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벽보에 붙어있는 집 광고. 이렇게 광고가 많은데 방구하기는 만만치않다.
 벽보에 붙어있는 집 광고. 이렇게 광고가 많은데 방구하기는 만만치않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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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세요. 저는 한국 여자예요. 방을 보고 싶어요. 볼 수 있어요?"

스페인에 도착한 뒤 한 달 동안은 학원에서 구해준 집에서 임시로 살면서 앞으로 내가 살 집을 구했다. 해외에서 집을 구하는 건 처음이라서 많이 긴장했다. 그때 느낀 긴장감은 지금도 잊히질 않는다. 핸드폰 문자메시지로 '집을 구한다'는 내용의 문구를 스페인어로 작성해 놓은 뒤, 거리 곳곳에 붙은 광고물에서 위치와 가격이 괜찮은 곳을 골라 문자를 보내면, 10개 중 한두 개 정도에서 답장이 오곤 했다.

방을 보러 가기 전에 같은 아파트에서 지내던, 그나마 나보다 스페인어 실력이 나은 학원 친구들과 앉아 집을 구할 때 물어볼 말을 스페인어로 작문하던 기억도 떠오른다.

"전기세, 물세 포함이에요?"
"보증금은 있나요?"
"계약기간은 얼마나?"
"인터넷은 돼요?"

하지만 스페인 사람들은 한국의 전세 시스템을 아무리 설명해줘도 잘 이해하지 못했다. 구구절절, 실컷 설명을 다한 뒤 들었던 대답은 "결론적으로는 돈을 하나도 안 내고 산다는 거잖아?"였다. 은행 이자의 개념이 없는 이들로서는 이해가 안 될 수밖에 없는 일이다. 전세도, 보증금을 걸고 월세를 깎는 개념도 없는 이곳에서 유일하게 집을 구할 수 있는 방법은 100% 월세다.

대안이 없으니 꼬박꼬박 월세 내며 살 수밖에

내가 한국에 있을 때는 전세 대란이 시작되기 전이었고, 하늘과 가까운 동네를 전전하고 살다 보니 서울살이 15여 년 동안 한 번도 월세로 살아본 적이 없었다. 또 비교적 저렴한 전세를 구해 살았기에, 고정수입 없이 해외생활을 하면서 월세로 산다는 것이 상당히 부담스러웠다.

월세 부담은 이곳 사람들에게도 마찬가지다. 시내 중심가는 셰어 아파트 방 하나에 적어도 300~350유로(한화 약 40~46만 원) 정도는 줘야 하고, 외곽은 250~300유로는 줘야 한다. 물론 더 저렴한 곳도 있지만 괜찮은 상태의 집을 구하려면 이 정도 돈은 있어야 한다. 간혹 이 금액에 전기요금, 인터넷 비용이 포함 안 된 집도 있다.

스페인 젊은 세대를 두고 1000유로 세대라고 한다. 우리나라 88만원세대처럼 젊은이들의 평균소득 수준을 두고 하는 말이다. 1000유로 중 300유로 정도의 월세와 관리비 등등을 내고나면, 한 달 살기가 빠듯하다. 다른 유럽국가에 비해 스페인은 젊은이들이 독립하는 비율이 낮다고 하는데, 이는 단지 가족중심적인 문화 때문만은 아닌 듯하다.

난 이미 월세 생활 4년차인데도 여전히 월세를 내야하는 월초가 되면, 속이 좀 쓰리다.

스페인 주거문화의 특징 중 앞서 이야기한 셰어문화를 빼놓을 수 없을 듯하다. 이곳은 1인 가구 주택이 거의 없고, 있다고 해도 가격이 비싸다. 따라서 나처럼 혼자 사는 사람은 대부분 아파트 전체를 빌리기보다는 여럿이 아파트를 나눠서 빌리는 방법을 선택한다. 방 한 칸 구하기가 집구하기보다 더 까다로운 것은 바로 이 때문이었다. 단지 방만 볼 수는 없는 일, 같이 살 사람들을 잘 파악하는 일이 남아있기 때문이다.

집 구하기만큼 어려운, 같이 살 사람 파악하기

누군가 농담처럼 집 값 위에 붙여놓은 2유로 스티커. 농담이 아니면 좋겠다.
 누군가 농담처럼 집 값 위에 붙여놓은 2유로 스티커. 농담이 아니면 좋겠다.
ⓒ 홍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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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파트를 셰어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20대 초반의 대학생들이다. 모든 대학생들이 그런 것은 아니지만, 젊은이들은 대부분의 일상이 파티라서 같이 살면 피곤할 거라는 게 주변 친구들의 충고였다. 집을 셰어할 때 피해야 할 대상 1호가 대학생이라는 이야기까지 곁들이는 친구도 있었다.

여기에 더해 주변 친구들은 각 나라별 특징을 들어 아파트 공유인으로 부적합한 경계 대상들을 브리핑해줬다. 경계심을 심어주는 바람에 잔뜩 의심을 품고 방을 구하다 보니 이래저래 흡족하게 마음에 드는 곳을 쉽게 찾는 것이 쉽지 않았다. 사실 살아보기 전에는 알 수 없는 일인데 말이다.

혼자 생활을 하는 것에 익숙하고, 아예 모르는 사람들과 한 공간을 사용해 본 적이 없어서 공간 공유에 쉽게 적응할 수 없었다. 처음 살던 곳은 방 세 개에 거실, 화장실, 부엌을 공유하는 아파트였다. 거실이 공동 공간이라 해도 다른 방 친구들이 나와 있으면, 어울려서 함께 쉬는 게 그리 편한 일은 아니었다. 그래서 웬만큼 익숙해지기 전까지는 대부분 혼자 방에서 지냈다. 그렇게 방콕만 했더니 하루는 한 친구가 "너는 왜 방에만 있어?"라고 묻기도 했다. 솔직하게 "니가 불편해서!"라고 대답해주고 싶었지만 꾹 참았다. 거실도 이러니, 화장실 사용의 불편함은 상상에 맡기겠다.

전기요금과 수도요금이 포함된 월세를 내며 살다 보니 은근히 전기사용이나 물 사용에 신경도 써야 하고, 공동 공간 청소문제도 적잖은 스트레스를 안겨줬다. 거기에 가끔 동의 없이 집에서 열리는 파티들도 내게 스트레스를 선사했다.

이곳 친구들은 아파트 셰어가 익숙한지 타인의 눈치를 전혀 보지 않고 공동 공간을 이용한다. 난 그들의 그런 모습이 신기하면서도 곳곳에 숨어 있는 불편함을 마주할 때면'같이 사는 건데, 너희 눈치 좀 보고 살아야 하지 않겠니?'라고 이야기하고 싶어졌다. 하지만 그런 말을 던졌다간 동양에서 온 시어머니가 될까봐 또 한 번 꾹 참는다.

내 돈 내고, 왜 같은 세입자들 눈치를 보고 살지? 하다가 천성이 이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걸 어쩌랴하며 또 한 번 꾹... 이렇게 참을 인자 세 개를 그리고 나서야 공동생활에 어느 정도 익숙해졌다. 하지만 여전히 내 독립공간에 대한 그리움은 남아있다.

집주인 권리보다 세입자 권리가 우선인 스페인

집구하기와 공동생활의 불편함으로 점철된 나날들이었지만, 한국 세입자와 스페인 세입자 간에는 큰 차이가 있다. 이곳에선 '세입자라서 서럽다'는 생각이 많이 들지 않는다는 점이다.

스페인은 현재 경제위기라 월세가 오를 일이 없다. 또 이곳에선 세입자 권리가 우선이라 당장 월세 몇 달 못 낸다고 해서 집주인으로부터 '당장 방 빼!'라는 소리를 들을 일이 없다. 하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이곳에선 집을 빌려 쓴다는 느낌보다 그 공간을 함께 공유한다는 개념이 더 강하다는 것이다. 세입자가 아닌 공간 공유인의 느낌이랄까. 여기선 아파트를 나눠 쓰는 사람을 아파트 동료(compañero)라고 하는데 '동행하다(acompañar)'라는 동사에서 파생된 단어다. 말 그대로 '공유인'인 셈이다.

난 현재 어느 정도의 불편함은 겪고 있지만, 이곳에서 경험하는 공간 공유가 많은 장점을 가지고 있다고 생각했다. 최근 들어 한국도 셰어 아파트, 공유공간 등에 대해 관심을 많이 갖고 있는 것으로 보이는데, 중요한 것은 경제적 부담 최소화를 위한 무조건적 공유가 아닌 각자가 원하는 합리적인 공유방식을 찾는 것이다. '공간'이란 '함께이며 또한 따로'가 분명 존재해야 하는 곳이며 '공유'역시 무엇을 함께 할 것인가에 대한 동의가 분명 필요한 것이기에 말이다.

스페인의 집 문제도 나날이 심각해지고 있다. 은행장기대출금을 못 갚아 쫓겨나는 사람들이 많아지면서 심각한 사회적 문제가 됐다. 또 집 없는 사람도 늘고 빈집들도 늘어나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지속되고 있다. 최근 스페인의 주거문제 해결을 위한 운동을 하는 사람들이 내거는 슬로건 "집 없는 사람 없고, 사람 없는 집이 없는 세상". 쉽고 당연한 일인데 그게 참 어려운 세상이다.


태그:#스페인, #세입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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