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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은 영어를 몰라도 아는 척한다."

독일의 대한민국 비즈니스 안내서에 쓰여 있는 말이다. 멀리 가지 않아도 우리 주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장면이다.

길거리에서 영어로 질문을 해 오는 외국인과 맞닥뜨렸다고 생각해 보자. 물론 외국인의 질문에 얼굴이 빨개지고 손사래 치는 사람들도 있다. 그러나 영어 알파벳 좀 안다는 사람은 대략적인 영문의 맥락을 파악하고 간단한 문장과 손발을 이용해 설명을 해준다. 그렇다고 해서 이 사람이 상대방의 질문을 완전히 이해하고 대답을 한다는 것은 아니다. 그저 잘 모르는 단어에 대해서 질문하지 않고 자기가 이해한 선에서 설명을 해 주는 것이다. 그 대답은 맞을 수도 틀릴 수도 있다.

고맥락과 저맥락 사회

강준만 저 <세계문화의 겉과 속> 인물과 사상사
▲ 세계문화의 겉과 속 강준만 저 <세계문화의 겉과 속> 인물과 사상사
ⓒ 인물과사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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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관련해 최상진은 "독일인의 입장에서 이를 위선적 행동, 자기 과시적 행동 또는 체면 지향적 행동으로 받아들일지 모르나 오히려 이런 행동은 의례적 행동 또는 의례성을 띤 한국인의 사회적 행동으로 해석하는 것이 더 타당한 것 같다"고 한다. 그러면서 "서양인의 경우엔 외국인의 말을 이해하지 못할 때 다시 묻는 것이 어렵지 않다.

그러나 한국인의 대화 심리의 인지 도식에서 보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사안에 대해 구태여 다시 묻는 일 자체가 '상대에 대한 배려를 하지 않는다'라는 숨은 메시지를 갖고 있기 때문에 모르는 말도 이해하는 척하고 상대 또한 이런 행동의 이면 메시지를 이해하고 긍정적으로 받아들인다." (19쪽)

여기에서 나오는 개념이 바로 고맥락, 저맥락이란 단어다. 이 개념은 한국인의 의사소통 방식이나 미국을 비롯한 서양의 의사 소통 방식을 이해할 수 있는 좋은 도구이다.

한국인은 고맥락 사회로 구분된다. 이를테면, 한국인의 의사소통의 방법은 직접적인 말보다는 말을 하는 사람의 연령과 성별, 사회적 위치에서 오는 맥락 또는 상황을 근거로 상대방의 뜻을 미루어 짐작하는 것이다. 그래서 고맥락 문화권에서는 의례적인 말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였다가는 낭패를 볼 수도 있다.

이에 비해 저맥락 사회의 특징은 말로 표현되는 의사소통이 주요한 방법이다. 언어로 소통을 하기 때문에 말을 하지 않으면 진의를 파악하기 힘들고, 상대방이 나를 무시한다는 느낌이 들기도 한다. 그래서 동양인이 보기엔 직설적이고 무례하다는 생각까지 들 수도 있다.

"절에 가도 눈치만 있으면 새우젓을 얻어먹는다"

위의 속담은 한국인의 생활 저변에 깊이 깔려 있는 '눈치'라는 고맥락 도구에 대해 재미있는 이야기로 풀어내고 있다.

최상진의 말에 의하면 눈치란, "상대와의 접촉 경험과 상대가 처한 상황 등을 종합적으로 검토해 상대가 원하는 것을 미루어 추론해 내는 활동과 기술"로 정의한다.(21쪽)

저맥락 의사소통은 개인주의 문화의 전형적인 의사소통 방법이다. 집단주의 문화에서 자명하다고 여겨지는 많은 것들을 개인주의 문화에서는 명시적으로 이야기해야 한다. 저맥락 문화권인 미국의 사업 계약서가 고맥락 문화권인 일본의 사업 계약서보다 훨씬 더 긴 이유도 바로 여기에 있다. 에드워드 홀은, "오늘날 문서화된 협정서나 계약서 없이 비즈니스를 수행할 수 있는 미국인은 거의 없을 것이다. 미국인은 계약서에 사인하고 나면 그 협상은 끝난 거라고 생각한다."(21쪽)

이와는 다르게 아랍권 사람들에게는 계약서란 게 별 의미가 없다. 오히려 그들의 감수성을 건드리거나 체면을 깎는 것으로 생각한다. 그들은 대표되는 누군가가 말을 하면 그것이 바로 계약이다. 이들이 말하는 계약은 미국의 그것보다 더 철저한 계약의 역할을 한다.

고맥락과 저맥락 국가들에서 보이는 비즈니스의 차이

같은 동양 국가라도 혹은 같은 유럽에 있는 국가라도 맥락으로 이해하는 비즈니스의 차이는 엄청나다. 이탈리아나 스페인, 독일, 영국 등은 미국과는 또 다르다. 예를 들어 본다.

▲ 이태리인은 융통성이 지나쳐 진지하지 않다는 오해를 받는다. 규칙이나 법, 계약을 자의적으로 해석하거나 어길 때도 있다. ▲ 미국인은 곧장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원하나, 아랍인과 일본인은 본론으로 들어가기 전 이것저것 살피는 것이 많다. 관계를 중요시 여기기 때문이다. ▲ 미국인이 스페인 사람들과 사업을 하기 위해서는 인내심이 필요하다. 두세 시간 점심을 함께 먹고 협상 파트너와 어느 정도 친밀도를 높인 후에 사업 얘기를 한다. ▲ 영국인은 '공손한 꾸물대기'가 있다. 날씨와 교통에 대한 농담으로 30분을 허비했다. 이제 사업 얘기를 하려고 하니 모두 미국인을 이상한 사람으로 쳐다본다.

같은 유럽이며 비슷한 역사와 민족의 전통을 가진 나라들에게서도 이렇게 다양한 접근 방식이 있다는 게 그저 놀라울 뿐이다. 이것은 대한민국과 일본의 경우에도 마찬가지다. 서로 오랫동안 유교와 불교의 영향을 받아온 국가이며 고맥락 사회이긴 하지만 의사소통이나 비즈니스 계약에서는 상이한 모습을 보인다.

<서울신문>은 미국 관리의 '평론'을 인용해 협상 스타일에서 한국인은 화끈하지만, 일본인은 표리부동하다고 말한다. "일본 관리들은 앞에서는 '하이 하이'하며 싹싹하게 굴지만 결국 되는 일이 별로 없더라. 그래서 미국과 일본 간에는 장기 과제가 많다. 이와 반대로 한국인들의 협상 스타일은 거친 편이다. 하지만 결국 되는 일은 화끈하게 되더라." (26쪽)

일면 일리 있는 말이기도 하고 한국인들에게는 협상 파트너로서 좋은 인상을 갖고 있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어떤 방식이 자국이나 자사에 유리한 지는 꼼꼼히 생각해 봐야 한다. 앞의 말을 뒤집어 보면, 일본인은 매우 꼼꼼하고 신중하게 따져가며 계약을 맺고, 한번 맺은 계약은 철저하게 지킨다. 그러나 한국인은 화끈하게 결정하고 계약서를 내밀지만 너무 쉽게 합의하는 바람에 나중에 계약서대로 이행되지 않는 경우가 종종 있다고 한다.

한국인의 일처리는 정말 화끈하고 시원시원한가?

미국 대사관에서 근무하는 한 미국인은 "한국인을 면접해보면 거짓말을 너무 잘한다"라고 말했다. 한국을 잘 이해한다는 다른 미국인은 "한국 사람은 어떤 질문을 받았을 때 자기 생각을 말하기보다는 상대방이 듣고 싶어 하는 대답을 하는 경향이 있는 것 같다. 예의가 바르기 때문이다"라고 한다. (26쪽)

이 미국인의 이야기를 잘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한국인은 정말 예의가 바르다. 그건 사실이다. 어려서부터 배워온 것이 장유유서나 양보, 타인에 대한 배려와 이해 등이다. 유교권 문화에 젖어온 한국인들에게는 예의라는 것이 살면서 벗어날 수 없는 습관이 되어왔다. 그리고 하나 더 짚고 넘어가야 할 것이 있다. 바로 한국식 교육의 영향이다. 일본의 도제식 교육에서 벗어난 지 수십 년이 지났지만 아직도 우리 학생들의 시험을 대하는 자세는 너무나 단편적이다.

해답이 나오기까지의 과정보다는 단답형 답을 얻기 위해 학원에서 많은 돈을 치르고 있다. 대입 면접 학원은 아예 대놓고 면접관들이 원하는 답을 여러 개 놓고 외우도록 한다. 자신의 생각이 아닌 목표에 다가가기 위해 나를 테스트하는 사람의 맘에 들기 위한 정답을 배우는 것이다.

그것뿐만 아니다. 학교를 졸업하고 직장에 들어가면 상사의 '눈치' 보는 방법을 저절로 터득한다. 그러다 보니 저맥락 문화의 사람들과 어울려 있을 때는 '거짓말을 잘한다' 혹은 '예의가 바르다'는 등의 상반된 반응이 나오는 것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연줄이라든지 학연, 지연이라는 것이 집단과 공동체 내에서의 심각한 커뮤니케이션을 일시에 해소할 수 있는 장점도 있지만, 더욱 원대한 계획을 수립, 발전할 수 있는 저맥락 의사소통의 방법까지 학연과 지역의 연고주의에 매몰되는 일이 발생할 수 있다.


세계 문화의 겉과 속 - 모든 문화에는 심리적 상흔과 이데올로기가 숨어 있다

강준만 지음, 인물과사상사(2012)


태그:#고맥락 저맥락, #세계문화의 겉과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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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음악, 종교학 쪽에 관심이 많은 그저그런 사람입니다. '인간은 악한 모습 그대로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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