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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위대한 어머니 김봉준 작. 이소선 여사 추모 그림
ⓒ 김봉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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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동교실 개관

유신정권은 청계피복노조를 집중적으로 탄압했다. 물리적인 탄압은 일상적이었다. '국가안보'라는 전가의 보도를 휘두르면서 노동운동을 억누르는 한편 '공장 새마을 운동'이라는 미명하에 노동자의 권리의식을 왜곡했다. 또한 언론을 통해서 또는 각종 행사나 교육을 통해서 그리고 노총이나 노동조합 상층간부를 통해서 기만적인 노사협조주의를 강요하였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노조활동은 위축되고, 운동을 통해 대중적인 힘으로 전진해 나가기보다는 매사를 사무적이고 행정적으로 처리하려는 경향성을 얼핏얼핏 드러내고 있었다.

청계피복노조에서는 1972년 들어 조합원 교육 사업을 비중 있게 펼쳐나가기로 했다. 시장상가 취업근로자의 80%를 차지하는 여성근로자들은 자신의 정당한 권익 문제를 스스로 해결할 수 있는 여건마저 갖추지 못하는 처지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문제를 발견, 해결하고 나아가서는 인격과 정당한 권리를 되찾게 함으로써 노동조합의 조직을 강화하기 위해서 여성근로자들의 야간 교육과정을 설치, 운영하기로 했다.

5월 22일, 지부사무실에서 여성근로자 50명을 대상으로 중등기초과정을 가르치는 '평화새마을교실'을 열었다.

애당초 50명을 대상으로 실시하기로 하고 인원을 모집했는데 응모자는 2백여 명이나 되었다. 교육장소인 노조사무실은 겨우 7평밖에 안되었기 때문에 50명도 수용하기가 어려운 처지였다. 참으로 난감한 일이었다. 노동자들은 대개가 초등학교밖에 졸업을 못하고 곧바로 공장에 취직했기 때문에 배우고자 하는 열의가 누구보다도 강했다.

할 수 없이 2백 명의 신청자 중에서 50명을 선발하고 이들 중에서 20명은 차기에 우선적으로 배려할 것을 약속하고 30명으로 교육을 진행하였다. 교육이 진행되는 기간 중 노조에서는 교실난을 해결하기 위하여 관계기관에 백방으로 교섭활동을 벌여보았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일곱평 정도의 노조사무실에 수강생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다.
▲ 제1기 평화새마을교실 일곱평 정도의 노조사무실에 수강생들이 빽빽하게 들어 차 있다.
ⓒ 전태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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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던 차에 9월 15일, 정인숙 부녀부장이 모범근로여성으로 뽑혀 대통령 부인 육영수가 마련한 청와대 모임에 초청되었다. 이 자리에서 육영수가 부녀부장한테 필요한 것이 무엇이냐고 질문하자 정인숙 부녀부장은 지금 당장 근로자들이 공부할 교실이 필요하다고 대답했다. 육영수는 그 자리에서 노동청장한테 조치를 취하라고 지시를 내렸다.

이것이 계기가 되어 노동교실 설립추진은 빠르게 진행되었다. 10월 13일 노동청 상황실에서 노동청장을 비롯 노동청 직원 8명, 각 상가대표 31명, 그리고 노총 사무총장·연합노조 위원장·청계피복노조 지부장 외 3명이 참석한 가운데 '청계피복 새마을 노동교실 설치 간담회 개최 및 추진위원회'를 구성했다.

그리고 12월 5일, 각 시장별로 노동교실설립 추진위원회 주관으로 업주총회를 소집하여 노동교실 설립취지를 설명하고 찬동결의를 받았다. 15일에는 각 사업장별로 새마을노동교실 설립기금 350만 원을 할당해 징수에 착수했다. 1973년 5월 20일까지 258만 원이 징수되어 동화시장 옥상에 50평 규모의 건물을 장기임대 계약하고 내부시설 일체의 비품을 '아프리'에서 지원을 받았다.

5월 21일, 노동교실 개관식을 앞두고 노조는 초청장을 만들어 그 동안 청계피복노조에 관심을 보여준 분들을 초청하기로 했다. 초청장을 가능하면 정성스레 만들려고 없는 돈에 색깔을 넣어서 인쇄를 했다. 그 색은 자줏빛이었다.

개관식 날 노동청 관계자, 노총 관계자, 사용주 등의 사람들이 얼굴을 내밀러 왔다. 이날 <중앙일보>에는 노동교실 개관을 두고 '전태일 기념회관'이라는 보도가 있었다. 이에 관계기관에서 예민하게 반응했다.

그도 그럴 것이 육영수가 지시해서 어쩔 수 없이 노동교실을 만들기는 했지만, 이것이 자기네들 뜻대로 이용되지 않고 오히려 그들이 하루 빨리 지우고 싶은 '전태일'이란 이름으로 운영이 된다면 공연히 노동자들한테 멍석만 깔아주는 결과가 될 것이라 판단했을 것이다. 아니나 다를까, 그날 일이 벌어졌다.

노동교실이 있는 동화시장 옥상으로 올라오는 계단에서 사람들이 웅성거리더니 급기야 다투는 소리가 들렸다. 이소선은 노동교실을 개관하는 날인데 웬 사람들이 싸우는가 싶어 내려가 보았다. 거기에 함석헌 선생이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오도 가도 못하고 있었다.

"나는 엄연히 청계피복노조에서 초청을 해서 온 사람인데 왜 길을 막는 거야!"

함 선생이 초청장을 흔들어대면서 소리를 지르고 있었다.

"도대체 누가 당신을 초청했습니까?"

함 선생을 가로막고 있던 덩치 큰 기관원들이 몸으로 벽을 쌓고 물었다.

"내가 초청했어! 세상에 초청한 사람을 그렇게 무례하게 가로막는 법이 어디 있어요?"

이소선은 계단을 내려가면서 기관원들에게 소리쳤다. 사람들 틈에 끼어서 함 선생을 들여보내라고 소리를 지르니까 기자들이 우루루 달려와서 사진을 찍고 취재를 한다고 난리였다. 이소선은 어떻게 해서든지 함 선생을 개관식장까지 모셔가려고 했으나 역부족이었다. 그들은 사람 벽을 쌓아 꼼짝도 못하게 이소선을 막았다. 결국 아쉽게도 함 선생은 식장에도 들어오지 못하고 돌아가시고 말았다. 이소선은 화를 삭이면서 개관식을 지켜보았다.

함 선생 초청 사건이 있고 나서부터 기관에서는 청계피복노조에 대해 촉각을 곤두세우면서 탄압의 고삐를 조여오기 시작했다. 그들은 누가 함석헌 선생을 초청했는가를 조사했다. 이소선은 노조간부들한테 자신이 함 선생을 초청했다고 잘라서 말했다.

기관에서는 이승철 사무장을 의심하고 있었다. 이승철이 그날 함 선생을 모시러 갔었기 때문이다. 기관원들은 이승철한테 초점을 맞추고 탄압을 가해왔다. 이승철은 경찰서로 연행되어 곤욕을 치른 뒤 몇 시간 만에 풀려 나왔다.

"당신, 빨갱이가 아니냐. 왜 하필이면 빨간 글씨로 초청장을 만들어 그런 반정부적인 인사를 초청했어? 나쁜 의도가 있었던 것이 분명하다."

기관에서 거의 억지를 부리면서 노조를 탄압하기 시작했다.

"함 선생은 참 좋은 분이기 때문에 초청했다. 우리한테 도움이 될 뿐만 아니라 앞으로도 좋은 것을 배우게 될 테니까 내가 불렀는데 그게 뭐가 문제가 된단 말이냐?"

이소선은 이해할 수가 없었다. 노동자들을 도와줄 수 있는 사람을 반정부 인사라니……. 이소선은 지지 않고 강력하게 맞섰다.

이소선이 함석헌 선생을 알게 된 것은 전태일이 죽고 노동조합을 결성하고 나서부터였다. 1970년 12월 초쯤이었다. 최종인, 이승철과 그 친구들 여럿이 창동 이소선 집에서 함께 모여 살고 있었다. 어느 날 새벽이었다.

"계십니까? 계십니까?"

밖에서 어떤 남자 목소리가 들리더니 문을 두드렸다. 이소선은 신 새벽에 누가 찾아왔는가 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문을 열려고 하니까 어떤 남자가 대문을 열고 들어왔다. 이소선은 방문을 열려다 들어오는 사람의 등 뒤에 서 있는 노인에게 눈길을 던졌다. 한눈에 보기에도 희한한 사람이었다. 그 노인은 허연 수염을 가슴께까지 기다랗게 늘어뜨리고 흰 두루마기를 입은 채 새벽녘의 어둠 속에 서 있었다.

"여기가 전태일이네 집이죠?"

남자가 방문 앞에까지 왔다.

"어따, 예수가 왔는갑다?"

이소선은 문득 그 생각이 떠오르자 말문이 턱 막혔다. 생전 처음 보는 사람이 안개가 자욱하게 낀 새벽에 찾아와서 문을 열고 있는 모습이 마치 신령님 같기도 하고, 예수님 같기도 했다. 이소선은 하도 놀라서 말이 안 나왔다. 방안에 있던 전태일 친구들도 귀신에 홀린 것처럼 멍하니 그의 뒤에 서 있었다. 새벽에 이게 무슨 일인가.

"어머니 계십니까?"

허연 수염을 앞으로 내밀며 그 노인이 부드러운 음성으로 말했다.

"제가 태일이 엄만데요."

이소선은 눈을 껌벅거리다가 그 말만 겨우 하고 입을 다물었다. 다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이소선이 말을 마쳤는데도 그 노인은 물끄러미 바라만 보고 있을 뿐 말이 없었다. 새벽 안개 같은 침묵이 흐르고 있었다. '들어오세요. 어디서 오셨어요?'라는 말이 머릿속에서만 뱅뱅 돌 뿐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그저 멀거니 그 노인의 흰 두루마기를 바라보고만 있었다. 잠시 후 그 예수 같은 노인은 마당으로 들어서고 어떤 양복 입은 사람이 들어왔다.

"새벽녘에 이렇게 불쑥 찾아와 놀라셨습니까?"

양복 입은 사람은 허리를 약간 숙이더니 공손하게 인사를 했다.

"아닙니다……. 그런데 어쩐 일인지요?"

그 양복 입은 사람은 사람처럼 보였다. 그때서야 말문을 열고 양복 입은 사람을 똑바로 쳐다볼 수가 있었다.

"저분은 함석헌 선생님입니다. 선생님이 미국에 가셨다가 전태일이 죽은 소식을 듣고 볼일도 돌보시지 않고 곧장 귀국하셔서 곧바로 여기에 오신 겁니다."
"그렇습니까? 하여간 이렇게 찾아와주셔서 고맙습니다. 어서 들어오시지요. 실례지만, 함 선생님은 어떤 분이십니까? 참, 밖에 계시는데 안으로 들어오시라고 하세요."

이소선은 함 선생님이라는 분이 누구인지는 몰라도 새벽에 미국에서 찾아왔다는 말에 고마운 마음이 앞섰다. 함 선생이 방에 들어오셨다.

"이렇게 가슴 아픈 일을 보고 내가 미국에 있고 싶은 생각이 없어져서 서둘러 귀국했습니다. 집에도 들리지 않고 곧장 이리로 왔습니다. 이렇게 애석하고 위대한 죽음을 했는데 내가 어떻게 외국에 머무를 수가 있겠습니까?"

함 선생은 주름진 눈에 슬픔을 가득 담고 이소선의 손을 잡으며 말했다. 노인의 말을 듣고 있으려니 진정으로 고마운 생각이 들었다. 함 선생은 흰 수염을 손으로 쓸더니 전태일 친구들에게로 고개를 돌렸다.

"정말 여러분들이 열심히 해서 전태일군이 원하는 근로조건 개선을 이루어야 합니다."

함 선생은 이소선과 전태일 친구들에게 좋은 말씀을 많이 해주셨다. 그리고 선물도 가지고 오셨다.

함 선생은 돌아가시면서 무슨 일이든지 갑갑하고 안 풀리는 일이 있으면 당신을 찾아 오라고 당부하셨다. 그때부터 이소선은 함 선생을 알게 되었고, 노동운동을 하다가 어려운 일이 있으면 원효로 댁으로 찾아갔다.

함 선생은 '씨알의 소리'에 전태일 사건에 관한 글도 싣고, 해마다 전태일 추도식을 씨알의 소리 주최로 개최했다. 선생은 전태일을 항상 '전태일 선생'이라고 불렀다. 그래서 이소선은 손자뻘 되는 태일이를 무슨 선생이라고 부르느냐, 듣기가 거북하다고 했다.

"우리는 아무리 부르더라도 그에 맞게 알아서 부르니까, 어머니는 누구한테 가서 그런 말 하지 마시오."

함 선생이 말했다. 함석헌은 전태일을 인간으로서 할 일, 즉 도리를 다 하고 먼저 죽었으니 당연히 선생이라고 불러야 한다고 강연을 했다.

덧붙이는 글 | [이소선 평전<어머니의 길.]은 매일노동뉴스와 함께 연재합니다.



태그:#이소선, #전태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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