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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경환 경제부총리 후보자.
 최경환 경제부총리 후보자.
ⓒ 남소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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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택담보대출 규제 완화를 시사하는 최경환 경제부총리 후보자의 말 한마디에 주택담보대출규제에 관한 금융감독원, 금융위원회, 한국은행(아래 한은)의 입장이 줄줄이 다 바뀌었다. 최경환 후보자가 아직 청문회를 통과하지도 않은 상태에서 관련 당국들이 '알아서 기는' 행태를 보고 있으니 쓴웃음만 나온다.

최수현 금융감독원장은 지난 17일 "앞으로 시장의 기대와 우려를 충분히 검토해 관계 기관과 '고르디우스 매듭'을 풀 수 있는 혜안을 찾아보겠다"고 말했다.

이달 초만 해도 "대출 완화할 계획 없다"더니...

주택담보대출과 관련한 직접적인 규제 당국이라고 할 수 있는 금융위원회 신제윤 위원장도 19일 국회 대정부 질문에서 "금융이 실물을 지원하는 방안이 있는지를 관계 부처와 검토해 보겠다"고 말했다. 불과 이달 초인 9일 "대출규제는 당연히 완화할 계획이 없다"고 강경 기조를 유지한 것과는 사뭇 달라진 분위기다.

더구나 한은마저 DTI(총부채상환비율) 및 LTV(주택담보비율) 등 주택대출 규제에 대해 당초의 부정적 입장에서 돌아섰다. <한겨레> 보도에 따르면 한은은 국회 박원석 의원실에 제출한 자료에서 당초에는 주택대출 규제에 대해 "종합적으로 감안해 신중하게 추진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라고 표현했다.

그랬다가 이튿날에 이들 규제가 "부동산 거래 활성화를 다소 제약하는 측면이 있다"라는 표현을 자료에 넣으면서 '신중하게'라는 표현은 빠졌다. 당초의 정책 기조를 버리고 최경환 후보자 코드에 맞춰 줄타기 하는 기색이 역력하다. 

부동산 문제와 관련해 다른 규제들은 몰라도 대부분의 경제학자들이 DTI와 LTV 규제 완화는 반대해 왔다. 그것이 가계와 금융권의 재무건전성을 지키는 마지막 보루라는 인식이 강했기 때문이다. 그 때문에 그동안 주무 부처인 금융위를 비롯해 기획재정부와 금융감독원, 한국은행 등 관련 당국들이 큰 흐름에서 주택대출 규제 완화에 대해 부정적이거나 신중한 입장을 유지해 왔다.

다만, 토건족을 대변하는 국토교통부와 '부동산 표심'을 노리는 이명박, 박근혜 정부와 새누리당 그리고 부동산 기득권 세력을 대변하는 다수 언론의 압력에 주택대출 규제가 야금야금 완화됐던 것이다.

그랬던 이들이 '친박 실세'인 최경환 의원이 부총리로 지명되자 줄줄이 당초 입장을 바꾸고 있는 것이다. 국민경제 전체를 생각하는 우국충정은 없고, 해바라기 근성밖에 보이지 않는다. 물론 그들은 "영혼 없는 공무원"이라고 변명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고위 관료들의 상습적인 "집단 영혼 외출"에 나라 경제가 무너지고, 서민들은 빚더미에 안게 된 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지금 주택담보대출 규제 수준을 생각해 보면 여기에서 대출을 더 풀겠다는 게 얼마나 위험한 모험(?)인지 알 수 있다. 예를 들어, 연 소득이 5000만 원인데, 그 중에 2000만~2500만 원을 빚 갚으며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가계가 얼마나 있을까. 지금 서울 및 수도권에 적용된 DTI규제(40~50%)가 이 수준이다. 여기에서 DTI규제를 더 완화한다고 하면 가령 3000만 원을 빚으로 갚으며 살게 하겠다는 건데, 이게 정말 정책 당국이 할 일인가?

LTV라는 건 집값 대비 대출액의 비율을 말한다. 집값 6억 원에 3억 원 대출받으면 LTV 50%가 되는 것이다. 그런데 최근 몇 년 사이에 LTV 비율이 계속 올라와 평균 LTV가 50% 수준까지 왔다. 그런데 아직 집값 대비해 50%밖에 안 되니 이 규제를 더 풀자는 것이다.

문제는 평균과 상관없이 LTV 60~80%가 넘는 고부채 가구가 속출한다는 것이다. 한국을 파생금융상품을 매개로 했던 미국 주택시장과 곧바로 비교할 수는 없다. 하지만 미국 서브프라임론 사태 때처럼 위기는 평균이 아닌 극단에서 시작된다는 것은 분명하다.

더 큰 문제 중 하나는 LTV 비율 산정 시 집값이 대부분 실거래가 아닌 호가에 가까운 국민은행 가격자료를 기준으로 삼고 있다는 점이다. 가령, 실거래가는 이미 5억 원인데, 6억 원이라고 잡아놓고 LTV 비율이 양호하다는 식이다. 또한 금융업체 입장이 아니라 일반 가계 입장에서는 전세가도 포함해 생각해야 한다.

지금 수도권에서 깡통전세가 속출하는 데서 알 수 있듯이 LTV에 집주인이 세입자에게 빌린 돈인 전세금을 포함하면 LTV 비율이 20%는 우습게 올라갈 것이다. 그런데 필자가 몇몇 관련 부처에 가서 세미나를 해보면 이런 현실을 제대로 아는 정부 당국자들이 없다. 한은 조기 경보팀이나 조금 눈치채고 있을 뿐이다. 사정이 이런데도 온 국민이 하우스 푸어가 돼 부동산부자들과 건설업계를 위해 집을 사줘야 속이 시원한가.

박근혜 정부 들어 1년 동안 가계부채액 61.8조 원 

아파트 매물과 가격 정보가 게시되어 있는 한 부동산 중개소.
 아파트 매물과 가격 정보가 게시되어 있는 한 부동산 중개소.
ⓒ 김동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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묻고 싶다. 연초에 가계부채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발표했던 박근혜 대통령 신년사와 관련 당국들의 후속 발표는 모두 '생쇼'였나. 이미 박근혜 정부 들어 1년 동안 새로 늘어난 가계부채액만 61.8조 원으로 이 추세면 박근혜 정부 5년 동안 309조 원이 늘어나게 된다. 이는 노무현 정부 5년 동안 202조 원은 물론 이명박 정부 5년 동안 늘어난 가계부채액 292조 원을 능가하는 규모다.

지난 1년 동안 가파르게 가계부채가 늘어난 배경에 4·1부동산 대책 등 박근혜 정부의 대규모 부양책이 있음은 자세히 설명할 필요도 없다. 이미 지금도 가계 가처분소득 대비 가계부채 비율이 170%를 넘어서 세계에서 가장 높은 수준(OECD 평균은 134%)인데 이 비율을 얼마나 더 늘릴 생각인가. 온 국민이 빚더미라는 엄청난 화약고에 올라앉은 채 언제 터질 줄 모르는 '시한폭탄'을 지켜봐야 하나.

최경환 후보자는 '부동산 대출 규제를 풀어서 내수를 활성화하자'고 하는데, 이것이야말로 앞뒤가 뒤바뀐 어이없는 현실 인식이다. 지금 내수가 활성화되지 못하는 데는 재벌 독식 구조와 극단적인 수출 일변도 구조 등의 이유가 있지만, 부동산 부채 부담 때문에 소비지출 여력이 줄어 돈이 돌지 못하는 탓이 크다. 많은 가계들이 월 수백만 원을 벌어서 그 가운데 100만 원을 주택 대출 이자로 내고 있는 식이면 어떻게 내수가 살아나나.

내수를 살리기 위해서라도 부동산에 묶여 있는 돈이 풀려나 생산경제로 유입되도록 해야 한다. 단기적으로 일정한 충격이 있더라도 가계부채 다이어트를 적극적으로 유도해야 한다. 그래야 시간이 걸리더라도 일자리와 소득이 중심이 되는 진정한 의미의 경제가 살아나고 부동산 경기도 다시 살아날 수 있다.

2008년 경제위기로 폭락했던 미국 주택시장이 2012년 말부터 회복세로 전환한 데는 금융업체들의 투기도 없지 않지만, 미국 가계들이 부채 비율을 경제위기 전 133%에서 105% 수준까지 다이어트 했기에 가능했던 것이다. 한 번 늘어난 용수철이 다시 수축돼야 다시 늘어날 수도 있는 법인데, 계속 지금처럼 잡아당기면 결국 끊어질 수밖에 없다.

최경환 부총리 후보자, 가계부채 폭탄이 터지고 부동산 시장이 회복 불가능한 지경까지 가는 것을 원하는가. 정녕 판도라의 상자를 열고 싶은가. 박근혜 대통령이 연초에 발표했던 가계부채 문제 해소에 대한 다짐은 어디 갔는가. 지난해부터 내내 부동산 부양에 열을 올리다 느닷없이 가계부채 문제를 해소하겠다고 할 때부터 기대는 안 했지만, 이렇게 "막가파"식 폭탄 돌리기 기조로 갈 건가.

"부동산 표심"에 눈이 멀어 "내 임기 안에만 괜찮으면 되지"라는 식의 박근혜 대통령과 새누리당 출신 최경환 후보는 그렇다 치자. 다른 규제는 몰라도 LTV, DTI 규제만큼은 안 된다고 했던 관련 당국들, 국민과 나라의 앞날을 포기하고 '실세' 앞에 손바닥 뒤집듯 소신을 바꾸면서 어떻게 국민의 신뢰와 권위를 얻겠는가.

국정이 '정치 바람'을 탈 때 최소한의 견제와 균형 역할을 하는 게 관료 조직의 미덕이고, 공직자의 알량한 자존심 아닌가. 당신들이야 그렇게라도 출세하면 좋겠지만, 당신들의 그 무소신과 무책임 때문에 이 나라 대다수 국민의 삶이 나날이 피폐해지고 있으니 그것이 진정 슬프다. 최소한의 양심이 있다면 지금이라도 나라의 앞날을 위해 어떤 길을 걸어야 하는지 가슴에 손을 얹고 자문해 보기 바란다.


태그:#주택대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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