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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님과 함께 여행 온 듯 즐겁게 놀 수가 있었다.
▲ 명절에 친정 먼저 갔더니..^^ 부모님과 함께 여행 온 듯 즐겁게 놀 수가 있었다.
ⓒ 배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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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너는 느그 아빠한테 돈 한나도 안 벌어주고 시집 가냐?"

오래 전, 고모할머니가 내게 한 말이다. 옳은 말씀, 나는 제 때에 학교를 졸업하고 취직한 효녀가 못 됐다. 공부를 하도 안 해서 대학을 6년 다니고, 졸업을 앞두고는 결혼 해버렸다. 여느 집의 속 깊은 딸처럼, 명절 음식 준비하는 엄마 옆에서 일손을 보탠 적이 없다. 차려 놓은 제사상을 눈여겨보며 "엄마 혼자서 고생했겠다" 헤아린 적도 없다.

우리 엄마 '조팔뚝' 여사는 전남 영광 법성포에서 굴비 엮는 일을 한다. "춘하추동 잡히는 조기, 그래서 하늘이 내린 물고기"는 아직도 동네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엄마와 동료들은 추석과 설이 닥치기 한 달 전에는 새벽 3시부터 일하러 나간다. 굴비 20마리를 한 두릅으로 엮으면 400원, 엄마는 쪼그려 앉아서 하루에 300개까지 엮는다.

엄마의 삭신은 명절 때 더 쑤시고 아프다. "나도 나이를 먹었는가비야. 죽은 사람인데끼 누워서만 있었씨야"를 며칠간 해야 한다. 날마다 병원 가서 물리치료를 받아야 한다. 내가 엄마 편하게 해 주는 방법은 한 가지, 우리 남편을 안 데려가는 거다. "사위는 어렵제. 밥상에 공력을 들여야 한게"라고 하는 엄마의 짐을 덜어주는 거다.

뜻밖의 자유를 즐기던 남편도 나이를 들었나. 집에 혼자 있는 게 외롭다고 했다. 작년부터는 기필코 따라나선다. 며칠 전에 엄마한테 전화했더니 "오지 마야. 느그 안 오믄, 나도 편하고 좋아야"라고 했다. 나는 엄마한테 갖다 주려고 챙겨 놓은 인삼, 홍삼, 과일, 버섯 가루가 신경 쓰였다. 추석을 사흘 앞둔 9월 5일 오후, 다시 전화를 했다.

"조여사, 나 그냥 엄마 집에 갔다가 바로 올게. 지현이랑 꽃차남이랑 셋이서만."
"오믄 좋제. 내 몸이 고생시라워도 오믄 좋아. 조심해서만 와라이."

9월 6일 토요일. 일어나자마자 꽃차남 옷만 입히고 밥도 안 먹고서 출발했다. 귀성차량이 많아서 서해안 고속도로 군산에서 부안 구간은 밀렸다. 배가 고파왔다. 국도로 접어든 선운사 입구, 도착하려면 30분 남았는데 "엄마, 밥상 차려 놔" 라고 독촉했다. 엄마네 집 아파트 주차장에는 언제부터 나와서 기다리고 있던 아빠가 있었다.

엄마는 우리 꽃차남을 보고는 얼굴이 환해졌다. "우리 강아지 생각만 하믄 한허고 좋아. 아무리 힘들어도 힘이 막 난당게"라고 했다. 엄마는 동그랑땡을 지지고, 굴비를 굽고, 김장김치를 새로 헐어서 내왔다. 입맛 없다는 엄마는 우리 자매와 꽃차남, 아빠 밥그릇을 합친 것보다 더 많은 밥을 먹었다. 지현이 "조여사, 살아있네!" 하며 놀렸다.

"완전 비상이었씨야. 느그가 갑자기 온다고 한게는 어젯밤 12시부터 지금까지 장만하고 있었다이. 괜찮해야. 초저녁에 잠깐 자기는 잤응게."

딸네 동생네 나눠준다고 반죽한 동그랑땡.
머리가 어지럽다.
▲ 동그랑땡 반죽 딸네 동생네 나눠준다고 반죽한 동그랑땡. 머리가 어지럽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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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가 넓고 큰 양은대야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안에는 동그랑땡 재료가 있었다. 그 옆에는 쌀 넉 되(6.4kg), 쑥과 모싯잎 넉 대(6.4kg)를 섞어 놓은 송편 반죽이 있었다. 우리가 시댁에서 명절 지내고 친정 오면, 각종 나물과 전이 대형 김치 통에 가득가득 있고, 송편이 넓은 채반에 끝없이 쌓여 있고, 항아리에 식혜가 있었는데 이제서야 예사롭지 않았다.

엄마는 밥 먹자마자 '장만' 준비에 들어갔다. 수십 년 동안 당신 혼자서 해 온 일, 나이 예순 넘어서 철나기 시작한 아빠가 거들면서 같이 하는 일. "느그 아빠는 만들기 싫어갖고, 송편을 사람 얼굴만 하게 만들어버린다이" 고자질하는 엄마 얼굴이 해맑았다. 이 사람 저 사람한테 싸주려고 많이 하는 음식. 우리 자매는 밖으로 나가자고만 했다.

친정동네 법성포구에 있다.
우리가 알던 절집과는 다르다.
이국적이다.
▲ 백제 최초 불교 도래지 친정동네 법성포구에 있다. 우리가 알던 절집과는 다르다. 이국적이다.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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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
▲ 간다라 문화 백제 불교 최초 도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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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는 백제 불교가 처음 들어온 곳, 인도 스님 마라난타가 온 곳이라고 밝혀진 곳이다. 그래서 백제불교 도래지가 있다. 친정집하고도 가까워서 엄마 아빠는 봄에 고사리 꺾으러 다니기도 한다. 꽃 피는 봄이면, 관광버스가 수도 없이 드나드는 곳. 사이클 자전거를 타는 엄마는 쫄쫄이 바지를 입고서 동료들이랑 관광객인 양 잠깐 오는 곳이다.

도래지는 우리가 봤던 절집과는 다르다. 일주문이나 사천왕상이 없다. 간다라 양식으로 세워놓은 건축물은 이국적이다. 햇볕은 뜨겁고, 도래지 터는 넓고. 아빠는 그늘에 앉았다. 엄마랑 지현이는 "어디 좋은 데 여행 온 것 같다. 너무 좋다"고 감탄했다. 꽃차남은 산책길 너머로, 갯바닥을 기어 다니는 게를 본다고 나한테 안으라고만 했다. 엄마가 말했다. 

"아이, 꽃차남아. 네가 느그 엄마를 안아줘야 쓰겄어야. 느그 엄마는 어려서부터 쓰러지게 생긴 사람이여. 이리 와야. 차라리 할머니가 안아줄팅게."

카페 가다가 본 메밀꽃밭에서
▲ 지현과 엄마 조팔뚝 여사 카페 가다가 본 메밀꽃밭에서
ⓒ 배지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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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은 맑고 높았다. 햇볕은 눈부셨다. 자동차 안은 어마무시하게 뜨거울 것이다. 나는 혼자 주차장까지 달려가서 차 시동을 걸고 에어컨을 세게 켰다. 엄마가 산책하면서 수 없이 쳐다본 동네 카페, "나 같은 사람이 어쭈고 가? 시키는 방법도 모르는디!" 낙담하게 만든 곳에 간다. 카페 맞은편에는 메밀꽃과 코스모스가 피어 있었다.

유난히 코스모스를 좋아하는 지현은 "까악!" 소리를 지르며 달려갔다. 사진 찍을 때만 아내에 대한 사랑이 폭발하는 아빠는 엄마한테 "빨리 오소" 채근했다. 이 세상에 카메라 울렁증이 있다는 걸 모르는 듯 환하게 웃는 아내한테 "자네는 어쭈고 그렇게 웃는당가? 나는 얼굴이 안 펴진당게. 주름이 많아서 더 그럴까이?" 했다.

아빠는 팥빙수를, 엄마는 '도시 커피'인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두 분은 생전 못 오는 곳인 줄 알았던 카페에, 딸자식 데리고 온 게 자랑스러운지 자꾸 주위를 둘러봤다. "아따, 좋다이" 하는 부모님을 바라보는 게 좋았다. 지현은 꽃차남이 하자는 대로 카페에 있는 테라스로 나가서 바다를 보고 왔다. 그리고는 말했다.

"꽃자매(나를 이렇게 부름), 우리 엄마네 송편 만들어주고 갈까?"

친정 아빠와 꽃차남
▲ "나도 딸자식이랑 카페에 다 오네이." 친정 아빠와 꽃차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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법성포구
▲ 법성포구 법성포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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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편을 잘 빚으면, 예쁜 딸을 낳는다는 말이 있다. 번지르르한 언사인 게 분명하다. 공장에서 찍어낸 듯이 송편을 잘 빚는 우리 엄마는 딸 셋을 낳았다. 키도, 얼굴도, 고만고만한 딸들한테 아직도 "이만하면 이쁘게 잘 낳았제. 더 바랄 것이 있가니" 한다. 나는 송편 빚는 솜씨가 엄마랑 닮았는데 아들만 둘이라서 미스터리로 남겨둘 수밖에.

딸들 마음이 변할까 봐 엄마는 송편 빚을 채비를 했다. 결혼해서 처음으로 송편을 빚어본 지현은 엄마 송편하고는 하나도 닮지 않았다. 그러나 빨랐다. 나는 오로지 질만 추구했다. 나중에 밥벌이 못하면, 영광에 내려와서 모싯잎 송편 만드는 가게에 취직하고 싶다고 했다. 진지한 편인 조여사는 "내 지영이는 사장을 해야제. 고생스러워서 안 되네"라고 했다.

지현과 나는 어린 시절로 돌아간 듯 별 거 아닌 일에도 낄낄대며 웃었다. 처량한 노랫소리에도 대폭소가 터졌다. 친정집은 복도식 아파트인데 어느 집에서 현관문을 열어놓고서 조용필 '옵하' 노래를 최대한 크게 켜 놓았다. 지현은 "도시 사람들은 배워야 해. 누구 하나 항의하는 사람이 없잖아"라고 했다. 조여사는 진지하게 말했다.

"같이 살던 어매 죽고 나서 저래야."
"슬퍼서 그래?"
"좋아서 그럴지도 모르제. 어매가 예순 다 된 아들을 그러케 볶아 먹었어야."

엄마랑 지현은 송편 빚는 속도가 더 빨라졌다. 나는 스물다섯 개쯤 만들었는데 피로가 몰려왔다. 그럴 때는 바로 누워야 한다. <도라에몽> 만화를 실컷 보고 나서 직접 만든 카드를 가지고 놀던 꽃차남은 이불을 갖다가 나한테 덮어주었다. 나는 "오메, 꽃차남 없는 사람은 어쭈고 살까 몰라이" 하며 조팔뚝 여사 흉내를 냈다. 엄마는 말했다.

"오메, 명절에 우리 딸들이랑 송편을 다 빚네이! 어쭈고 이렇게 좋은 날이 다 왔을까이."

딸 셋, 아들 하나를 둔 덕에 일생을 혼자서만 음식 준비한 엄마.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하는 겁니까요?
▲ 송편 빚는 조팔뚝 여사 딸 셋, 아들 하나를 둔 덕에 일생을 혼자서만 음식 준비한 엄마. 그런데 왜 그렇게 많이 하는 겁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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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일곱 번 이상은 쪄내야 송편 빚기가 끝난다.
우리 자매는 세 번 쪘을 때에 군산 집으로 돌아왔다.
▲ 송편 이렇게 일곱 번 이상은 쪄내야 송편 빚기가 끝난다. 우리 자매는 세 번 쪘을 때에 군산 집으로 돌아왔다.
ⓒ 배지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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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명절에 친정 먼저 갔더니, #송편 빚기, #명절 음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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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쓰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소년의 레시피』 『남편의 레시피』 『범인은 바로 책이야』 『나는 진정한 열 살』 『내 꿈은 조퇴』 『나는 언제나 당신들의 지영이』 대한민국 도슨트 『군산』 『환상의 동네서점』 등을 펴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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