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섯알오름 학살터. 사진촬영한 장소에 검거자들을 세우고 총살하면 굴러떨어져 구덩이에 묻혔다고 한다. 일본군이 탄약고로 사용했던 곳이다.
 섯알오름 학살터. 사진촬영한 장소에 검거자들을 세우고 총살하면 굴러떨어져 구덩이에 묻혔다고 한다. 일본군이 탄약고로 사용했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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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단 일행이 진아영 할머니 생가를 방문한 후 들른 곳은 섯알오름학살터와 백조일손지지(百祖一孫地祉)다. 불행은 혼자 오지 않는다고 하던가. 4·3 사건이 거의 정리되어가고 제주도민들이 한숨 돌릴 즈음인 1950년 6월 25일 한국전쟁이 발발했다.

이승만 정권은 북한 인민군에 동조할 가능성이 있다고 판단되는 사람들을 잡아들인다는 명목으로 예비검속에 들어갔다. 북한군이 6월 28일 서울을 점령하자 이승만 정부는 대전 대구를 거쳐 부산으로 옮기며 수세에 몰렸다. 육군본부 정보국 김창룡(당시 대령)과장은 예비검속자 중 C,D급에 해당되는 검거자를 처형하도록 지시했다.

섯알오름 학살터

섯알오름 탄약고터는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1592-2, 1597-2번지 일대에 있다. 4·3연구소가 제공한 자료에 의하면 당시 모슬포경찰서 관내에서는 347명이 구금되어 있었다. 그 중 60명은 1950년 7월 16일 군에 인계되어 집단 학살됐다.

또한 동년 8월 20일(음력 7월 7일) 새벽 2시에는 63명이, 그리고 새벽 5시경에는 132명이 계엄사령부의 지시에 따라 모슬포 주둔 해병 제3대대 (대대장 김윤근소령)에 의해 송악산 섯알오름 자락의 옛 일본군 탄약고 터에서 집단 학살됐다.

일본군 고사포진지를 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한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들. 뒤에는 산방산의 모습이 보인다.
 일본군 고사포진지를 둘러보고 기념촬영을 한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들. 뒤에는 산방산의 모습이 보인다.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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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희생된 사람들은 당시 모슬포 경찰서 관내 4개 부락(현재 한림읍, 대정읍, 한경면, 안덕면)에 거주하던 농민, 마을유지, 교육자, 공무원, 우익단체장과 학생들이었다. 일행을 안내하던 전임 4·3연구소 김창후 소장의 설명이다.

"당시 끌려가던 사람들이 죽을 줄 알고 신발을 길거리에 떨어뜨렸다고 합니다. 동네 사람들이 신발을 보고 이곳을 찾아왔지만, 군인들이 지키고 있어 바로 수습하지 못하고 한 달여가 지난 음력 8월 21일에 수습하러 갔더니 시체들이 썩어 얼기설기 얽혀 있었고 개들이 뜯어먹어 광견병에 걸린 개들을 해병대원들이 사살하러 다녔다고 합니다."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섯알오름에 설치됐던 일본군 고사포 진지를 둘러보는 일행들.
 알뜨르 비행장을 보호하기 위해 섯알오름에 설치됐던 일본군 고사포 진지를 둘러보는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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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벌하고 흉흉한 시절에도 의인은 있는 법. 네 군데 경찰서마다 명단을 통보하며 죽여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당시 성산포경찰서장은 명령을 거부해 수많은 사람들을 살렸다. 성산포경찰서장은 한국판 쉰들러인 셈이다. 성산포경찰서에 갇혔다가 살아남은 사람들은 지금도 당시의 성산포경찰서장에게 감사를 표한다고 한다.

'백 명 이상이 한 날 한 시에 죽어 자손은 하나'라니

남제주군 대정읍 상모리 586-1번지 일대에는 송악산 섯알오름 탄약고에서 학살된 모슬포 경찰서 관내 주민 132명의 시신이 모셔있는 곳이다. 이 집단 묘역은 주민들이 학살된 6년 후인 1956년 5월 18일 유족들에 의해 조성되었다. 당시 6년간 시신 인도를 거부하던 군 당국과 가까스로 타협해 132개의 칠성판 위에 머리뼈, 등뼈, 팔뼈, 다리뼈 등 큰 뼈를 대충 맞추고 이장했다.

모슬포경찰사 관내 주민 132명의 시신이 집단으로 모셔져 있는 백조일손지지를 방문해 전임 4.3연구소 김창후 소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들.
 모슬포경찰사 관내 주민 132명의 시신이 집단으로 모셔져 있는 백조일손지지를 방문해 전임 4.3연구소 김창후 소장으로부터 설명을 듣고 있는 여수현대사평화공원 추진위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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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조일손(百祖一孫)'이란 '서로 다른 132분의 조상들이 한날, 한시, 한곳에서 죽어 뼈가 엉켜 하나가 되었으니 그 후손들은 모두 한 자손이다'는 의미로 후손들은 유족회를 구성하고 백조일손지지로 이름 붙였다.

그러나 1961년 5·16군사쿠데타 발발 후 유족들은 다시 한 번 시련을 겪었다. 쿠데타 직후 경찰에서 위령비를 파괴하고 일부 유족들에게 묘지 이전을 강요했다. 이에 23위가 다른 곳으로 이장됐으나 4·3진상규명이 시작되면서 9위가 원래 위치로 이장됐다. 현재 이곳에서는 음력 7월 7일에 합동위령제가 열리고 있다.

중일전쟁과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일본군이 만든 알뜨르 비행장

섯알오름 탄약고는 알뜨르 비행장에 탄약을 공급하던 탄약고다. 학살터와 비행장은 함께 붙어있는 셈이다. 중일전쟁이 시작되기 직전인 1931년 일본 해군은 중국 난징을 폭격하기 위해 폭격기지 확장공사를 별였다.

옛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일본군 비행장에 전투기 모형이 전시돼있다.
 옛모습 그대로를 간직한 일본군 비행장에 전투기 모형이 전시돼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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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이 중일전쟁과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모습.
 일본군이 중일전쟁과 미군에 대항하기 위해 세운 알뜨르 비행장 격납고 모습.
ⓒ 오문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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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뜨르 비행장 주변에는 부대시설로 격납고, 지하벙커, 고사포진지, 탄약고, 레이더기지, 발전시설 등 다양한 군사시설이 들어섰다. 그러나 일본의 패색이 짙어지면서 미군기의 공습이 활발해지자 1944년 8월 28일부터 12월 25일까지 일본 한신에서 비행 제56전대가 제주도로 들어와 B29에 대한 해상 요격전에 참가했다.

일본군의 자살특공대가 배를 숨겨둔 수월봉 갱도진지를 구경하는 일행들.
 일본군의 자살특공대가 배를 숨겨둔 수월봉 갱도진지를 구경하는 일행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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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군은 제주도 주둔군 중 최정예인 제111사단을 중심으로 포병대 등을 배치하고 송악산 해안특공시설을 통한 해상자살공격을 준비하고 있었다. 비행장과 군사시설 건설에는 제주도민이 대대적으로 동원되었음은 말할 필요가 없다.

덧붙이는 글 | 여수넷통에도 송고합니다



태그:#4.3유적지 방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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