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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년 전시 마무리를 위해 대구에 신부님과 동료와 다녀왔다. 초대작가이신 수녀님은 하늘위의 하늘이란 수묵작품을 선물로 주셨다. 나는 직접 캘리그라피한 다기셋트와 앞치마를 드렸지만, 작가인 나는 뜻하지 않은 작품이 그저 반갑고 고맙기만 하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하늘을 보니 달이 둥글고 휘영청하다. 달이 둥글고 밝은 날 나는 한때 몹시도 많이 마음아파하고 울었던 적이 있다.

여성장애인성폭력상담을 한창 했을때, 별별 사례를 다 만나고 정식으로 전문적인 상담원들을 충분히 고용하지 못하던 때라 내가 직접 수화통역사를 데리고 현장을 뛰어다닐때가 참 많았다. 어떤 때는 피해자에게 폭력접수를 하고 가해자를 만나고 집으로 들어가는 귀가 길... 마음이 여린 나는 자꾸 뒤가 신경쓰일때도  더러 있었다.

어떤 10대 지적장애인의 경우는 동네 할아버지가 가해자가 되었는데 그 할아버지의 동생, 조카 등이 몰려 온 적도 있었다. 하지만 신경쓰이고 피곤하기 했지만, 감정을 손상당하지는 않았다. 상담원 양성교육강의도 하기 때문에 스킬을 가지고 상황을 조절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떤 경우 나는 도저히 감정조절이 안되어 펑펑 울었다. 그리고 그 일 이후 나는 현장일에서 손떼고 안양에서 온 전문적인 상담소장을 급채용했다.

지적장애아가씨와 같은 동네 청년이 사랑을 해서 아가씨가 임신을 했었는데, 처음에는 그 아가씨가 임신한 것을 안 엄마가 노발대발해서 그 청년을 고소하고 싶다고 상담소를 찾아왔다. 그러나 상담을 하고 청년과 대화를 하면서 일방적인 성폭력이라기엔 상황이 애매했다. 왜냐하면 그 청년도 아가씨처럼 중증은 아니지만 경증 지적장애가 있었고 강제적인 상황은 아닌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양쪽 다 이 관계를 인정하지는 않으려 하였다. 일반적으로 이런 경우 남녀가 약간의 호감을 가지고 만나다가 임신을 할 경우 결혼까지 이어 지는 경우도 많다. 그러나 양쪽다 장애인이다 보니 가족들은 서로를 부담스러워했던 것 같다. 원만하게 합의를 유도하여 고소를 취하하는 방향으로 가닥을 잡아가고 있었다.

그리고 나는 아가씨의 엄마가 아기문제를 가지고 청년집안과 자꾸 접촉하고, 그 집안은 아이를 책임질 수 없다고 하고 해서 나는 아가씨를 가톨릭이 운영하는 미혼모의 집에서 아기를 낳게 하면 그 아기는 재단에서 책임진다고 아가씨의 엄마를 매일 찾아가서 설득했다. 서로 맺어주지는 못할 망정 고소를 막고 낙태라도 막게 하려고.

그러나 백만 원을 받고 아이를 낙태해버렸다는 것을 알고 나는 그 날 많이 참 많이 울었다. 나도 한때 7남매 막내로서 하마터면 유산되어질 뻔한 생명이어서 그랬는지 아니면 유달리 생명에의 집착이 강해서 그랬던 것인지, 그동안의 노력이 수포로 돌아간데에 대한 허무함이나 사람에 대한 실망이어서 그랬는지 모르지만 감정조절이 잘 되지 않아 참 많이 힘들었다.

특히 중증지적장애라 하더라도 홀쪽해진 배를 안고 멍하니 핼쓱하게 앉아 있는 아가씨를 보면서 지적장애인의 삶에 대한 선택권은 본인보다 보호자에 의해 좌지우지되는 현실이 무척 마음이 아팠다. 그 후 나는 전문상담소장을 급구해서 일을 맡겼다.

비영리사단법인 대표직을 퇴임하고 비영리재단에서 사회복지와 문화예술을 접목한 일을 시작했다. 특수한 계층을 대상으로 특수프로그램을 기획하고 보급하면서 교육생들과 마음을 열어가면서 대화했다. 그리고 그들이 원하는 교육재료를 구하고 그들이 하고 싶은 방향으로 커리큘럼을 강사와 협의하고 조절하면서 마음안의 앙금들을 녹여갔다.

자기표현력이 없던 그들이 조금씩 마음을 열어 사회에 복귀할 수 있는 인성과 사회성을 되찾아 가는 것을 보며 보람도 느꼈다. 그러나 최근의 어느 날 제일 잘하던 어느 교육생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강사들은 무척 안타까워하면서 기획자인 내게 손을 써달라고 했다. 손을 쓰는게 어떤 것인지 잘 모르지만 원칙을 가지고 움직이는 거대한 조직에 나는 아무 손을 쓸 수 가 없었다. 고작 경위를 알아보는 정도에 그치는 정도일 뿐이었다.

나는 아무리 정성을 들여 오래 가르쳐도 개인의 의사와 상관없이 조직구조에 따라 공동체안에서 빠져야 하는 그러한 구조가 마음이 아팠다. 그냥 그러려니 하고 아무렇지 않게 생각하고 넘기기엔 나는 여전히 달 밝은 그 날 펑펑울었던 40대나 지금이나 똑같이 감성이 충만한 것 같다. 함께 울어주기만 할 뿐 그 삶을 감당을 하지 못하고, 그렇다고 금방 잊어버리기엔 나는 내가 하는 일의 흔적에 미련을 가지고 있는 모자란 인간인 것 같다.

그래서 오늘은 대구에서 돌아오는 길에 사회복지 대학원을 공부해서 좀 더 나를 단련하려고 하니 신부님은 고개를 절래절래 흔드셨다. 농담처럼 웃으시며 하지마라 하시는 것이었다. 그것을 재미있게 소화하는사람이 따로 있고 나 같이 천생 예술가인 사람이 의무와 기술습득하는 것처럼 하면 재미가 없을 수가 있다는 것이었을까?

가끔은 사회복지 현장에서 내가 육두문자를 못 듣고 사는 것이 참 다행이라고 하는 분들이 있다. 전에는 그런 소리에 나도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직업으로 사회복지의 서비스현장에서 일하다 보니 고운소리와 좋은 소리가 아닌 험한소리나 있는 그대로의 소리가 아니면 나는 너무 당황하고 아파한다. '험한 언어'와 '내숭 언어' 대한 면역력이 없는 셈이다.

십년 전이나 지금이나 여전히 달이 밝다. 그리고 세상도 많이 변한 것 같지만 정작 별로 변하지 않았다. 여전히 여성장애인 성폭력은 친족이웃중심으로 많이 일어나고, 장애인이 임신하면 "어떻게 키울려고?" " 그 애가 태어나면 오히려 원망할지도.." 하며 낙태유도가 공공연하고 은밀히 그다지 고액이 아닌 금액을 가지고도 쉽게 뒷거래를 한다.

그리고 매주 사무실에 오는 다양한 계층의 사람들은 사회복지사들이 해결할 수 없는 것들을 기대를 가지고 이야기를 종종하고, 즉석에서 받아 들여지지 않을 경우 관장실이나 시청에 전화를 한다. 여전히 특수한 장소에서 행해지는 교육은 해당교육생보다 그 교육을 관리하는 사람들의 의향에 따라 내용이 결정지어질 때가 많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늘 일정기간 되면 차오르는 달처럼 여성장애인문제는 지속적으로 드러내야 하고, 억지요구를 하는 사회복지현장에서 복지사는 상대가 누구던 간에 억지요구를 하던간에  절대 화를 내지말고 늘 친절해야 한다. 그리고 교육생의 의도와 무관하더라도 특수장소에는 프로그램에 하나라도 더 보급되게 기획해야 한다.

왜냐하면 감정이 살아있고 심장이 펄떡이고 있으니깐. 살아있는 한 누군가는 해야 하는 일이고 이왕이면 그 일에 관심이 있는 사람이 당사자입장에서 지푸라기만큼의 변화라도 기대를 하면서 할 수 있으니깐. 그래야 그 많은 사람 중에 단 한사람의 심장이라도 다시 세상속으로 향하게 할 수 있으니깐.

덧붙이는 글 | 감정노동 공모합니다.



태그:#여성장애인인식개선, #특수프로그램인식개선, #사회복지인식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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