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마오쩌둥이 나라를 통일하기는 했지만 그가 남기고 간 나라는 쉽지 않았다. 1976년 중국의 국가총생산(GDP)는 2943억7000만위안이고, 인구는 9억3267만명이었다. 1인당 생산액이 315위안가량으로 최빈국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마오가 떠나고 4인방도 떠난 상황에서 중국 정치권은 차세대를 누가 맡을 지를 놓고 고심할 수 밖에 없었다. 지금도 남아았는 중국 현대 정치의 가장 큰 장점은 논리싸움이라는 것이다. 물론 마오쩌둥 시기에는 마오의 아집과 카리스마를 넘기 어려웠지만, 이후에는 적게는 상무위원 단위, 중앙위원 단위에서 자신의 정견과 비전을 제시하고 그 논쟁에서 승리한 사람이 지도자로 부상하는 게 일반적이었다.

덩샤오핑은 문혁 시기 고통을 겪었지만 이곳에서 단련되어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 덩샤오핑이 노동을 했던 난창 트랙터 공장 덩샤오핑은 문혁 시기 고통을 겪었지만 이곳에서 단련되어 미래를 바라볼 수 있었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마오는 새로운 황제의 후임으로 화궈펑(華國鋒)을 낙점했다. 마오가 "당신에게 맡기면 안심이다"라는 말까지 했다. 하지만 '호박머리' 화궈펑은 마오가 부활할 수 있는 마지막 카드를 열어준 '오뚝이' 덩샤오핑(鄧小平)을 이겨내기에 그릇이 너무 작았다.

이 논쟁에서 승리한 사람은 이미 '흑묘백묘론'(검은 고양이든 흰 고양이든 쥐만 잘 잡으면 된다)으로 민심을 얻은 덩샤오핑이었다. '오래 업드린 자는 반드시 높게 난다'(伏久者必飛高)라는 법구경(法句經) 말씀은 덩샤오핑(鄧小平)에게도 벗어나지 않았다.

66년부터 시작된 류사오치(劉少奇) 비판과 더불어 주자파로 낙인 되었고, 1969년 10월에는 난창(南昌)의 공장으로 유배에 가까운 하방을 당했다. 하지만 마오는 덩샤오핑(鄧小平)이 당적을 잃는 마지막 사태까지 가지 않도록 했고 그러므로 인해서 그는 부활할 수 있었다.

덩의 부활은 조용히 진행되고 있었다. 1975년 1월 13일 제 4기 전국인민대표대회 1차회의에서 저우언라이(周恩來)는 자신이 죽어가는 지 알면서도 회의의 업무보고를 했다. 저우는 지앙칭(江靑)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것을 막고, 덩샤오핑(鄧小平)을 보호해야 한다는 의지를 가진 것 같다.

4기 전인대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당 부주석, 중앙정치국 상임위원회 위원, 국무원 제1부총리, 군사위원회 부주석과 해방군 총참모장직을 맡았다. 거의 완벽에 가까운 부활이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75년 2월 문혁(文革)의 여파로 정체되어 있던 철도를 뚫는 것을 시작으로 경제 살리기에 나섰다.

그해 말부터 상황이 호전되면서 덩샤오핑(鄧小平)의 인기도 올라갔다. 그러나 덩샤오핑(鄧小平)과 상극인 4인방은 1975년 12월부터 중앙정치국 회의를 열어 그를 비판하기 시작했다. 12월 20일에는 덩샤오핑(鄧小平)이 자아비판을 했다. 하지만 이달에 4인방의 지략가 캉셩(康生)이 죽었다. 그리고 덩샤오핑(鄧小平)에 대한 비판의 목소리도 더욱 커갔다.

4인방은 1976년 4월 5일 첫번째 '톈안먼(天安門)사건'이 일어났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이들을 간접적으로 지원했고, 머잖아 다시 연금 상태에 들어갔다. 하지만 마오의 사망 후 4인방이 분쇄되고, 덩샤오핑(鄧小平)에게 날아오던 화살들은 모두 거두어졌다. 그러나 덩을 두려워했던 화궈펑(華國鋒)은 마오의 재산을 계승하는 데 치중했고, 원로는 물론이고, 국민 등 모두의 마음을 잡기에 너무 약했다.

1977년 7월 16일부터 21일까지 열린 당 제 10기 3중전회에서 덩은 복권했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자오쯔양(趙紫陽)과 후야오방(胡耀邦)을 양팔로 해서 헤게모니를 잡아가기 시작했다. 솔즈베리는 그의 책 <새로운 황제들>에서 "1978년 11월에서 12월 사이에 덩샤오핑(鄧小平)은 화궈펑(華國鋒)을 허수아비로 전락시키고, 실권을 장악했다"고 본다. 물론 그의 뒤에는 예젠잉(葉劍英)을 비롯해 천윈(陳云) 등 원로의 도움이 있었기 때문이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실권을 장악한 후 경제정책을 최우선으로 했다. 79년 4월 중앙위원회 업무회의에부터 현 중국 발전의 초석이 된 경제특구에 관한 논의를 시작했고 시행했다(자세한 내용은 경제 '외자기업이 없으면 중국 발전도 없다'에 자세히 있음).

그해 7월 전국인민대표자대회에서는 농업에 관심을 기울이는 경제 형태로 돌아갈 것을 주창하는 동시에 4개 현대화가 주로 거론됐는데, 여기에서 천윈陳雲)은 재정긴축을 요구하는 등 개방의 호흡조절을 역설했다. 80년 9월 덩샤오핑(鄧小平)의 오른팔 자오쯔양(趙紫陽)이 화궈펑(華國鋒)을 대신해 총리에 임명되면서 덩샤오핑(鄧小平)은 실질적으로 모든 권력을 장악했다.

덩은 이후 다양한 외부환경 속에서 경제발전을 위한 토대 만들기에 치중했다. 다행히 1982년과 1983년 62억, 52억 달러의 무역흑자가 났다. 하지만 1985년은 이전의 폐쇄사회와 그간 진행된 개방 사이의 문제가 급속히 부상하기 시작했다.

조너선 스펜스는 당시에 "농업생산, 1가구1자녀정책, 공업 인센티브제와 경제특구, 지적 표현, 대미-대소관계, 당 조직과 군대의 정리와 재편, 인민저항의 합법성" 등이 초미의 관심사이자 불화의 근원으로 자리하고 있다고 봤다.

이런 불안 속에서도 사회는 계속해서 변화해갔다. 막후의 실세인 덩샤오핑(鄧小平)은 1987년 11월 말 리펑(李鵬)을 임시 총리로, 당과 군대에 영향력을 가진 양상쿤(楊尙昆)을 국가주석으로 밀었다. 그러나 1988년 경제상황은 그다지 좋지 않았다. 물가는 계속 오르고 있었고 농민들은 환금작물의 재배를 위해 곡식생산이 줄어 배급제에 문제가 나기도 했다.

인사가 만사인 게 정치인데, 덩샤오핑(鄧小平)의 인사는 그다지 똑부러지지는 않았다. 가장 큰 예가 리펑(李鵬)의 무능력이었다. 마이니치 신문의 기자로 톈안먼에 관한 상세한 책을 쓴 가미무라 고지의 <중국 권력 핵심>에는 리펑(李鵬)에 관한 농담을 소개하는데, 그 농담 속에서 리펑(李鵬)은 "나는 할 줄 아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는 말로 그를 소개할 만큼 경멸과 조롱의 대상으로 보고 있다.

인민혁명 기념비가 있는 톈안먼 광장은 해방의 공간이자 절망의 공간이기도 했다
▲ 비극적인 톈안먼 사건의 현장 인민혁명 기념비가 있는 톈안먼 광장은 해방의 공간이자 절망의 공간이기도 했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이런 모든 상황은 1989년 6월 4일 톈안먼(天安門) 광장에서 벌어진 비극으로 가는 빌미를 제공하고 있었다. 프랑스 혁명 200주년이자 5?4운동 70주년,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40주년인 이 해는 그간의 개방의 속도와 갖가지 갈등이 중층적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런 분위기 속에서 4월 15일 후야오방(胡耀邦)이 심장마비로 사망한다. 변화를 바라는 층에서는 이 흐름을 호기로 생각했다. 특히 후야오방(胡耀邦)은 86, 87년 학생시위를 옹호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이 때문에 87년에는 해임됐고, 해임과정에는 자기비판서까지 제출했으니 그에 대한 동정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다. 1976년 저우언라이(周恩來)가 죽었을 때, 톈안먼(天安門) 시위에 암묵적인 동의를 보낸 덩샤오핑(鄧小平)이 권좌에 있는 만큼 한번 목소리를 내볼 심사였다.

22일 장례식 날 광장의 진입을 통제했지만 광장이 군중은 늘어나기 시작했고, 5월 17일에는 100만 명이 넘는 것으로 추산됐다. 언론 역시 서서히 호의를 갖기 시작했다. 좀더 강한 개방주의자인 자오쯔양(趙紫陽)은 5월 19일 광장에 가서 단식 농성하는 이들을 눈물을 흘릴 듯한 모습으로 말렸다. 하지만 다음날 리펑(李鵬)과 양상쿤(楊尙昆)은 계엄령을 선포했고, 인민해방군이 베이징으로 들어오기 시작했다. 그리고 수많은 희생자가 났다.

5월 31일 덩샤오핑(鄧小平)은 중난하이(中南海)에서 리펑(李鵬)과 야오이린(姚依林) 부총리를 호출했다. 그리고 자오즈양(趙紫陽)을 제쳐두고 자신이 후계자가 될 것으로 믿었던 리펑(李鵬)에게 한마디 던졌다. "자네들이 장쩌민(江澤民) 동지를 핵심으로 하여 훌륭하게 단결할 수 있을 것을 희망하네"라고. 덩샤오핑(鄧小平)은 톈안먼(天安門)의 진압을 추인했고, 그 전면에 장쩌민(江澤民)이 섰다.

6월 3일 밤늦게 군은 광장에 대한 대대적인 진압작전을 시작했다. 군의 진압으로 사망한 숫자는 정부 발표가 319명(군인 포함)이고, 당시의 보도는 2000~3000명가량 이다. 당시 현장을 취재했던 솔즈베리나 가미무라 고지 등은 현장에서 벌어진 잔악성을 그들의 책에서 잘 표현하고 있다. 이 사태는 덩샤오핑(鄧小平)이 내린 결정 가운데 최악이었다. 더욱이 5월 30일을 전후로 대학생들이 광장에서 서서히 빠져나가는 등 열기가 식고 있는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기에 더욱 그러했다.

6월 24일 중국 공산당 13기 중앙위원회는 전체회의를 열어 '자오쯔양(趙紫陽)이 범한 잘못에 관한 보고'를 채택하는 동시에 장쩌민(江澤民)을 총서기로 정식 선출했다. 톈안먼(天安門)에서 물러나야할 첫 번째 대상으로 불려진 리펑(李鵬)을 전면에 내세울 만큼 덩샤오핑(鄧小平)은 어리석지 않았다. 대신에 상하이 당서기였지만 중앙 정치에 거의 얼굴을 드러내지 않았던 장쩌민(江澤民)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장쩌민(江澤民)은 혼자 올라오지는 않았다. 그의 오른팔인 쩡칭홍(曾慶紅)을 비롯해 그와 함께 성장했던 많은 이들이 그를 동행했다. 중앙정치에는 곧바로 '상하이방'이라는 말이 탄생했다.

톈안먼(天安門)은 국제사회에서 중국에 대한 거센 반감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누구나 덩샤오핑(鄧小平)이 지도자라는 것을 알기에 그에게는 그만큼의 책임이 갔다. 89년 9월 4일 덩은 당 정치국에 사표를 써서 보냈다. 당시의 상황이 부담스러웠던 원로들도 사표를 받는 데 동의했다. 그렇다고 '오뚝이'가 움직일 수 있는 한 가만히 있을 리는 만무했다.

90년을 맞이하는 춘지에(春節설날)은 상하이를 방문해 푸동(浦東)개발을 역설하는 주룽지(朱鎔基)를 만났다. 이 길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장쩌민(江澤民)과 어울리지 않는 리펑(李鵬)이라는 짝 대신에 주룽지(朱鎔基)로 바꿀 생각을 갖게 됐다. 덩샤오핑(鄧小平)은 여전히 건재했다.

중국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덩샤오핑 동상이다
▲ 롄화산에 있는 덩샤오핑 동상 중국에서는 가장 큰 규모의 덩샤오핑 동상이다
ⓒ 조창완

관련사진보기


1992년 1월 19일 오전 9시 광둥성(廣東省) 선전(深玔)에 덩샤오핑(鄧小平)을 태운 기차가 도착했다. 유명한 남순강화(南巡講話)의 시작이었다. 주하이(珠海)를 거쳐 상하이에서 막을 내린 이 길에서 덩샤오핑(鄧小平)은 지속적인 개방을 확실시 했다. 험난한 정치투쟁에서 세 번이나 살아난 덩샤오핑(鄧小平)도 죽음 앞에서는 어쩔 수 없었다.

1996년 2월 19일 밤 9시 파킨슨병에 의한 호흡순환기능 부전으로 사망했다. 사실 덩은 89년 톈안먼(天安門)에서 사망했을 수 있다. 솔즈베리는 <새로운 황제들>의 끝을 89년 톈안먼(天安門)에서 멈추었다. 스펜스도 <현대 중국을 찾아서>의 마지막을 톈안먼(天安門)에서 맺었다. 서구인들의 시각에서 볼때 톈안먼(天安門)은 그만큼 심각했을 것이다. 하지만 중국인들에게조차 이런 시각이 전적으로 맞다고 생각하는 것은 옳지 않다. 중국의 역사는 어차피 중국의 몫이기 때문이다.

중국을 여행하면서 가장 특이한 도시가 바로 덩샤오핑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닌 선전이다. 수만의 도시에서 현재는 인구 2천만명의 초대형 도시가 된 선전은 현재 주거도시와 생산도시를 같이 갖춘 가장 모범적인 자족도시다. 거기에 인접한 홍콩이 새로운 피를 수혈하면서 끝임없이 변화한다.

선전의 중심부에 있는 롄화산 꼭대기에는 덩샤오핑의 상이 있다. 마오의 상은 많지만 덩의 상은 고향 마을과 유배지인 난창(南昌)을 제외하고는 유일에 가깝다. 중국을 세운 마오에 비해 덩의 대우가 어디인지를 보여주는 면모다. 중국인들에게 부는 종교에 가깝다. 하지만 사회주의 중국은 그 종교를 복잡하게 했다. 그런 상황에서 덩은 그런 중국인의 부자 본능을 다시 일깨우는 역할을 했다. 그리고 본능은 덩의 생사와 상관없이 대륙 곳곳으로 흩어지기 시작했다.

덧붙이는 글 | 연재기사



태그:#중국, #덩샤오핑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디케이아이테크놀로지 상무. 저서 <삶이 고달프면 헤세를 만나라>, <신중년이 온다>, <노마드 라이프>, <달콤한 중국> 등 17권 출간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