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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오랜만이에요. 언니, 왜 그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어요?"

화려한 옷차림과 딱 맞는, 나긋나긋하면서도 한 옥타브쯤 높은 선아 엄마의 목소리에 나는 무덤덤한 웃음으로 답을 했다.

"그러게. 어쩌다 보니 그렇게 됐네. 잘 지네지?"

어느 틈엔가 선아 엄마는 내 손을 잡고 웃음으로 반가움을 더했다. 이런 모습을 바라보는 이들도 흐뭇한 표정에 만족스러운 웃음을 짓고 있었다. 하지만 나는 어색한 웃음으로 마지못해 답을 할 뿐이었다. 그러면서 마음속으로는 이미 이 자리에 나온 것을 후회하고 있었다.

보통 모임이라는 게 그 취지와는 무관한 것들로 시간을 보낼 때가 많다. 익히 알고 있는 것처럼 남편자랑, 자식자랑으로 드러내 놋는 우월감은 물론 자신이 걸치고 있는 명품으로 은근히 주변을 주눅 들게 만드는, 그 뿐인가?

이야기 거리가 온통 물질적으로 누리는 풍요로움이고 보면 그에 맞는 생활을 하거나 그런 것들로부터 어지간한 무심함이 아니면 괜한 자격지심으로 후회를 하게 된다. 다시는 나오지 않겠다는 치기어린 결심으로 마음까지 돌아서고 마는...

"얘, 좀 편하게 있어. 기왕 나온 거. 그리고 선아 엄마 저러는 거 원래 그러려니 하고 신경 쓰지 마. 그래도 쟤 본마음은 착하잖아. 너 보고 싶다고 얼마나 노래를 불렀는데. 그건 진심이었어. 아유, 어쨌든 너도 앞으로는 집에서 좀 벗어나야 해."
"알았어. 괜찮아."

아까부터 내 눈치를 살피던 미희를 보며 나는 웃음을 지어 보였다. 하지만 미희는 여전한 눈길로 바라보았다. 그도 그럴 것이 오늘 이 모임에 나온 것은 순전히 미희의 반 강제적인 권유 때문이었다. 아니, 그 보다는 내가 미희에게 부탁할 일이 있어 따라 나선 것이다. 미희는 모르고 있지만.

오늘 모임은 큰아이가 초등학교 다닐 때 만난 엄마들의 모임으로 17년 동안 이어져 오는 것으로 매달 한 번씩 만나 친분을 다지고 있다. 그런데 아이들이 자랄수록, 시간이 흐를수록, 그만큼의 변화에 따라 친분보다는 자기 과시하는 시간으로 바뀌어 버렸다.

그에 반해 나는 예전에 비해 특별히 나아진 것도 없고, 아니 오히려 경제적으로 더 힘들어 지고, 아이들도 아직 공부중이다보니 내세울 것이 없어 모임에서 겉도는 느낌이 들어 언젠가부터는 참석하지 않고 있다. 다만 매회 빠짐없이 모임에 참석하는 미희를 통해 소식을 전해 듣는 것으로 만족하곤 했었다. 그런데 이번에는 미희의 권유에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참석한 것이다. 그보다는 미희에게 금전적인 부탁을 하기 위해서였다.

미희는 나와 나이도 같고 성격도 비슷해서 속내를 털어놓고 지내는 사이로 경제적으로도 넉넉해서 부담 없이 만날 수 있어 좋다. 거기에 전문적인 직업도 갖고 있어 집에서 아이들을 가르치는 나와는 사뭇 다른 점이 많아 든든함을 갖게 한다.

나와 나이는 같지만 맏이라 그런지 막내인 나에게는 때로는 엄마 같고, 가끔은 언니 같은 친구. 후덕한 몸집에 무엇이든 척척, 호탕한 웃음소리에 거침없는 행동까지, 나와는 정반대이지만 그것 또한 서로에게 친구가 될 수 있는 계기가 되었고 지금도, 앞으로도,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서로에게 든든한 곁으로 함께 할 수 있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그래도 한 가지. 내가 아무리 힘들고 어려워도 금전 부탁을 하지 않고 있다. 그것은 내가 미희에게 지키는 마지막 자존심이라는 생각 때문이었다. 그리고 미희도 내 사정을 잘 알고 있어 도움을 주고 싶을 때는 돈 보다는 필요한 것들을 사 주는 것으로 대신하고 있는데 이 또한 내 자존심을 지켜주려 한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이거 곰탕이야. 우리 거 사면서 한 박스 더 샀어. 애들 먹여."
"슈퍼에 갔는데 1+1 행사를 하더라고. 미숫가루가 음료보다 몸에 좋잖아. 애들 아침 식사 대신으로 타 줘. 우리 애들도 그렇게 하고 있는데 든든해서 좋대."
"이 콜라비가 여성한테 정말 좋다잖아. 이제는 나도 건강 좀 챙기며 살아. 자, 한 상자 샀는데 너무 많아서. 먹어 봐."

별거 아니라는 식으로 말하며 슬쩍 내 손에 쥐어주는 미희를 볼 때마다 먼 친척보다는 가까운 이웃이 났다는 말을 실감하게 된다. 그런데 이번에는 갑자가 급전이 필요했고 다른 누구에겐가 말을 할 수가 없어 전전긍긍하고 있다가 미희를 떠올렸고, 결국 부탁해야겠다는 결심을 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17년 동안 지켜오던 자존심을 버려야 한다는 사실에 마음이 무거운 상태로 모임에 참석한 것이다.

그러다보니 언제, 어떻게 말문을 열어야 할지. 은근한 부담감으로 모임 보다는 미희에게 집중하게 되었고 그러면서 괜히 겉돌았다.

"왜, 오늘 좀 이상하다. 무슨 할 말 있어?"
"......."

미희의 재빠른 눈치에 나는 속내를 들킨 것 같아 손사래를 쳤다.

"참, 오늘 우리 모임 중 정육점하는 민수 엄마네서 한우 선물세트를 파는데 우리가 좀 팔아주기로 해요. 가격은 10만 원으로 양이나 질에서는 백화점에서 파는 것보다 훨씬 좋아요. 나는 계속 대 놓고 먹는데 믿을만 해요. 기본적으로 한 세트씩 사고 언니들은 두 세트씩 어때요?"

은주 엄마의 말에 모두들 별 다른 말이 없었다. 나 혼자만 거부할 구실을 찾고 있었다.

"음, 나는 3세트 살게. 시댁하고 친정에 보내야겠다. 가격도 싸서 부담이 없어 좋다."
"아유, 잘 되었네요. 실은 민수네가 요즘 좀 힘들거든요. 그럼 언니들은 3세트씩 사는 거예요? 하긴 이럴 때 언니 노릇 하는 거죠. OK?"
"......."

갑자기 주위의 모든 시선이 나에게 쏠리자 나는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이고 말았다. 어쩌면 지금 내가 민수네 보다 더 힘들지도 모르는데. 돈을 빌리기 위해 여기까지 따라왔는데...

결국, 나는 그날 모임이 끝날 때까지 미희에게 돈 부탁을 하지 못했고 대신 한우 선물세트 3개를 구입하고 말았다. 알량한 자존심 때문에... 집으로 돌아오는 내 머릿속에는 민수엄마와의 통화를 생각하고 있었다 한우 선물세트 구입을 다음으로 미루는...

덧붙이는 글 | 자존심 때문에 응모글



태그:#자존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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