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누이의 고향은 전라도다. 지역에서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상경한 후 줄곧 서울 언저리에서 살았다. 지금은 숨 막히는 서울을 벗어나 경기도의 한 소도시에 자리를 잡았다. 서울에서 보자면 시계를 벗어난 시골이지만, 다른 지역에서 보면 수도권이니, 누가 물어보면 누이는 그냥 서울 산다고 말한다. 사는 곳을 상세히 설명할라치면 피차 번잡스럽기 때문이다.

올해 나이가 오십으로, 고향을 떠난 지 30년이 넘었으니 누이는 서울 사람이 다 됐다. 입는 것도, 생각하는 것도, 심지어 까다로운 식성까지도 변했다. 예전 같으면 충청도나 경상도로 여행을 갈 때면, 아무리 번거롭더라도 도시락까지 챙겨들고 길을 나설 정도였다. 그 지역 음식이 입맛에 닿지 않는다는 이유에서였다.

그러나 단 한 가지, 20년 가까이 입에 밴 사투리는 그대로 남았다. 아무리 노력해도 특유의 된소리 발음과 억양을 없애지는 못했다. 30년 동안 누이의 입에서는 그렇게 서울말과 사투리가 어색하게 동거하고 있다. 지금도 누군가와 대화를 나누다 보면, 어김없이 "고향이 전라도냐"고 물어온다는데 적이 부담스럽다는 눈치다.

누이의 전라도 폄하

누이는 왜 입에 밴 사투리를 그토록 꺼릴까. 전라도 출신임이 드러나는 걸, 언제부터, 또 무슨 계기로 부담스럽게 여기게 된 걸까. 그저 '촌티 난다'는 생각 때문은 아닌 것 같다. 솔직히 사투리라고 하면 전라도보다 경상도가 훨씬 더 도드라진다. 다른 지역 사람들이 흉내 내기조차 어려울 만큼 말투와 억양이 드센데도, 그들은 경상도 사투리 쓰는 걸 적어도 숨기려 하진 않는다.

1980년대 중반 처음 상경했을 때만 해도 전라도 사람에 대한 거부감이 지금처럼 심하진 않았단다. 조금 낯설고 어색해할지언정 서로 경계하고 백안시하지는 않았다고 한다. 더러 힘들고 외로운 타향살이에 서로 위로하며 이웃사촌처럼 정겹게 사는 경상도 출신 이웃 주민들도 있었는데, 이사해 뿔뿔이 흩어졌지만 그들과 지금도 언니, 동생하며 지내고 있단다.

지금은 까마득한 옛 이야기가 됐지만, 한때 누이는 학창 시절 탈춤반과 연극반 대표로 활약할 만큼 고향에 대한 자긍심이 컸다. 본디 전라도라고 하면 '남도'라는 보통명사를 독점할 만큼, 멋과 맛을 즐길 줄 아는 '예향' 아니던가. 그랬던 누이는 서울 언저리에서 몇 번의 이사를 다니면서, 유독 전라도에만 국한된 지역 차별적인 정서를 시나브로 학습하게 됐다.

2012년 6월 24일 오전 서울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제1회 특전사마라톤 대회' 개회식에서 12.12쿠데타, 5.18광주학살 관련자인 장세동 전 안기부장(가운데)과 정호용 전 국방장관이 특전사전우회 자문위원과 회장의 자격으로 연단에 앉아 있다. (자료사진)
 2012년 6월 24일 오전 서울 월드컵공원에서 열린 '제1회 특전사마라톤 대회' 개회식에서 12.12쿠데타, 5.18광주학살 관련자인 장세동 전 안기부장(가운데)과 정호용 전 국방장관이 특전사전우회 자문위원과 회장의 자격으로 연단에 앉아 있다. (자료사진)
ⓒ 권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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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라도 사람들, 알게 모르게 '꼬붕' 근성이 있는 것 같아. 그런가 하면 힘 있는 사람 앞에서는 간이고 쓸개고 다 빼줄 것처럼 굽실거리다가, 나중에 끈 떨어지면 그 사람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배신자들. 꼭 보면 하나같이 전라도 출신이더라니까."

지난 설 명절 때, 다른 사람도 아닌, 한때 손맛 하나는 타고났다면서 전라도에서 태어난 걸 감사해하던 누이가 내뱉은 말이다. 그의 전라도에 대한 험담 앞에 꼬박꼬박 붙는 수식어가 있다. "나도 같은 전라도 출신이지만." 고향에 대한 저주에 가까운 그 말을 듣노라니, 마치 누이가 '일베충' 아닐까 싶은 생각마저 들었다. 물론, 내가 아는 한, 누이는 인터넷도 하지 않고 그 흔한 스마트폰도 없다.

어쩌다 그렇게 됐을까. 추론할 만한 단서는 있다. 수차례 들은 이야기지만, 그가 가장 싫어하는 인물은 '5공화국 돌쇠'로 잘 알려진 장세동 전 안기부장이다. 모르긴 해도, 사람 좋은 누이가 대놓고 증오한다고 말하는 유일한 인물일 것이다. 그가 평생을 충성스럽게 모신, '학살자' 전두환조차도 누이는 그렇게 혐오하진 않는다고 말했다.

전라도 사람들에게 '꼬붕' 기질이 있다는 누이의 편견은 오로지 장세동으로부터 비롯된 것으로 보인다. 누이는 상경하고 한참 지나서야 그가 동향(전남 고흥) 사람이라는 사실을 알았다. 이웃들과 고향 이야기를 나눌라치면, 어김없이 그의 이름이 튀어나오더란다. 물론, 사람들끼리 장세동에 대해 나눈 '뒷담화'는 듣기조차 민망할 정도였고, 그렇게 고향의 이름은 더럽혀졌다.

장세동은 1980년대 대통령 경호실장을 거쳐 안기부장에 재직하며 제5공화국의 실세 중의 실세로 떠올랐고, 전두환 정권의 후계자로 거론될 정도로 그 위세가 대단했다. 정권을 넘겨받은 노태우 대통령에게 "내가 입을 열면 여러 사람 다친다"며 협박(?)할 정도로 숱한 화제를 뿌렸으면서도, 5공 청산 청문회 당시 "모든 책임은 자신에게 있다"고 자처하며 의리(?)를 지켰다.

"사나이는 자신을 알아준 사람을 위해 죽는 법이다"거나 "내가 역사의 수레바퀴에 깔려 죽는 한이 있어도, 전두환 대통령 각하가 구속되는 것을 막겠다"는 등, 그가 남긴 '어록'은 두고두고 사람들의 입길에 올랐다. 국가를 한낱 '갱' 조직처럼 여기고 국정을 농단한 신군부 세력의 과오를 홀로 덤터기 쓰려는 듯, 그의 이름은 악명 높은 5공의 상징으로 남았다.

분명 성급한 일반화의 오류지만, 그런 그의 '조폭스러운' 행태는 누이를 비롯한 이웃들에게 고향에 대한 그릇된 편견을 심어주기에 충분했던 것 같다. 어디서 들었는지, 군대에서 전라도 출신 병사들을 흔히들 '갱'이라고 부르는 것도 어쩌면 그에게서 비롯된 것인지도 모른다고 했다. 시쳇말로 "주먹 자랑 하지 마라"는 벌교가 이웃 동네라는 점까지 마구 끌어다 붙이면서.

견강부회도 잦다 보니 가랑비에 옷 젖듯 사실처럼 여겨진 걸까. 숫제 영화에서 조폭으로 등장하는 사람들마다 억센 전라도 사투리를 쓰는 걸 두고도, 편견을 조장한다고 나무라기는커녕 오죽하면 감독이 그렇게 배역을 설정했겠냐며 두둔하기도 했다. 하물며 전라도가 고향인 누이가 그럴진대, 다른 지역 사람들의 인식이야 오죽할까.

옛 '주군' 등 뒤에 비수 꽂은 유수택

누이의 그릇된 편견에 부채질 하는 일이 또 벌어졌다. 주인공은 유수택 새누리당 최고위원. 그는 최근 국가정보원의 간첩 혐의 증거 조작 사건이 일어난 원인을 엉뚱하게도 10년간의 김대중·노무현 정권의 햇볕정책 탓으로 돌려 화제가 됐다. 여권에 대한 부정적 여론을 돌려보려는 술책이지만, 그조차도 자신의 주장이 얼마나 어이없고 황당무계한지 모르진 않을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에 대해서 조금 알고 있다. 내 고등학교 시절 그는 우리 동네의 시장님(여천시장)이었고, 재작년 여수 세계엑스포 조직위원회의 부위원장을 맡기도 했다. 경력도 화려해서, 그가 탓한 두 정권 때 광주광역시 행정부시장과 퇴임 후 조선대학교 법인 이사장과 공기업 사장 등을 두루 거치며 승승장구했다. 호남 출신의 행정 관료라는 이유가 작용한 결과다.

유수택 새누리당 지명직 최고위원. (자료사진)
 유수택 새누리당 지명직 최고위원. (자료사진)
ⓒ 연합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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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정권이 바뀌자 그는 거침없이 배를 갈아탔다. 새누리당 광주광역시당 위원장 자리를 꿰차더니, 청와대로 자리를 옮긴 이정현 홍보수석 후임으로 새누리당의 지명직 최고위원에 오르며 기염을 토했다. 부나방처럼 진보와 보수를 넘나들며 정권에 아부하는 이들이 어디 한둘일까마는, 권력을 좇는 처세에 관한 한 그는 가히 대통령감이다.

과거 자기를 믿고 중용했던 정권에 그렇게 침을 뱉어야만 지금의 자리에서 존재감을 인정받을 수 있다고 여긴 걸까. 정치란 본디 그렇게 비정한 것일까. 오로지 일신의 영달만을 위해 관료적 양심과 정치적 신념을 헌신짝처럼 벗어던진 행태는 그를 지켜보는 국민들로 하여금 정치에 대한 불신만 가중시킨다.

고향 전라도에 대한 누이의 편견은 그렇게 '증명'되었다. 장세동이 '꼬붕' 근성의 종결자라면, 유수택은 '철새'라는 조롱만으로는 태부족한, 권력을 잃은 옛 주군의 '등 뒤에서 비수를 꽂는 배신자'의 모습을 가장 적나라하게 보여준다. 다만 왜 그들의 고향이 어딘가만 문제 삼고, 그들이 속한 정당에는 별무관심인지 그것이 의아할 따름이다. 누이 들으라고 하는 이야기다.

보통 정치인들이 하마평에 오르면, 관행처럼 그의 고향과 출신 학교를 맨 먼저 알려준다. 공직을 권력의 전리품처럼 여기는 마당에, '꼬붕'과 '철새'조차도 쓸모가 있다고 여겨 그들을 천거하고 고위직에 임명하는 것까지야 그렇다 치자. 다만 그들로 인해 애꿎은 고향의 이미지가 나빠지지 않을까 그게 안타까울 뿐이다.


태그:#유수택, #장세동, #전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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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시 미뤄지고 있지만, 여전히 내 꿈은 두 발로 세계일주를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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