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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년 전, 이맘 때 즈음 유라시아 횡단여행을 떠났습니다. 변변한 외국어 실력 없이 오롯이 패기 하나로 떠난 여행이었습니다. 배낭을 짊어지고 낯선 땅을 돌며 보낸 4개월의 시간은 하루하루가 도전의 연속이었습니다. 10여 개 국가를 여행했고 평생 잊지 못할 경험을 하고 돌아왔습니다. 늦었지만 서랍 속에 간직했던 묵혀둔 일기장을 공개합니다. -기자 말-

슬류댠카에서 포트바이칼까지 약 85킬로미터를 달리는 환바이칼 열차.굼뜬 속도는 한 시간에 대략 15.5킬로미터밖에 이동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이칼 호수를 따라 달리는 풍경이 환상적이다.
▲ 환바이칼 열차 슬류댠카에서 포트바이칼까지 약 85킬로미터를 달리는 환바이칼 열차.굼뜬 속도는 한 시간에 대략 15.5킬로미터밖에 이동하지 못한다. 하지만 바이칼 호수를 따라 달리는 풍경이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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밤새 잠을 설쳤다. 눈을 감으면, 바이칼 호수의 모습이 떠올라 쉽사리 잠이 들지 않았다. 거대한 얼음평야로 변한 영상이 머릿속을 휘젓고 다니며, 가슴을 요동치게 했다. 마치, 어릴 적 소풍 떠나기 전날 밤 느끼는 설렘, 실로 오랜만에 느끼는 감정이다. 하지만 북받치는 감정도 잠시, 새벽녘 밀려오는 졸음에 눈꺼풀이 자꾸만 내려앉는다.

드디어 오른 환바이칼 열차, 얼음평야 풍경에 매료되다

환바이칼 열차는 꽁꽁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의 둘레를 따라 달리는 기차다. 얼음평야로 변한 바이칼 호수의 모습이 환상적이다.
▲ 바이칼 호수 환바이칼 열차는 꽁꽁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의 둘레를 따라 달리는 기차다. 얼음평야로 변한 바이칼 호수의 모습이 환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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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바이칼 열차 중 지역열차는 대부분 현지 주민들이 이용한다. 간이역마다 짐을 옮기기 위해 마중 나온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 러시아 여성의 위엄(?) 환바이칼 열차 중 지역열차는 대부분 현지 주민들이 이용한다. 간이역마다 짐을 옮기기 위해 마중 나온 사람들을 쉽게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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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튿날 느지막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을 뜨자 다시 가슴이 쿵쾅거린다. 현지 시간 2013년 1월 24일, 드디어 환바이칼 열차에 올랐다. 슬류단카에 도착한 지 4일만이다. 비몽사몽 상태로 방안 곳곳에 흩어진 짐을 배낭에 쑤셔 넣었다. 기차에 오르기까지 시간이 좀 남았지만 들뜬 마음에 서둘러 나갈 채비를 한다. 그리곤 숙소 주인아줌마와 작별인사를 하고 배불뚝이가 된 배낭을 짊어지고 기차역으로 향했다.

대합실은 언제나 활기가 넘친다. 승강장에는 이미 타야 할 기차가 정차돼 있다. 순간, 심장 박동 수가 빨라지더니 가슴이 떨린다. 다음 목적지는 포트바이칼이다. 슬류댠카와 마찬가지로 바이칼 호수 둘레에 위치한 마을이다. 환바이칼 열차를 탄다면 반드시 들러야 하는 동네다. 그 이외 정보는 가이드북이 없고 인터넷도 되질 않아 모르겠다. 그저 지금으로써는 몸으로 부딪혀 정보는 얻는 수밖에 없다.

현지시간 1시, 드디어 기차에 올라탔다. 자리를 잡고 털모자와 장갑을 벗어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기차가 서서히 움직이기 시작한다. 비록 1량뿐인 객차지만 실내는 사람들로 가득하다. 현지주민들이 탑승하는 기차라 그런지 생필품 박스가 빈 공간에 수북이 쌓여 있다. 이윽고 출입문이 닫히자 마침내 묵직한 기차가 미끄러지듯 선로를 따라 달리기 시작한다.

객차를 가득 채운 짐 때문일까? 기차의 속도가 좀처럼 나지 않는다. 이토록 느릿느릿하게 선로 위를 달리는 기차는 지금껏 타본 적이 없다. 엉기적거리며 달리는 모양새가 느림보 거북이 같다.

달리던 기차가 얼마 이동하지 않고 다시 속도를 줄이기 시작한다. 차창 밖을 살펴보니 입간판만 덩그러니 서 있는 간이역이 보인다. 잠시 정차한 기차엔 내리는 사람도 타는 이도 없다. 곧 출입문이 닫히자 다시 기차가 굼뜬 속도로 움직인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대로 가다간 도저히 오늘 안에 포트바이칼에 도착하지 못할 듯하다. 달리는 듯하면, 멈추어 서고, 다시 속도를 올리는 듯하다가 서행하기를 반복한다. 한쪽 차창 밖에 펼쳐진 얼음 평야로 변한 바이칼을 볼 수 없었다면, 아마 지겨운 여정이 되었을 듯하다.

마을 풍경도 가라앉은 마음을 떨쳐버리는 데 한 몫을 했다. 슬류댠카에서 좀 멀어지자 간이역마다 사람들이 서 있었다. 대게는 기차에서 내리는 이들을 마중 나온 이들이다. 하차하는 사람을 부둥켜 앉고 반갑게 인사를 나누고 함께 짐을 나르는 모습이 한 없이 정겹다. 그 어떤 곳보다 사람 냄새 나는 그림 같은 풍경이다.

뜻밖에 찾아온 인연, 얼떨결에 세 명의 여인과 동행하다

슬류댠카를 출발해 포트바이칼로 향하는 환바이칼 열차에서 만난 세 명의 여인. 왼쪽부터 긴가, 파올라, 에바.
▲ 세 여인 슬류댠카를 출발해 포트바이칼로 향하는 환바이칼 열차에서 만난 세 명의 여인. 왼쪽부터 긴가, 파올라, 에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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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이칼 호수 곁을 달리는 환바이칼 열차 환바이칼 열차는 크게 두 종류다. 하나는 관광열차, 다른 하나는 지역열차. 내가 탄 지역열차는 환상적인 풍경을 볼 수 있는 커다란 장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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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칼 호수에 취해, 정겨운 풍경에 넋을 놓고 그렇게 한참을 객차 안에서 눈 구경 삼매경에 빠졌다. 그 순간, 맞은편 좌석에 앉아있던 한 여성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How are you(하우 아 유)!"

영어다. 객차 안에 나를 제외하고 관광객으로 보이는 세 명의 여자 중 한 명이다. 그의 말에 짧게 영어를 동원해 되받아치자 곁에 와 앉으며, 말을 건다. 서툰 영어 실력에 긴장이 된다. 침을 한 번 꿀꺽 들이키며, 마음을 다스려 본다.

"어디서 왔니?"
"한국. 북한이 아니고 남한."
"그렇구나. 혼자서 여행하는 거니?"
"응, 포트바이칼에 갔다가 리스트비얀카, 그리고 알혼 섬으로 갈 거야."
"오! 우리와 여정이 같구나. 저쪽에 보이는 두 명(여자)이 네 친구들이야."
"그렇구나."
"괜찮으면, 우리랑 같이 여행할래? 우리도 알혼 섬까지 가는 중이거든."
"...좋아!"

뭔가에 홀린 듯, 얼떨결에 동행을 승낙했다. 순식간에 이루어진 일이라 정신이 없었지만 어느 틈엔가 그녀의 친구들과 통성명을 나누고 있는 내 자신을 발견했다. 아마도 여행자란 공통점이 거부감과 경계심을 느슨하게 만든 듯하다. 아무튼 그렇게 갑작스레 인연이 닿은 세 명의 여인과 예기치 않게 동행을 하게 됐다.

사실 세 사람이 친구 사이라 말했지만 전혀 그렇게 보이지 않았다. 솔직히 처음 그녀들을 보곤 모녀가 여행 중이라고 생각했다. 내게 먼저 말을 건 그녀가 두 딸의 엄마인 줄 알았다. 오해할 만한 상황도 있었다. 거리상 대화를 다 들을 수는 없었지만 그녀의 꾸짖음에 둘 중 키 큰 여자애가 눈물을 흘리는 모습이 영락없이 엄마에게 혼나는 딸 같았다.

어쨌든 동행이 생기니 마음이 한결 가볍다. 무엇보다 러시아어를 아주 능숙하게 하는 긴가(Ginga)가 있어 안심이 됐다. 그녀는 엄마처럼 보이던 에바(Eva)에게 혼이 나던 폴란드인이다. 에바는 스페인에서 러시아로 유학을 온 학생이다. 그리고 나머지 한 명은 에바와 마찬가지로 스페인서 유학 온 파올라(Paula)란 이름의 키가 작은 아가씨다. 셋은 모두 러시아 크라스노야르스크 대학에서 공부를 하고 있단다.

오후 6시 50분, 해가 뉘엿뉘엿 저물고 그때야 비로소 포트바이칼에 도착했다. 장장 5시간 30분이 걸렸다. 구글 맵으로 검색을 해보니 슬류댠카역에서 포트바이칼까지 거리가 약 '85km'라고 표시됐다. 한 시간에 약 15.5km씩 이동한 거다. 순간, 기차가 굼벵이 한 마리로 보였다. 정말, 환상적인 모습의 바이칼 호수와 그 곁에 어우러진 소박한 동네의 풍경이 없었다면, 두 번 다시는 타고 싶지 않은 기차다.

얼음 위를 달리는 보트를 타다

꽁꽁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를 보트를 타고 건넜다. 일종의 택시역할을 하는 이 보트는 고무보트 위에 작은 선박이 얹혀져 있고 후미에는 거대한 선풍기가 달려 있다.
▲ 얼음평야를 달리는 보트 꽁꽁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를 보트를 타고 건넜다. 일종의 택시역할을 하는 이 보트는 고무보트 위에 작은 선박이 얹혀져 있고 후미에는 거대한 선풍기가 달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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굼뜬 기차를 바라보며, 혼잣말로 구시렁거리는데 앞서 걷던 에바와 긴가는 분주하다. 어리둥절해 상황을 지켜보니 리스트비얀카로 갈 교통편을 찾고 있다. 리스트비얀카는 포트바이칼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에 위치한 마을이다. 하지만 바이칼 호수가 두 마을 사이에 흐르고 있어 선박을 이용하지 않으면, 육상으로는 한참을 빙 둘러 가야 하는 곳이다. 잠시 뒤 에바가 다가와 말을 건넸다.

"우리(세 여인)는 리스트비얀카로 건너갈 거야. 저기 있는 남자가 지금 보트를 부른데. 너는 어떻게 할 거니? 우리와 함께 갈 거니? 아니면, 여기서 숙박할 거니? 숙박을 한다면 포트바이칼역 안에 게스트 하우스가 있어."

잠시 고민을 했지만 그들을 따라 리스트비얀카로 가기로 했다. 마음을 굳히게 된 이유는 먼저, 포트바이칼은 예상과 달리 역사 건물만 덩그러니 있었다. 주변에 묵을 곳도 없었고 마땅히 갈 곳도 없었다. 두 번째는 매순간 선택을 해야 하는 상황에서 탈출하고 싶었다. 그리고 그들과 함께라면 쫓아만 다녀도 꽤 재밌는 여행이 될 것 같은 느낌이 들었다. 그렇게 나와 세 명의 여인, 그리고 한 커플 등 총 6명은 일행이 되어 포트바이칼역 대합실에서 보트가 오기를 기다렸다.

불과 몇 분 사이에 밖은 어둠이 짙게 내려앉았다. 보트를 함께 탈 다른 커플에 이끌려 굉음의 발원지를 찾아 엉거주춤한 자세로 얼음길을 따라 걸으니 보트가 보인다. 고무보트 위에 작은 배를 올려놓은 듯하다. 후미에는 바람을 일으키는 대형 선풍기가 달려 있다. 얼어버린 바이칼 호수를 이동하는 교통수단이다. 일행이 모두 탑승하자 바람을 일으키는 선풍기의 굉음이 커진다. 택시가 손님을 태우고 이동하듯 고무보트가 얼음 위를 쏜살같이 달려간다. 굉장한 경험이다.

순식간에 리스트비얀카에 도착했다. 손을 흔들며, 커플이 떠났고 이제 넷만 남았다. 이번엔 폴란드 아가씨 긴가가 나서서 미리 알아온 숙소로 일행을 이끈다. 곧이어 겉모습만 봐도 족히 수십 년은 돼 보이는 목조건물에 다다랐다. 오늘 넷이 묵을 숙소다. 숙소의 시설상태는 하루 숙박료가 대신했다. 300루블(한화 1만 1400원), 보트 비용과 같은 금액이다.

세 명의 여인과의 첫날밤... 참, 신기하고 묘한 인연

만난 지 몇 시간만에 친구가 된 세 여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금세 꺼리낌이 없는 사이가 됐다.
▲ 오믈 뜯는 세 남녀 만난 지 몇 시간만에 친구가 된 세 여인. 오래 전부터 알고 지낸 사이처럼 금세 꺼리낌이 없는 사이가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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함께 생활할 2층 다인실의 문을 열자 철재로 만든 2층 침대가 벽면을 따라 약 10여 개 가량 놓여 있다. 방 한가운데는 길다란 테이블이 놓여 있다. 단체 관광객을 위한 객실인 듯하다. 각자 마음에 드는 자리에 짐을 풀었다. 대충 짐 정리가 끝나자 이번엔 배가 고파오기 시작했다. 그러고 보니 오늘 제대로 끼니를 때운 기억이 없다. 환바이칼 열차를 예상보다 너무 오래 탔다.

허기진 배를 움켜잡고 넷이서 바로 옆에 숙소 바로 옆에 위치한 작은 시장으로 향했다. 그곳에서 우리는 바이칼 호수의 특산품 '오믈'로 배를 채웠다. 일전에 비릿한 냄새와 맛으로 '오믈'에 대한 안 좋은 기억이 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다행히 불에 잘 익은 '오믈'이 나와 네 마리를 게걸스럽게 해치웠다.

늦은 저녁을 먹을 때 즈음엔 세 여인과 장난을 칠 정도로 친해졌다. 낯선 땅에서 만나 동행하게 된 특별한 인연 때문인지 믿기 힘들 정도로 순식간에 가까워졌다. 이토록 빠른 시간에 거리낌 없는 사이가 됐다는 사실이 그저 신기할 따름이다. 동양남자와 서양여자들의 묘한 조합. 그 모습을 보는 이들도 궁금했는지 가게 주인이 말을 붙여왔다. 내가 말을 하자, "감사합니다. 안녕하세요. 깎아주세요"라며 한국어를 내뱉는다. 이곳 리스트비얀카에도 끊임없이 한국인들의 발길이 이어졌나 보다.

밤 10시 49분, 왁자지껄했던 시간이 지났다. 드디어 하루를 끝마치기 위해 잠자리에 들어갔다. 세 명의 여인과 함께 보내는 첫날밤이다. 베개에 기댄 머릿속에 그녀들을 만나 이곳에 도착하기까지 일들이 주마등처럼 스쳐 지나간다. 기적과 같이 찾아온 인연에 입 꼬리가 저절로 올라간다.

덧붙이는 글 | 여행과 관련한 자세한 정보는 오블(http://blog.ohmynews.com/kaos80)에서 확인해 보실 수 있습니다.



태그:#바이칼 호수, #리스트비얀카, #포트바이칼, #러시아, #환바이칼 열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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