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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석, 나에게 그것은 소와 함께하는 장거리 여행을 의미한다. 추석 3~4일전 우리는 아버지와 함께 각자 1~2마리의 소를 몰고 40리 길을 걸어 익산으로 향했다. 당시 익산도수장은 동이리역 앞 동산동 소라산 언덕위에 있었다. 이때 팀은 주로 아버지와 나, 그리고 형과 나와 동갑내기 사촌형제인 성우로 구성된다. 이중에서 아버지와 나는 거의 변함없는 고정 멤버였지만, 형이나 사촌 성우는 핀치히터 역할이었다. 인원은 소의 마릿수에 따라 변동이 있었다. 아버지의 말에 의하면, 도수장에서 풀어놓는 임대 소 마릿수는 경기의 영향을 많이 받았다고 한다.

소를 납품하는 날, 우리는 아침 일찍 집을 나서 접산리를 지나 우리가 다니는 초등학교가 있는 광산을 거쳐서 신석, 남전, 목천포를 지나 익산에 도착한다. 꼬박 반나절이 걸린다. 소를 넘기면 도수장 측에서는 소 선지피 한 양동이를 담아 주었다. 그것은 사육비 외에 가외로 주는 보너스인 셈이었다. 우리는 시내 구경삼아 구시장 일대를 한 바퀴 둘러본 후 올 때와는 달리 편하고 즐겁게 버스를 타고 온다.

그러던 어느 해였다. 그 해는 경기가 안 좋았던지 배달해야 할 소가 2마리 뿐 이었다. 그 해에 아버지는 나와 성우만 보냈다. 아마 다른 장날과 겹쳤거나, 아버지에게 중요한 행사가 있었을 것이다. 아버지로부터 돌아 올 버스비를 받아 든 우리는 한 마리씩 나누어 몰고 가면서 잠시 행복한 계산을 했다.

아이들끼리 가니까 선지피가 든 양동이를 안 줄지도 모른다. 그것만 없으면 갈 때도 걸어갔는데 올 때라고 걸어오지 못할 것 없다. 모처럼 손에 들어 온 귀한 돈을 그까짓 차 한번 타는데 쓸 필요 있나. 올 때도 걸어오자. 그래서 그 차비를 아꼈다가 구시장에서 맛있는 것도 사먹고, 좋은 대못도 몇 개씩 장만하자고 모의를 했다. 그러나 가외 돈을 챙기자는 우리의 계획은 보기 좋게 어긋나고 말았다.

소를 끌고 간 우리를 반가이 맞이한 도수장 사장님은 꼼꼼히 소를 살핀 후 인수하였다. 그리고 아버지께 고맙다는 말과 함께 꼭 갖다드리라며 이번에도 어김없이 김이 모락모락 나는 선지피 한 양동이를 안겨 주었던 것이다. 비록 용돈을 챙길 기회는 사라졌지만, 내일 아침이면 우거지와 콩나물을 넣고 끓인 맛있는 선짓국을 먹을 생각을 하면서 우리는 흔들리는 버스안에서 귀한 선지피가 흘러 넘치지 않도록 출렁거리는 양동이를 꼭 붙잡고 왔다. 그러나 마음 한켠으로는 모처럼 용돈을 벌 기회를 날려버린 아쉬움에 입맛이 썼던 기억이 난다.

그 때 우리는 돈이 무척 궁했다. 용돈이라는 개념조차 없었던 시절이다. 당연한 이야기지만, 우리가 현금을 만질 기회는 거의 없었다. 내 손에 현금이 쥐어진다 해도 그것은 학교에 낼 납부금이라 잠시 내 손을 거쳐갈 뿐 내 것이 아니었다. 그러나 아무리 아이들이라 해도 돈이 필요할 때가 있는 법이다.

내가 용돈에 갈급했던 이유중의 하나는 칼을 만들 못을 구하기 위해서였다. 뒤엽쟁이 철길에 가서 못을 갈려서 칼을 만들 계획을 세우고 나서 우리가 가장 신경을 쓰는 일은 적당한 못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창고나 연장통을 뒤져도 제대로 된 대못을 구하기는 어려웠다. 집에 있는 못은 어딘가에서 빼서 모아 둔 것으로 전부 뻘겋게 녹이 슬고 구부러진 것 뿐이다. 구부러진 못을 망치로 정성껏 펴 보지만 새것에 비하면 어림도 없다. 그 중고품 못일망정 몰래 가져가다가 아버지에게 들키는 날에는 곡소리 날 정도로 작대기 찜질을 당해야 했다.

어쩌다 엄마를 따라 대야장에 가는 날이면 나의 관심은 온통 남경당한의원 앞 대야철물점에 가있다. 철물점 진열대 나무상자에는 하얀 못들이 종류 별로 가지런하고 수북하게 담겨 있었다. 맨날 녹슬고 구부러진 못들만 보아 온 내 눈에 그 깨끗한 못들은 얼마나 아름다웠던가? 날씬한 몸통 전체가 은빛으로 빛나는 그 눈부신 섹시함이라니...그 하얀 새 못을 잘 갈아서 칼을 만들면 얼마나 좋을까?

내 친구중에 아버지가 청하에서 목재상을 하는 원철이는 큰 대못을 여러 개 갖고 있었다. 그는 좋은 대못 몇 개를 갈려서 그 중 잘 나온 작품 중에서 크고 작은 못 두개로 만든 쌍칼을 갖고 있다. 원철이가 부러웠다. 좋은 못을 구하기만 하면 나도 쌍칼을 장만하고 싶었다. 그 시절 너무나 갖고 싶지만 내 것일 수 없는, 철물점에 진열된  그 하얗게 빛나는 대못들을 바라 보기만 해야 하는 일은 내게는 차라리 고문이었고 슬픔이었다. 모처럼 용돈을 챙겨서 대못을 구할 수 있는 좋은 기회를 날린 것이 그래서 섭섭했던 것이다.

바로 그 소, 내가 성우와 함께 익산 도수장까지 40리 길을 끌고 갔던 그 소를 나는 20여년 만에 다시 만났다. 아내가 둘째인 아들 영재를 가졌을 무렵이다. 어느 날 나는 꿈을 꾸었다. 꿈속에서 나는 소달구지에 식구들을 태우고 이삿짐을 싣고 어디론가 가고 있었다. 그 길은 내가 소를 끌고 가던 익산 도수장 가는 길 같았다. 나는 달구지 앞부분에 걸터앉아 소를 몰았다. 내가 고삐를 잡고 능숙하고도 부드럽게 소를 다루고 있었다. 나는 그렇게 소달구지를 잘 다루지 못하는데... 마치 아버지처럼 능수능란하게 달구지를 모는 내가 신기했다. 꿈속에서도 그것이 이상하게 생각되었다.

그러나 진짜 신기한 일은 바로 그 다음에 일어났다. 워낭소리를 울리면서 잘 걸어가던 소가 갑자기 서더니 천천히 뒤를 돌아보는 것이다. 뒤를 돌아보는 소의 얼굴을 보는 순간 나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 얼굴이 소의 얼굴이 아니라 소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가진 사람의 얼굴이었던 것이다. 누님들은 나의 꿈이야기를 듣더니 아주 좋은 태몽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지금 아내의 뱃속에 있는 아이는 분명히 아들이라고 단정 짓는 것이다. 그러면서 집안을 이끌어 갈 귀한 아들이니 잘 키우라는 덕담을 해주었다. 과연 얼마 후 아내는 아들을 출산했다.

아들 영재는 성질이 진득하고 차분하다. 매사 소처럼 참을성도 많다. 그리고 할아버지의 눈을 닮아 소처럼 부리부리한 눈을 가지고 있다. 일찍부터 수학, 물리과목과 컴퓨터 등 이학방면에서 소질을 보였다. 아들은 초등학교5학년 때 서울 서부교육청 영재교육원 이과반에 들어갔다. 그리고 한성과학고를 거쳐서 KAIST 화학과를 졸업했다. 지금은 '과학기술정책연구원(STEPI)'에서 인턴으로 근무하면서 과학기술 정책대학원 진학을 준비하고 있다. 과연 내 아들이 누님들의 꿈풀이대로 한 집안을 이끌 자격을 가진 인물로 성장하게 될는지 궁금해진다.

이렇듯 소와 함께 시작한 나의 어린 시절은 소를 닮은 아들로 인해서 현재까지 이어지는 듯하다. 이제 어느덧 내 나이 50하고도 중반이다. 싫든 좋든 나에게는 지나 온 날보다, 내 아버지의 곁으로 돌아 갈 날이 더 가까울 것이다. 하늘 끝 그 먼 나라에 가서 내 아버지를 다시 만나는 그 날, 나도 아버지처럼 소와 같이, 소처럼 우직하게 살았노라고 자신있게 말할 수 있는 그런 여생을 살고 싶다.

돌이켜보면 내가 살아 온 지난 일이 마치 바로 어젯밤 꿈속의 일처럼 달콤하기도 하고 한편으로는 슬프기도 하다. 눈을 감으면 이제는 다시 오지 못할 어린 시절에 소와 함께 누비던 내 고향의 푸르른 산야가 눈에 선하게 다가온다.


태그:#소, #여행, #아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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