, 10년 이하의 자격정지 또는 700만 원 이하의 벌금에 처한다"는 조항이다. 국기를 태운 행위뿐 아니라, 국가를 모욕하려 한 의도가 입증돼야만 비로소 '범죄'가 되는 것이다.

황교안 총리 후보와 김진태 의원은 모두 검사 출신이다. 과거에 법을 다루는 일을 했고, 지금도 행정과 입법 활동을 하는 사람들이 법을 간단히 무시하는 발언을 한 것이다.

국민이 불행한 나라의 애국

세월호 시위는 국가의 책임을 묻는 자리였다. 김진태 의원은 국기가 타는 것을 보고 분노했지만, 유족 시위대는 국민 수백 명의 목숨이 물 속에서 꺼져갈 때 그들을 바라만 보고 있던 무책임한 정부에 분노했다. 이런 맥락에서 나온 태극기 소각의 '의도'가 국가 모욕이 아님은 자명하다. 오히려 김 의원이 말한 "이런 범죄를 보고 방치하면 이런 나라를 국가라고 할 수 있느냐"는 외침에 더 충실하다.

불행한 국민이 사는 나라, 정부가 국민을 보호할 능력도, 의사도 없는 나라. 이곳에는 '애국'이 비쩍 마른 늑대처럼 눈을 부라리며 본때를 보일 '비애국자'를 찾는다. 하지만 이 껍데기만 남은 '애국'의 광기는 두렵기보다 오히려 서글프다.

박 대통령은 <국제시장>을 언급하면서, 애국가 가사처럼 "즐거우나 괴로우나 나라 사랑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 말을 들을 때 나는 서글픔을 느꼈다. 그런 그가 '애국가 총리'를 차기 총리감으로 골랐을 때도 같은 서글픔을 느꼈다. '포기 선언'의 확실한 실천으로 보였기 때문이다.

"괴로우나 즐거우나 나라 사랑하세" 설마, 이 말이 '괴로우나 즐거우나 대통령과 집권 여당 사랑하세'로 들리는 것일까? 그 '괴로움'의 주범이 자신들이어도?

○ 편집ㅣ조혜지 기자



태그:#박근혜, #태극기, #애국가, #황교안, #김진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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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론학 교수로, 미국 펜실베니아주립대(베런드칼리지)에서 뉴미디어 기술과 문화를 강의하고 있습니다. <대한민국 몰락사>, <망가뜨린 것 모른 척한 것 바꿔야 할 것>, <나는 스타벅스에서 불온한 상상을 한다>를 썼고, <미디어기호학>과 <소셜네트워크 어떻게 바라볼까?>를 한국어로 옮겼습니다. 여행자의 낯선 눈으로 일상을 바라보려고 노력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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