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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할머니들한테 봉사활동 가는데요. 선물로 뭐가 좋을까요? 선물용으로 쓸 만한 상품 스무 개 있어요?"

10년 전 한 식품 매장에서 근무할 때의 일이다. 손님이 없어서 걱정하고 있었는데 이런 횡재가 다 있나 싶었다. 손님은 택시 운전사 복장을 하고 계셨다. 이런 분들이 계시니 우리 사회가 살 만한 곳이다 싶었다. 배달을 위해 매장을 나서던 점장은 나에게 잘하라며 눈짓을 한다. 손님은 바쁘다며 물건을 꺼내는 나를 채근한다.

"이걸로 빨리 포장해 주세요. 그리고 오천 원짜리 지폐를 만 원권으로 교환해 줄 수 있어요? 할머니들 용돈 드려야 하는데."

봉사활동 간다던 아저씨... 알고 보니

선량한 택시기사인줄 알았던 아저씨, 알고보니 도둑이었다
 선량한 택시기사인줄 알았던 아저씨, 알고보니 도둑이었다
ⓒ pixaba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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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장하던 나는 돈통을 열고 만 원권을 꺼냈다. 그리고 한 장, 한 장 세기 시작했다. 아저씨는 오천 원 권 뭉치를 손에 들고 나를 보았다. 서로 돈을 바꾸면서 또 돈을 세 보았다. 아저씨는 만 원 권 50장을 받아 지갑에 넣고 선물 포장을 빨리해 달라고 했다. 일단 아저씨에게 받은 100장의 오천 원 권이 든 봉투는 계산대 안쪽에 두었다.

다시 포장을 시작했다. 아저씨는 밖을 내다보더니 몇 번인가 들락거리며 나를 재촉했다. 그리고 포장이 다 됐다. 그런데 아저씨가 안 보인다. 밖을 내다봤다. 10분 정도 지났을까? 왠지 불길했다. 5천 원 권이 든 봉투가 생각났다. 놔뒀던 자리를 다시 찾았다. 없다. 순간 멍해졌다.

'왜 돈이 없지? 도둑이다.'

오늘 매출을 올려줄 것으로 생각했던 아저씨가 실은 도둑이었다. 포장에 열중하는 나를 정신 없게 만든 뒤 오천 원 권이 든 봉투를 훔쳐 달아난 것이다. 지금이라도 쫓아나가 "도둑이야"하고 소리를 질러야 하나? 매장을 놔두고 아저씨를 찾아 나서야 하나. 이미 아저씨가 나간 지 10분이 지난 뒤였다. 벌써 차를 타고 도망을 쳤을 거다. 바깥 거리는 전과 같이 조용한데 내 속은 달랐다.

망연자실한 채 앉아 있었다. 몇 주 전 언니가 내게 해준 말이 생각났다. 잠깐 매장에 들른 언니는 "돈통 조심해" 딱 한마디 말을 남기고 갔다. 나는 언니의 말을 귓등으로 들었는데, 장사하는 언니의 눈은 정확했다.

점장이 말했다 "야근해서 식대로 메워보면 어때요?"

50만 원을 어떻게 메워야 하나? 10시간이 넘는 노동으로 끽해야 백몇십만 원 버는 내가 50만 원을 어떻게 마련해야 할지 막막했다. 비상금이라도 있길 하나... 결국, 남편에게 말해야 했다. 남편에게는 뭐라고 말할까? 고민하던 차에 점장이 돌아왔다.

"그 아저씨 많이 사갔어요?"

아무것도 모르는 점장은 싱글벙글 웃었다.

"도둑이었어요."

점장은 내 이야기를 듣더니 나를 위로했다.

"그런 일 많아요. 아주 작정을 하고 덤비면 당할 수밖에 없어요."

점장은 전에 근무했던 곳에서 일어난 노신사 도둑에 관한 이야기를 해주었다. 나를 위로하기 위해 하는 말이었지만, 하나도 귀에 안 들어왔다. 어쨌든 내 잘못이었고 돈을 메워야 했다. 남편에게 이야기하고, 생활비 통장에서 돈을 빼서 매장에 입금했다. 점장은 내가 안 됐는지 한 가지 방안을 이야기했다.

"매일 야근을 하는 거예요. 그러면 저녁 식대가 나오니까, 그 돈을 아껴서 50만 원을 만드는 게 어때요? 천 원짜리 김밥 먹고 식대 모으면 50만 원을 만들 수 있을 거예요."

생활비 통장에서 '생돈' 50만 원을 헐어낸 것을 너무 아까워하고 있었는데 점장의 제안은 마음에 쏙 들었다. 그 이후 나는 식대로 50만 원을 만들 생각에 열심히 야근했다. 그런데 꽤 시간이 지났는데도 점장이 식대를 챙겨 줄 생각을 안 했다.

"점장님, 저 50만 원 안 주세요?"
"아휴~ 식대요. 지금 우리 매장이 그거 말고도 빵구(펑크)가 많이 나서. 저녁 식대로 그걸 메꿔야 할 거 같아요. 미안해요."

점장의 말에 화가 났다. 뭐라고 더 말하고 싶었지만, 점장의 표정은 냉랭했다.

식대 준다더니... 어떻게 이럴 수 있나

천원짜리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모으려했던 식대, 하지만...
 천원짜리 김밥으로 끼니를 때우며 모으려했던 식대, 하지만...
ⓒ wikiped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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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근 수당도 못 받으면서 식대 벌자고 천 원짜리 김밥 먹으며 야근했던 내가 미친X이다.' 

그동안 야근을 해온 까닭에 남편이 아이 저녁 챙겨 먹이느라 고생을 했다. 수당도 아닌 저녁 식대를 아껴서 도둑이 훔쳐간 돈 만회하겠다고 아이까지 고생시키다니... 남편에게 식대 모으려고 야근한다는 말을 안 한 게 그나마 다행이다.

지금 생각하면 점장에게 "이런 게 어디 있느냐"고 따져 볼 만도 한데 그때는 그런 생각을 해 보지도 못했다. 왜 그리 바보 같았을까? 솔직히 그런 생각하고 살 겨를도 없었다. 초등학교 1학년인 첫째는 내가 데리고 있었고, 4살인 둘째는 친정에서 돌봐 주고 있었다. 첫째는 학교 끝나고 남편이 퇴근할 때까지 친구네 집에 가 있었다.

아이 둘을 낳은 아줌마를 뽑아준 게 고마워서 시키는 대로 열심히 일했다. 근로 계약서를 작성했는지 기억도 안 나지만, 작성했다 하더라도 내용이 무엇인지 살펴본 기억이 없다. 그냥 하루하루 버티는 것도 힘들어서 수당이 있는지, 식대는 언제 챙겨주는지 물어볼 생각도 못했다. 그러기엔 솔직히 눈치가 보였다.

그 뒤로 일부러 야근하는 일은 없었다. 50만 원에 대한 미련을 버렸다. 50만 원을 도둑맞은 것은 분명히 내 잘못이다. 그 돈을 만회하려는 욕심을 부리다가 일이 꼬인 것이다. 50만 원에 대한 미련을 버리니 차라리 마음이 편해졌다. 처음엔 점장에 대한 배신감도 있었다. 하지만 계속 안 좋게 생각할수록 그런 점장에 속아 넘어간 내가 바보가 될 뿐이었다. 생각을 바꿔 먹었다. '점장도 처음부터 나를 속여먹으려고 그랬던 것은 아니었겠지. 어찌하다 보니 상황이 그렇게 된 거겠지...' 그렇게 생각하고 나니 마음은 편했다.

지금의 나로서는 상상도 못할 일이지만 10년 전의 나는 그랬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어린아이 둘을 둔 일하는 엄마는 웬만한 부당함은 따지지도 못하고 속으로 삭이는 경우가 많다. 지금은 좀 달라졌을까? 아직도 '을'들은 이런 답답하고 억울한 대우를 그냥 받고 살아가고 있다. 안타깝게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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