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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년전, 여주로 선생님을 찾아 갔을때 모습. 왼쪽 첫번째가 반장, 그 옆이 담임선생님이시다.
▲ 선생님과 우리들 8년전, 여주로 선생님을 찾아 갔을때 모습. 왼쪽 첫번째가 반장, 그 옆이 담임선생님이시다.
ⓒ 문세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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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게는 유난히 기억에 오래 남는 선생님이 한 분 계시다. 꼭 스승의 날 때문이 아니라 방황하고 혼란스러웠던 어린 시절, 고집 세고 말썽만 피우던 나를 한 번도 화내지 않고 인자하게 대해주신 선생님이셨기 때문이다.  

32년 전, 초등학교 6학년 때, 나는 서울에서 학교를 다니다가 경기도 화성의 작은 학교로 전학을 가게 되었다. 시골 학교로 전학을 가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엄청난 충격이자 자존심에 손상을 입는 일이었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남은 한 학기를 그곳에서 보내야만 했다. 학교는 초라했다. 한 학년에 3개의 반밖에 없었고, 아이들은 너무도 촌스럽고 남루한 모습이었다. 서울에서 가까운 곳이기는 하지만 역시 시골은 시골이었던 것이다.

당시에 나는 신체에 커다란 변화가 생긴 지 얼마 안 되었을 때다. 초등학교 5학년 때까지 멀쩡하게 잘 들리던 귀가 갑자기 안 좋아졌기 때문이다. 몸도 마음도 쇠락해 있을 때 학교까지 마음에 들지 않는 곳으로 오게 되다니, 모든 것이 불만스러웠다. 불만이 쌓인 나는 '내 중심적으로' 생각하고 행동하는 일이 많아졌다. 내가 제일 잘났고, 제일 예쁘고, 나는 귀가 잘 안 들리니 너희들은 무조건 나를 도와줘야 해'라는 식으로.

당시에 담임선생님은 여자 선생님이셨다. 선생님은 나를 특별히 배려해 주시느라 반장에게 부탁하고 반장과 함께 앉으라고까지 했다. 반장은 반장답게 조숙했고, 내가 수업 시간에 제대로 받아 적지 못하거나 이해하지 못한 것을 친절하게 가르쳐 주었다. 나는 너무나 당연하게 그것을 받아들였고, 철이 없던 때라 고마운 마음을 갖지 못했다. 반장은 공부도 잘하고 글씨도 잘 썼고, 무엇보다 일기를 참 잘 썼다.

반장처럼 일기를 잘 쓰고 싶었던 어느 날, 나는 반장의 일기장을 훔쳐보았다. 반장의 일기장에는 내 얘기가 써 있었다.

"세경이 때문에 힘들다. 수업시간에 집중하기 힘들고..."

나는 모른 척했다. 어느날 반장은 내가 자신의 일기장을 본 것을 알고 화가 나서 더 이상 나하고 짝을 하지 않겠다고 담임에게 말했다. 담임은 나를 다른 아이와 앉게 했다. 다른 짝이 마음에 들지 않았던 나는 담임에게 대들고 아이들과 싸웠다. 싸웠던 일이나 적응하지 못해 다시 서울로 전학가게 해 달라는 내용을 일기장에 썼다. 담임은 그때마다 내 일기에 코멘트를 달아 주었다.

"세경아, 힘들어도 조금만 참자. 친구들과 사이좋게 지내고 열심히 공부하면 아빠도 좋아하실 거야..."

담임선생님은 얼마나 힘들었을까.  

자신이 등록금 내주겠으니 중학교에 가라고 하셨던 선생님

시골학교에서의 한 학기를 마치고 중학교를 가게 되었다. 근처에 있는 여자중학교로 배정되었는데 나는 중학교에 갈 수 없었다. 그 때만 해도 중학교가 의무교육이 아니었기 때문에 입학금과 등록금을 내야 했다. 엄마와 이혼을 하고 해외로 일을 하러 간 아버지 대신 우리 4형제는 할머니와 함께 살고 있었다. 할머니는 나를 중학교에 보낼 형편이 되지 않으니 1년을 쉬고 다음 해에 중학교에 가라고 했다. 나는 무척 속이 상했다. 이 소식을 들은 담임선생님은 자신이 등록금을 내주겠으니 중학교에 가라고 하셨다. 하지만 할머니는 나를 학교에 보내지 않았다. 친구들이 모두 중학교에 다닐 때 나는 집에서 동생들을 보며 간단히 학원이나 다니고 있었던 것이다.

중학교에 가지 못했다는 소식을 들은 아버지는 속이 많이 상해서 귀국하셨다. "귀도 잘 안 들리니 1년 동안 치료나 더 해보자"고 풀죽어 있던 나를 위로하며 달랬다. 다음 해에 친구들이 모두 중학교 2년생이 되었을 때 나는 중학교 1학년으로 입학을 하게 되었다. 입학한 지 3개월 후, 다시 서울로 이사를 했다.

잘난척하고 싸우면서 초등학교 마지막 학기를 시골학교에서 보냈지만 자꾸만 그 친구들이 생각이 났다. 물론 담임선생님도... 방학만 하면 초등학교 친구들을 만나러 버스를 타고 화성으로 내려가기도 했다. 친구들을 만나면 선생님을 찾아갔다. 선생님은 초등학교 때 그 모습으로 우리를 맞아 주셨고 우리는 재잘거리며 수다를 떨다가 오곤 했다.

30년이 넘은 지금에서야 생각해 본다. 조용했던 시골 학교에 서울에서 전학 온 한 아이 때문에 속상해했던 담임선생님, 잘난 척 만 하는 친구를 배려해 준다고 고생한 반장. 그리고 다른 친구들…. 당시에 여러 번 반장의 일기를 훔쳐보았던 나는 반장의 일기에 적힌 문장이 꽤 수려하고 초등생이라고 믿기지 않을 만큼 잘 썼다는 기억이 오래오래 남아 있었다. 

그 친구가 작년에 수필로 등단을 했다. 나는 기꺼이 가서 축하해 주었다. 초등학교 6학년 때 담임선생님이 일기장에 써 주셨던 코멘트와 반장의 일기가 자극이 되어 어느 날부터 글쓰기에 흥미를 갖게 되었다. 중학교 2년 때는 교내 글쓰기 대회에서 입상을 하기도 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블로그를 만들었고, 글쓰기 강의를 듣고, 오마이뉴스에 기사를 쓴다.

내 글을 본 사람들이 "솔직하고 재미있다"고 할 때면 꼭 그때의 선생님과 반장이 생각난다. 가끔 선생님과 연락을 하고 지내다가 8년 전에는 의기투합한 초등학교 친구들과 경기도 여주의 교육청에서 근무하고 계시다는 담임선생님을 찾아간 적이 있다. 그때 우리들을 반갑게 맞아 주시며, "이제 우리가 같이 늙어 가는구나"라고는 환하게 웃는 선생님의 미소가 보고 싶다.

몇 년째 찾아뵙지 못했는데 올해도 메시지로 때우고 만다.

"초등학교 때 그토록 속만 썩이던 제자입니다. 선생님 덕분에 이제 글도 쓰고, 별거 아니지만 공저로 책(<0416>, 한겨레 출)도 냈어요. 그 시절 선생님이 저에게 주셨던 사랑, 잊지 않고 있습니다. 늘, 건강하세요. 고맙습니다."


태그:#선생님, #스스의 날, #글쓰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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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받고 소외된 사람들에게 관심이 있다. 인터뷰집, <사랑하고 있기 때문에>를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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